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들까?

본문 : 요한일서 1장 5절~10절

설교자 : 조 정 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머지 사도가 모두 순교한 뒤 마지막 사도로서 모든 교회에 요한일서 편지를 통해 그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분명히 알게 했다(요일 5: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그가 직접 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듣고, 만져본 영생의 주님과 그들이 사귐이 있다는 것을 편지 초반부터 분명하게 밝혔다(요일 1:1-4).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영원한 사귐이다(요 17:3).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그 순간부터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사귐을 누리게 된다(요 10:10).

세상 모든 사귐엔 끝이 있다. 연인은 자주 헤어진다. 가장 친밀하고 꽉 달라붙어 있는 사귐이 부부의 사귐인데 그마저 죽음이 갈라놓는다. 그러면 주님과 우리의 사귐에도 끝이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로마서 8장 마지막 구 절에서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롬 8:39).

하지만, 사귐 자체를 끊을 수 없더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귐이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소원해질 수도 있다. 관계가 끊어지지 않아도 관계가 멀어지거나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차이를 경험한 적이 없다면 어쩌면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려 본 적이 없어서 일 것이다. 아니면 멀어진 관계를 너무 오래 끌고 온 것이다. 과연 무엇이 우리가 영생을 온전히 맛보지 못 하게 하는가?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드는가?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을 위협하는가?

1.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드는 죄(5)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죄다. 죄는 5절에서 “어둠”으로 비유되었고, 6절에서는 “어둠에 행하”는 것, “리를 행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그동안 비유로 설명한 것의 실체인 “”를 명백히 드러냈다(범죄, 불의 포함 총 6번).

오래전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다고 말했다(사 59:2). 그렇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주범이다. 구원받기 전에도 그랬고 구원받은 후에도 그렇다. 죄와 허물은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 단절 곧 죽음을 가져왔고(엡 2:1), 예수님으로 인해 생명을 얻은 자들에게도 관계의 문제를 가져온다.

5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식을 전하면서 아주 명확하게 왜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멀게 만드는지 설명했다. 요한이 전하는 소식은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 혹은 누군가 연구해서 정리한 교리가 아니다. 그 출처는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직접 말씀하신 권위 있는 진리가 여기에 있다. 바로 우리가 사귐을 갖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빛이시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다(5절).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의 내포하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① 모든 생명의 근원인 빛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물의 근원 이 되신다는 의미, 그리고 ②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가 조금도 없으신 분이란 의미(시 92:15; 신 32:4). 따라오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우리말 성경)의 강력한 부정을 생각하면 후자가 강조되는 것이 분명하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은 죄가 조금이라도 있는 누군가와 사귐을 가질 수 없다. 빛과 어둠은 공존 불가다.

죄 많은 우리도 악한 자와 사귐을 피한다. 계속 입만 열면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거나 욕설이 끊이지 않는 친구를 가까이 두기 싫다. 어울리면 항상 방탕한 삶으로 이끄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 안에 그런 욕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멀리하고 싶을 것이다. 하물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귐을 가질 때 우리가 범하는 죄들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오해하고 하 아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드는 죄를 간과하며 심지어 부정하기까지 한다. 요한은 그런 그리스도인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2. 오해1: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들지 않는다(6-7)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무렵 어떤 자칭 그리스도인은 몸으로 짓는 죄가 영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영지주의의(빛의 종교) 극단적인 가르침 중 하나로 복음을 깨닫는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자는 영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육으로 짓는 죄는 자기 영이 지은 것이 아니거나 하나님께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극단적인 구원파 교리가 이와 유사하고, 십자가에서 단번에 모든 죄가 사하여진 사실을 믿는 이들 가운데 방종하여 그러므로 이제부터 범하는 모든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은연중에 믿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요한은 타협할 수 없는 진리를 외친다. 6절에 “만일 우리 가.”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을 말한다. ‘만일 우리 중 누구라도 이렇게 주장한다면.’ 예외가 없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6절).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어둠에 행한다면 다시 말해 죄를 범한다면(지속, 습관) 그는 첫째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거짓말한 것이고, 둘째, 그리스도의 진리에 따라 행하지 않은 것이다.

잠깐,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죄를 전혀 짓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사망의 몸에서 탄식하고 있지 않은가? 중 세 신학자이자 목사인 어거스틴은 구원받은 자의 상태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구원받기 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다.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 가능성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다. 영생이 없을 땐 죄를 짓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영생을 얻고 나서는 죄를 짓지 않는 게 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가 죄를 짓 는 것은 이제 정상이 아니다. 죄는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자에게 비정상이다. 참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망의 몸을 핑계로 죄를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라 여긴다. 완전히 틀렸다.

정상은 무엇인가? 7절을 보라.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자는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행한다. 죄를 멀리하고 선을 열심히 행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바로 그런 정상적인 삶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귐을 건강하게 만든다. 친밀하게 한다.

