제목: 보게하시는 주
본문: 누가복음 18장 35절 ~ 43절
설교자: 조정의
만일 여러분이 앞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삶이 불편하고 힘들어질지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잠시 눈을 감아보십시오. 말씀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일어나 식사를 하러 나가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나 장의자를 빠져나와 통로를 따라 예배실 뒷문을 향해 걸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밀어서 열고 계단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계단을 따라 내려갑니다. 머리 속에 그려지십니까?
아마도 우리가 수십번 반복해서 눈으로 본 기억이 있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쉽게 상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눈을 감고 그대로 해보려 한다면 장의자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부딪히고 통로에 나와서 사람들과 충돌할 것입니다.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볼 수 없다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많은 것들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지고, 위험해질 것입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실명된 눈은 현대의학으로도 완전히 되살리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볼 수 없는 사람, 맹인을 만납니다. 그가 언제부터 볼 수 없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보다 의학이나 시설이 형편없었던 시대에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삶을 살았을지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겠지만, 그 소원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절망을 가지고 살아가던 맹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보게 하시는 주”가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보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고 찬양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 주를 만난 맹인(35-37)
때는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셨고, 드디어 누가는 특정한 지명인 “여리고”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여리고”라는 지명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금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다는 힌트를 제공합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행로의 마지막 기착지입니다. 거기서 예루살렘까지는 고도가 높아지는 험한길을 따라 약 32km를 가야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오는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 순례자들은 이 길을 이용했고, 유월절 몇 주 전이었기 때문에 수만 명의 유대인이 이미 이 길을 통과했을 것입니다.
구걸하여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장소만큼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수만 명의 행인들 중 적어도 몇 사람은 그들이 부르짖을 때 자비의 손길을 내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맹인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35절에 나와있듯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라고 말합니다. 왜 서로의 기록이 다를까요?
두 개의 여리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구약시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점령하여 흙무더기 속에 파묻힌 옛 여리고 성이 고, 또 다른 하나는 신약시대 헤롯 대왕이 팔레스타인 통치 기간에 재건한 새로운 여리고입니다. 어떤 여리고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느냐에 따라 “가까이 갔다”고 말하거나 “떠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마태는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었다고 말하지만, 마가와 누가는 한 사람만 언급합니다.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특별히 마가는 그 한 사람의 이름을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라고 밝힙니다(막 10:46). 두 사람의 맹인 중 바디매오가 대표로 말을 했고, 그래서 마가와 더불어 누가도 이 바디매오에게 초점을 두고 기록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누가가 말하는 맹인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그는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리가 지나감을 들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월절이 가까웠기 때문에 수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 길을 통과했을 것입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은 맹인은 확실히 더 밝아진 청력으로 무리가 지나가며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예수님과 그 열두 제자들 그리고 큰 무리(마 20:29), 허다한 무리(막 10:46)가 함께 맹인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맹인은 뭔가 특별한 무리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무리의 규모가 커서 혹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특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해 제자들이 논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 탈환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맹인은 묻습니다. “이 무슨 일이냐”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난 고향 마을 이름입니다. 별볼일 없는 조그만 동네라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요 1:46).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라는 말이 “위대한 선지자 예수, 뛰어난 랍비 예수, 능력의 치료자 예수”라는 말처럼 거창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진짜 누구인지 알아본 인물이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데, 그때 이후로 오늘 본문에서 처음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고백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나사렛 예수”를 불렀던 사람은 바로 가버나움 회당에 있던 귀신 들린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흥미로운 것은 귀신들린 사람이 나사렛 예수를 제대로 알아본 일 바로 직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 밝혔다가 동네 밖으로 쫓겨나 낭떠러지에서 밀쳐 떨어질 뻔했습니다. 나사렛의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 보지 못했을 때, 한 사람의 귀신 들린 사람이 알아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에 부자 관리를 만났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하지만 돈을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실수로 “선한 선생이여”라고 예수님을 불렀지만 그분이 유일하신 선한 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열두 제자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쳐주시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의 사명을 밝혀주셨으나, 그들의 기대에 눈이 가려져 자기들 눈 앞에 있는 메시아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부자도, 열두 제자도,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도 앞을 볼 수 있는 건강한 육신의 눈을 가져 예수를 보고 따랐지만, 진짜 예수님이 누구신지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보지 못하는 맹인이 “나사렛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2. 맹인의 반응(38-39)
맹인은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절)
그가 무리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앞서 가는 자들이 맹인을 꾸짖었습니다. “잠잠하라!” 조용히 하고 있어!
그러자 맹인은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스윈돌은 여기서 맹인이 정신 이상자, 간질병자,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악령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큰소리로 외치면서 격렬히 항의하고 외치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스윈돌, 537).
맹인은 억제할 수 없는 감정으로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듯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9절)
우리는 맹인의 이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 고백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이심을 이해하는 사람이 하는 고백입니다.
맹인은 나사렛 예수가 행하신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귀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봤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치유(40-43절)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이 맹인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맹인을 데리고 예수님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을 구하는 데 있어서 맹인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구약시대 소경이 고침 받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는 능력이 예수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렇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사 29:18)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믿음입니다.
맹인은 예수님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주여 내가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네 요청대로 이제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맹인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던 그 믿음이 그를 낫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이 “구원”이라고 번역한 것처럼 이 단어는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회복)과 영혼의 구원을 모두 가리킬 수 있는 단어입니다. 중의적으로 누가는 맹인의 눈이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음으로 보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눈을 보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맹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보게 하셨습니다. 육체의 눈을 회복시키셨을 뿐 아니라 영혼의 눈을 뜨게 하셔서 예수를 주로 믿고 따르게 하셨습니다. 육체와 영혼에 내려진 은혜, 모두 보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흘러 나왔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따르던 무리들이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적용
이것이 오늘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 바디매오가 보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변에서 맹인처럼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 등 육체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우울증, 과격한 분노 등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장애로 고통받습니다.
게임 중독, 인터넷 중독, 도박 중독, 약물 중독 등 눈이 먼 것처럼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큰 삶의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육체의 장애, 정신적 장애, 그리고 삶의 장애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죄입니다. 죄가 들어오고 죽음이 찾아왔고, 죄가 질병의 시초가 되었으며, 죄가 정신을 혼란시키고, 삶을 망가뜨리는 뿌리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며 누구도 속에서 솟아나는 죄의 욕구를 완전히 잠글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맹인처럼 우리는 죄의 장애에서 절대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눈을 열어 보게 하셨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주가 보게 하지 않으셨다면 누구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완전히 멀어버린 눈을 스스로 열어 하나님을 바라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가 우리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으로 우리를 보게 하시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침례에 순종하는 분들 모두 하나님의 이와 같은 축복을 입었습니다. 여러분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셔서 맹인처럼 어두운 여러분의 영혼이 보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4:6).
아직까지 그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하는 분들께 간절히 구합니다. 보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십시오. 죄로 막힌 내 눈을 열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십시오. 보게 하시는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라, 네 믿임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제 영적 눈을 뜨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살아가시는 분들께 간절히 구합니다. 영적 장님에서 벗어나 볼 수 있게된 이 특권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생활한다면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매순간 느껴질 것이 아닙니까? 영적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축복과 은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바울처럼 이렇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