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
본문: 히브리서 10장 25절
설교자: 조정의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 단지 모이는 것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밝히신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본문은 “~하지 말라”는 매우 강력한 권면으로 시작합니다(히 13:22). 말씀이 ‘하지 말라’고 금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입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가 이 말씀을 가지고 ‘집회 참석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집회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모이기에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을 멀리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하십니다.
문제는 왜 이런 명령을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왜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으면, 성령께서 원래 의도한 말씀의 의미가 퇴색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 15:8).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행위만 바르게 갖추려 했기 때문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행위로서 모이지 않는 것을 책망하기만 한다면, 예수님이 지적한 외식의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모임 참석을 자기 의로 삼습니다. 자랑합니다.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 성도를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단지 집회 참석 여부만 가지고 불필요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합니다. 참석한 성도는 영적이고 성숙하고 좋은 성도, 참석하지 않은 성도는 세상적이고 미숙하고 나쁜 성도라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결과물은 성령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말씀하신 내용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성도가 집회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함께 모일 때 그 자리에 당신이 있든지 없든지 당신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 16:7).
그러므로 ‘모이기를 힘쓰라’는 성령의 권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을 하나님이 왜 멀리하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단지 모이는 것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야 우리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막 12:30). 단지 집회에 참석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마음으로 모이기에 힘쓸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왜 우리에게 주신 것인지 말씀을 통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정말 중요한 것은 모이기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본문에서 모이기를 ‘폐하다’라는 표현은 ‘어떤 대상과 나의 관계를 끊어버린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표현이 사용된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말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마 27:46).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끊어버린 것처럼 성도가 함께 모인 그 자리에서 나를 단절시키는 행위가 바로 ‘모이기를 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성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얻지 못하는 행위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에게도 손해가 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를 습관처럼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 습관적으로, 또 다른 말로는 전례를 따라(눅 1:9), 혹은 관례대로(눅 2:42) 빠지는 이들이 교회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습관적으로 모임에 빠졌을까요?
예전에 제가 쓴 책 ‘정크 솔질’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질의응답을 했었는데, 그때 한 청년이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간호사로 막 취직했는데, 주일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될까 봐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근무 일정에 따라 반복해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때문에 더 고민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줄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일에 병원을 나가는 날에는 그곳에서 주께 하듯 일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면 되고(골 3:23), 주일에 성도와 함께 하는 날에는 성도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지금처럼 어떻게든 모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라고 말해줬습니다.
저는 그 마음이 참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근무일에 교회 빠지는 것이 하나도 안타깝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점점 삶 속에 퍼져나가, 성도와 함께 모이는 것의 기쁨이나 기대를 사라지게 만들고, 결국엔 근무가 없어 참석이 가능한 모임도 핑계가 있으면 언제든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는 마음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과 끊임없이 싸우라고 권면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신 문제의 핵심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것인지 보지 못하는 것, 결국 다른 즐거움과 필요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룩한 성도와 함께 거하는 일을 진정으로 사모하지 않는 것. 그것이 모이기를 습관적으로 폐하는 것의 진짜 문제입니다.
가끔 중매를 서면 자주 이런 현상을 보는데, 한쪽에서 거의 연락을 안 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용기를 내서 “이날쯤 볼까요?”라고 물으면 “그날은 바쁩니다. 다음 주까지 바빠요”라고 답장이 옵니다. 가능한 날에 겨우 약속을 잡았는데 전날 밤에 또 이런 문자가 옵니다. “미안한데, 오늘 야근을 해야 해서 내일 피곤하니 다음에 만나면 안 될까요?” “지금 출발해도 어차피 늦을 것 같은데, 다음에 만나면 안 될까요?” 결혼이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정말 나에게 마음이 없구나!”라고 생각이 들 것입니다.
반대로 바쁜 일정 중에도 틈틈이 안부를 물어오고, 먼저 약속을 잡고, 전날 야근을 했는데도 오늘 30분이라도 보고 싶어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 사람은 정말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들여다보신다면, 여러분이 교회가 함께 모이는 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중심을 꿰뚫어 보신다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집에 함께 모이는 것을 사모하십니까?
