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믿고 있는 자의 특징
본문 : 누가복음 7장 1~10절
설교자 : 최종혁
말씀을 준비하고 나서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제목이지만 성경에서 참 중요하고 자주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증거’,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입니다. 전에 함께 공부했던 야고보서도 참된 믿음의 증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도 요한이 기록한 목적에 대해 너희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 말씀을 읽고 듣다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 진짜 구원받은 사람인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그럼 나는 믿지 않는 사람인가? 예수님의 설교를 함께 공부할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인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불확실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말씀들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제시해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목표는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도 이것을 백퍼센트 순종할 수 없음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를 삼고 그것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다, 이렇게 해야 영생, 믿음을 얻게 된다는 의미로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지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해내야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백퍼센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 올바르고 하나님의 기준인지 말해주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구원받은 자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고 그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제자들도 아닙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믿음 있는 자가 어떤 특징을 보이는지 잘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병 고치는 일을 하셨으며 자신이 누구신지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셨던 복음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던 것과 달랐습니다. 새 옷의 한 조각을 낡은 옷에,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전통은 합칠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일 논쟁을 통해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대적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셔서 열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6:20-49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인데,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주제로 말씀하셨습니다. 낮아진 마음, 원수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듣고 행하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사람의 특징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주로 부르는 사람은 그 권위에 순종하는 자라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들은 들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따르든지 그렇지 않기로 결정하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한 사람을 만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북부 사역의 본거지였습니다. 어업이 성행했고 무역로에 위치해서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린 백부장, 오늘날로 중대장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이는 부유한 층이었습니다(5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종이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을 보면 중풍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보면 이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물건을 쓰다가 망가지면 버리고 새로 삽니다. 당시 종의 개념이 그러했습니다. 물건으로 취급했으므로 병들면 죽게 내 버려도 사람들로부터 지탄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종이지만 하나의 인격체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많은 활동을 하셨던 곳입니다. 백부장은 그곳 사람이기에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장로 몇 사람을 보내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기이에 유대인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일 수 있습니다. 종의 상태가 위중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여러 이유 중 가장 궁극적인 이유가 뒤에 나옵니다.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백부장을 위해 간구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이 일이 벌어진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후의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저희는 믿음있는 자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볼 것입니다. 첫 번째로 4-5절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장로들이 나와서 예수님 앞에서 간절히 구하면서 말합니다.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른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백부장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말하면서 그 청을 들어주기를 구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주셔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유대 장로들이 백부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에게 이런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미워했고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백부장은 그들을 압제하고 있던 정복자들의 하수인이 되어서 그들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욱 좋아하지 않을 법한 사람입니다. 이런 원수 같은 사람을 위해 이렇게 간구할 수 있을까요?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백부장이 그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유대교로 개종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방인 입장에서도 유대인에게 호의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유대인들이 사랑했습니다. 그 백부장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분명히 드러나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먼저 사랑한 것입니다. 그가 먼저 분명한 사랑을 보여주었을 때 유대인들도 그에게 호의를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열심이나 피정복민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로 6절~7절에는 백부장의 겸손한 태도가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라 가셨습니다. 백부장의 청을 듣고 그 종을 고쳐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집에 가까이 갔을 때 백부장의 다른 사신들이 도착합니다. 누가는 백부장의 말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백부장이 예수님을 뭐라고 불렀는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자신보다 높은 분이라고 생각하여 사용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제 집에 들어오시기에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차이가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차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귀찮아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이 익숙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높은 사람에게는 직접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은, 앞에서 유대 장로들이 합당하고 했던 말에 함께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의 요청에 예수님께서 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맛본 베드로가 그랬고, 예수님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떠났다가 돌아왔던 탕자가 그랬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세리가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물고기를 많이 잡은 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탕자는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전에서 세리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겸손입니다. 그저 무조건 자기를 비하하고 ‘나는 아닙니다. 안됩니다.’라고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겸손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고 그분이 내 앞에 오시는 것과 내가 그 앞에 서는 것조차도 감당치 못하겠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마음이 낮아진 자, 마음이 겸손한 자가 바로 백부장이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믿음의 역사(7절-10절)입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중간에 하지만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까지 같이 낮춰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은 할 수 있다, 하라, 할 수 있게 돕겠다고 하시는데 내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백부장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나서 ‘하지만’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탕자는 아들됨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했지만 그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세리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습니다. 나를 바라보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겸손은 믿음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겸손은 믿음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겸손입니다. 내가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어떤 자인지 알았지만 예수님도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믿었습니다. 그가 분명히 알았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을 꾸짖었을 때 귀신이 도망하여 나아고, 열병을 꾸짖었을 때 열병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소식도 그는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으려고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은 ‘만지려고’ 했습니다(6:19). 당시 사람들은 뭔가 접촉해야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고치실 수 있다면 예수님이 그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분, 예수님이 주인이시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을 통해 그는 예수님이 ‘주’시라는 것을 알았고, 그는 ‘주인됨’의 의미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굳이 자기 집으로 오지 않으셔도 상관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하면 하나이다” 이것이 ‘주인됨’의 의미입니다. 주인은 권위를 갖습니다. 그리고 권위 아래 있는 자는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권위이고 누군가를 주인이라고 부를 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의 설교에서 마지막에 하셨던 말씀과 동일합니다. ‘주여’라고 부르는 자는 그 주인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주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이 그저 자신의 주인이 아닌 모든 것, 심지어 질병의 주인도 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셨을 때 귀신이 도망하고 병이 나갔습니다. 귀신에게도 질병에게도 예수님은 주인으로서 그 위에 있는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백부장은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예수님께 ‘수고하지 마시라고’했던 두 번째 이유입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이기에 오시지 말라고 했고 또한 굳이 그렇게 오지 않으셔도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이 꼭 직접 손을 대거나 해야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예수님을 오시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은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병이 나았던 여인처럼 행동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어떻게든 예수님과 접촉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인됨’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인정하며 담대히 그 은혜로운 주인 앞에 나가 자신의 필요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백부장의 믿음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두 번 놀라셨는데 백부장의 믿음에 놀라시고 백성들의 믿음 없음에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회당을 짓고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에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겸손과 그에 따른 믿음의 언어에 놀라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 중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그 믿음이 어떤 역사를 이뤘는지가 등장합니다. 종이 나았습니다. 죽게 되었던 종은 이미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겸손한 믿음의 백부장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사랑의 행위, 겸손의 태도,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은혜를 구했던 유대 장로들과 백부장의 차이가 믿음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줍니다. 유대 장로들은 그들이 가진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백부장이 한 일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어떠함때문에 은혜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도, 내가 그 앞에 서는 것도 합당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긍휼을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기에 겸손히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긍휼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내가 누군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믿음의 역사, 그 시작에 있는 것이 겸손입니다.
죄의 시작에 하나님을 향해서 높아진 마음, 즉 교만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사탄이 그렇게 타락했고, 아담과 하와도 그렇게 타락했습니다. 결국 그 교만을 꺾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이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서 우리는 신앙생활, 믿음생활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시작에 있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 믿음을 계속 자라게 하는 것, 성장하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바로 그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동일합니다.
겸손하지 않고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굳이 믿음이라는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믿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고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주님을 닮아 갈 수 없습니다. ‘교만한 것만 빼면 참 주님 사랑하고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해갈수록 ‘나는 점점 주님을 닮아가고 있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난 참 죄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지 않습니까? 그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믿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이 따라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구원하셔서 당신을 위해 살게 하셨지.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시지.’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 있는 자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때로 성경을 읽으며 좌절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으면 구원하실 일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겸손히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 분께서 겸손한 자에게 처음부터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