당신은 죄가 성도 사이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고 관계를 끊어 놓는지 크고 작은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죄는 하 아님과 그리스도인의 사이를 멀게 만든다. 냉랭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죄를 깨끗하게 해결해야 한다. 요한은 하나님과 함께 빛 가운데 행하며 사귀는 자가 죄를 범할 때, 즉 비정상적인 죄로 인해 하나님과 그 사이가 멀어졌을 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현재형).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3. 오해2: 이미 죄를 용서받았으니 회개가 필요 없다(8-10)

어떤 사람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무신론자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론 부인해도 실제로는 죄가 없는 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바로 회개하지 않는 자다. 죄가 정말 존재하고 자신이 그 죄를 범했으며 그 죄가 하나님에게 저지른 것이고 그분과 사귐을 멀게 만든다면 왜 항상 진지하게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가?

요한은 8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는 대놓고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지만, 죄의 심각성을 처절하게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 양심에 큰 걸림이 되어 하나님께 회개했지만 어떤 날엔 간, 음과 살인을 저지르고도 하나님이 책망하기 전까지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악하게 보실 뿐만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 또한 악하게 보신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가 큰맘 먹고 제시한 일곱 번에 일흔 번을 곱하여 490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렇게 회개하는 이를 언제나 용서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에 490번 죄의 심각성을 알고 회개하는가?

부부 사이를 오랜 세월 서서히 멀어지게 만드는 죄는 다루지 않고 오래 묵혀둔 죄다. 돌이키지 않고 묻어두고 지나가고 넘어가 다 보면 부부의 사귐에 난 실금이 점점 커져 완전히 깊어진다. 하 아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영생을 가졌으면서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귀면서 취약한 관계를 겨우 맺고 산다.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이다.

요한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게 만드는 것이 죄라면 멀어진 그사이를 가깝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자백”이다. 자백은 먼저 상한 심령이 필요하다.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알고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는 관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또한 참 자백엔 핑계가 없다. 죄에 대한 자기 책임에 통감하는 것이다.

‘제가 잘못하긴 했지만, 모든 사람이 이 정도는…’ ‘죄를 범하긴 했지만 하나님 기준 자체가 워낙 높아서…’ ‘이 사람, 이 상황, 이 환경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어쩔 수 없는 죄인 인지라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런 식의 자백이 아니라 내가 내 죄과를 압니다. 내 죄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께, 오직 주께만 죄를 지었고 주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주의 말씀이 옳으시고 주께서 순전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3-4). 이런 자백이 필요하다.

자백엔 하나님의 약속이 따라온다. 바로 용서와 회복이다. 용서와 회복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다. 미쁘시다는 것은 신실한 사랑을 의미하는데, 그분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언제나 자백할 때마다 신실하게 당신의 죄를 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을 탕감하신다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의 불의를 우리 힘으로 갚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 주심으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아들에게서 찾으신 죗값을 우리에게 다시 찾지 않으신다. 대신 아들이 바친 의로운 삶을 우리에게 대신 입히신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자백으로 새롭게 되고 자백할 때마다 깨끗함과 거룩함을 입게 된다.

초등학교 5학년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누리며 살면서 죄를 자백하는 이 부분이 항상 어려웠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 용서해주신 죄를 왜 자백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죄가 영혼의 종착지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 죄를 왜 심각하게 여겨야 할까? 풀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죄 문제는 결국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내 안위만 생각하며 고민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 일독 방식을 통해 아는 로버트 맥체인 목사는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생각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께 나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 나는 몸을 씻을 때는 구석구석을 살펴 깨끗하게 씻는다. 그런데 영혼을 씻을 때 어떻게 주의를 덜 기울일 수 있겠는가? 내가 지은 죄 하나하나 때문에 예수님의 등에 난 채찍 자국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죄로 인해 지옥에서 영원히 당할 고통과 똑같은 무한한 고통을 예수님의 영혼이 고스란히 감당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브라이언 헤지스 <깨어 있음>, 273-4pp).

요한이 마지막으로 10절에 말한 바와 같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한다. 세상은 계속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정의하려 한다. 교만은 자존감으로 동성애와 낙태는 평등한 사랑과 행복추구권으로 간음은 사랑으로 바꾼다. 이런 큰 거짓말에 잘 속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갖는 것을 남자의 본능이라고 생각하고 가족에게 분노하는 것을 타 고난 성품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인정하자.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들지 말자. 이는 모두 죄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죄만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요구하신 긍정적인 면을 무시하는 죄를 생각해보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와 사귐을 갖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행하고 기뻐하시는 일을 거부하는가?

우리 삶에 죄가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른다는 것은 죄에 둔감하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그런 교만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수 있을까? 그 말씀이 심겨 열매 맺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7. 10, 11).

충만한 영생의 기쁨, 그 맛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과 멀 어진 채로 형식적 의무적인 관계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면, 당신 에게는 회개가 필요하다. 하나님 말씀이 당신 안에 있어 많은 열 매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사랑을 가까이에서 늘 경험 하기 원한다면, 당신에게는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매일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이는 죄라도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죄를 자백하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생각과 마음을 품는 것, 범죄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보배로운 분으로 모시지 않은 것, 마땅히 돌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을 회개하라.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구원받았지만 비정상적인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것도 수없이 많이. 하지만 낙심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 오히려 자백을 통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용서와 새롭게 하시는 사랑을 경험하는 기회로 삼아라. 그러면 하나님과 당신 사이는 죄보다 더 큰 은혜로 말미암아 친밀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