그래서 어떻게든지 모일 수 있다면 모이려고 애쓰십니까? 아니면 어떻게든지 이유가 생기면 빠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까?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면, 저는 성도가 어떤 일이 있어 집회 참석을 못 한다고 말할 때 크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가족여행을 가는 사람, 믿지 않는 가족과 가족 행사를 해야 하는 사람, 가족이 아픈 사람, 직장이 너무 늦게 끝나서 참석할 수 없는 사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 하나님의 집에 함께 모이고자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걱정하게 만들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유평교회 수요집회가 일 년에 52번 있습니다. 때로는 수요일이 공휴일일 때도 있습니다. 만일 어떤 성도가 일 년 내내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일 년, 이 년, 삼 년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어떻게 그 마음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요즘에 다른 지역교회 목사들이 만나면 서로 묻는 것 중 하나가, 수요집회 몇 명이나 나오냐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만 해도 유평은 수요집회와 주일집회 참석 인원이 거의 같았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고 각자가 처한 상황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다만 제가 염려하는 건, 수년 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 혹시 마음이 변한 건 아닌지 그것이 걱정됩니다.
어린 아기를 업고 비포장도로를 걸어서 교회 나왔던 그때 우리의 마음과 차가 있어도 아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의 마음, 그 차이가 안타까운 것입니다. 왜 변한 것일까요?
예전에 미국에서 수요집회를 참석했는데, 선교사 초청 집회였습니다. 인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선교사가 와서 특별집회로 간증하는데, 교회 성도가 약 10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중 셋은 장로였고요. 그 교회 장로 중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예전에는 신앙이 삶의 전부였지만, 지금 사람들에게 신앙은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묻는 참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당신의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같은 부르심을 받은 성도와 함께하는 것을 진실로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정말 당신 삶에서 가장 귀한 분이십니까? 당신 삶의 전부가 되십니까?
3. 주님 오실때까지 힘써 모여야 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삶의 전부라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힘써 모여야 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25절 말씀이 이렇게 끝난다는 것입니다.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주님 오심이 가까울수록, 그것을 우리가 볼수록 더욱 서로를 격려하고 권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주님 오실 날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 날이 다가옵니다(계 22:12).
또한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움을 우리는 세상이 타락하는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말세에 더욱 고통받는데, 바울의 경고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배신하고, 자만하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딤후 3:1-4).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말세의 풍조에서 돌아서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떻게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한 명령은 이렇습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악을 피하고 선을 따르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성도가 더욱더 서로를 돌아봐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성도가 서로 모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히 10:24).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성도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켜 줘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쓸 수 있도록,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도록 열심히 격려해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더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질수록 세상의 빛은 하나로 모여 더 강력한 빛을 발해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더 부패할수록 세상의 소금이 모여 그 강력한 맛을 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오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10:19). 그 길을 내시기 위해 예수님의 몸이 찢겼습니다. 예수님이 죄 많은 우리를 씻으시고 깨끗하게 하사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히 10:22). 우리의 소망을 약속하시고 신실하게 붙드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히 10:23). 그 예수님께서 성도의 모임 중에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이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스타에겐 많은 수의 팬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팬클럽을 만들어 스타에게 ‘조공’이란 걸 하는데, 각자 돈을 모아 선물을 합니다. 스타가 영화나 드라마를 찍으면 밥차를 보내기도 하고 커피를 돌리기도 합니다. ‘우리 누구 잘 봐주세요’라고 써 붙이고 홍보를 해줍니다. 스타가 직접 뭔가 해준 것도 아닌데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힘과 뜻을 다해서 팬클럽끼리 모이기에 힘씁니다.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스타에게 하는 것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자기를 낳고 길러준 부모님에게 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고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예전에 친구와 입양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입양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상관 없었던 한 사람의 인생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하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있는 희생적인 사랑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을 듣고나서 친구가 저에게 묻더군요. “그러면 몸이 불편하거나 심각한 질병에 걸렸거나 정신적인 어려움이 있는 아기를 입양하는 건 어때?” 솔직히 싫었습니다. 그렇게까진 못하겠더라구요. 아프고 병들고 온전하지 않은 아기를 내 자녀로 삼고 평생 책임지고 사랑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만일 나에게 자녀가 있는데, 그런 온전치 않은 아기를 자녀로 삼기 위해 자식의 피를 수혈해주거나 신장을 이식해 줘야 한다면 어떨까요? 그 누가 이런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병들고 온전치 않은 아기를 양자로 삼으려 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죄로 병들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온전치 못했던 그때,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자녀삼아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모이기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임 중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우리가 함께 깨어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 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수요일 저녁 8시부터 9시 반까지, 주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만일 여러분이 성도의 모임 중에 함께 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자기 마음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성도의 모임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가? 내가 거기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로 안타깝고 가슴아픈가? 할 수만 있거든 성도가 모인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열렬히 타오르는 사랑이 내 마음속에 살아있는가?
그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