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10장 23절 – 11장 1절

설교자: 조정의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복음적 결론이다(고전 8:1). 고린도 성도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하여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지식을 내세우며 교만하게 굴었지만, 바울은 복음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할 것을 요구했다. 가장 흔한 우상 숭배 대상은 바로 자신이다. 복음은 우리를, 자신을 비롯한 모든 우상 숭배의 삶에서 건져내 하나님만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성실히 인도한다.

복음의 원칙과 그것이 적용된 사례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헌신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를 것인지 단호히 결의해보자. 그렇게 함께 복음으로 가정과 교회를 견고히 세워가자.

1. 원칙: 하나님의 영광, 남의 유익을 위하여(23-24, 31-33)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됐다(사 43:7). 만물을 돌보고 배우자와 자녀 나아가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지음받았다(창 1:28, 2:24). 그러나 죄는 자기의 영광과 유익이라는 새로운 대상을 우상으로 숭배하게 만들었다(창 3:5).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모든 순기능이 망가지고 역기능을 일으키며 죄와 고통과 사망이 침범했다. 이 저주받은 운명을 다시 원상복구한 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믿는 우리에게 다시금 삶의 분명한 목적, 가장 중요한 원칙을 제시한다.

그 첫 번째 원칙은 바로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31절). 명령의 대상은 “너희”로 일차적으로는 고린도 교회 모든 성도, 그리고 이 말씀이 적용되는 우리 모든 믿는 자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으로 여겨지는 일들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따라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다”, 그러니까 모든 범주의 일이 다 포함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이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골 1:10). 이렇게 항상 물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는가?’ 또한 우리는 의무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두 번째 원칙은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것이다(33절).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단호히 말했다(갈 1:10).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말이다(첫째와 둘째 계명의 우선순위, 마 22:37-40).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위하여 그 목적과 방식을 따라 사람을 기쁘게 하라는 것이다. 앞뒤 문맥을 보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31, 33절). 

바울이 유대인, 헬라인, 하나님의 교회 즉 성도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 자기 권리를 철저히 포기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는 것이다(고전 9:12). 어떻게든 그들을 얻으려는 것이다(고전 9:20-22).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바울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했다. 왜?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일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삶의 방향성이 뚜렷이 생기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3-24절). ‘모든 것이 가하다’는 말은 아마도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가 교만하게 주장했던 말을 차용한 것 같다. ‘그래 하나님이 금하지 않으신 모든 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바울은 일단 인정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렇게 복음의 우선순위를 세운다: (그러나)“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복음은 ‘해도 되는 일인가’보다 ‘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일인가’를 묻게 한다.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앞세우게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이것은 어떻게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가?’ 복음은 이렇게 끊임없이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갖게 한다.

2. 사례: 양심을 위하여 먹거나 먹지 말라(25-30)

그러면 복음의 원칙을 어떻게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례에 적용할 수 있을까? 먼저, 신전에서 우상 숭배의 방식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자. 우리는 귀신과 교제하는 행위를 하면서 떡과 잔으로 성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다(10장). 본문이 말하는 음식은 “시장에서 파는 것”(25절)과 “불신자 중 누가 청할 때” “앞에 차려 놓은 것”을 말한다(27절).

위와 같은 사례에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이다(25, 27절).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자기 양심을 가리킨다. 시장에서 파는 것이나 불신자가 차려 놓은 것이 우상의 제물일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인 것이다. 이것을 먹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그렇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26절). 만물이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는 주께 속한 선물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같은 취지로 이렇게 말했다: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롬 14:20).

그러므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먹을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릴 수 있다. 반면, 양심에 거리낌이 되면 먹지 않는 게 좋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이것을 먹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라는 의심이 든다면 그 믿음에 따라 먹지 말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더 확실한 길이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법을 따르라.

두 번째 원칙은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이다. 방금 전 원칙과 반대된다. 여기서 양심은 자기 양심이 아니라 남의 양심이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29절). 그러면 어떤 경우에 남의 양심에 의해 나의 자유가 제한을 받게 되는 걸까? 28절을 보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여기서 “누가”는 아마도 앞에 차려 놓은 음식이 우상의 제물임을 알게 되어 양심에 거리낌이 생긴 연약한 성도를 가리킬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이 불가능한가? 아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한다: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30절).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복음의 원칙이 무엇인가? ‘그것이 가한가’가 아니라 ‘그것이 덕을 세우는가’이다. 그래서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명령이 적용된 것이다. 연약한 성도가 실족하는 것은 내가 감사하는 음식을 먹고 비방을 받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연약한 성도가 구원을 받거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은 내가 감사함으로 음식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만족스러운 일이다. 쉽게 말하면 나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구할 때, 하나님은 미소 지으신다. 그분께 영광이 돌려진다. 그것이 복음이 우리를 이끄는 분명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한 삶.

3. 적용: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11:1)

우리 모두가 이런 복음의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하는가? 바울만 그런 게 아니라?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1:1). 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우리에게 이것을 요청한 것이고 또 그렇게 먼저 앞서 살아낸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우리도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렇게 사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주님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려 자기를 대속물로 내어주셨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든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1-3; 참고: 요 5:19; 12:50).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 방법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에 아들을 앉히는 것이었으나 그 전에 마셔야 할 잔이 있었다. 만민의 죄에 쏟으신 아버지의 맹렬한 진노가 담긴 잔이었다.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시고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그 잔을 기쁨으로 마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보이신 본이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되기를 싫어하는 걸까? 혹은 힘들어하는 걸까? 우리 옛 자아가 본성적으로 자기를 최고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 유익을 어떻게든 구하려는 DNA를 가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는 방향을 순식간에 바꾸어 자기 영광을 숭배한다. 이웃의 기쁨을 추구하다가도 갑자기 자기 기쁨을 계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자기연민과 이기심을 살펴보자.

자기연민은 종종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거나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일어난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지?’ ‘어떻게 저 사람은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지?’ ‘왜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 데 나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지?’ 한없이 자신이 불쌍해지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길을 역행하고 있다고 빠르게 진단해야 한다. 복음의 처방을 내려 자기연민이 아니라 타인연민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나는 당신이 받은 상처가 별거 아니라거나 허구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난 상처는 찢어지는 고통이었고 아버지와 단절되는 고통은 침묵하던 그분에게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게 할 만큼 생생했다. 나는 다만 당신이 받은 상처나 처한 상황이 복음이 약속한 영광을 얻는데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연민에 빠지셨다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도 영광 받으실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자기연민은 복음을 역행하는 무서운 영적 질병이다.

이기심은 우리 몸에 흐르는 피처럼 언제나 우리 생각과 태도와 행동에 작동한다. 식사 초대받은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으면 어떤 사람은 ‘아내도 이걸 함께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안타까워하고, 어떤 사람은 ‘내 아내는 이런 걸 나에게 해준 적이 없어’라고 불평한다. 이기심과 자기연민은 절친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을 불쌍한 남편, 아내, 아빠, 엄마, 아들, 딸, 성도로 여기는 자는 그렇게 만든 원수를 여간해서 사랑하거나 불쌍히 여기지 못한다. 계속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줄 때까지 이기적으로 투정 부린다. 자기를 사랑하는 죄는 모든 악의 초기세포다.

복음은 자기를 사랑하던 우리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우리 안에 일으켰다. 그리고 우리 구주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이타적이셨다. 주님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장면을 생각해 보라(요 13장). 그분은 적어도 그들 중에서 자기 유익을 구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기적으로 투쟁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받아서 그들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구하시는 복음적인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이런 구주를 통해 구원에 이르렀고, 이런 구주의 본을 따를 것을 명받았다.

모멸감을 느끼고 자존심이 상할 때, 당신의 유익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복음의 원칙이 당신 삶에 강력하게 적용될 때다. 당신은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타인의 유익을 구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미소 지으신다면, 그런 이타적 섬김과 사랑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다면, 당신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살겠는가?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