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의 하나님

본문: 시편 117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17편은 가장 짧은 시편이자, 장을 기준으로 했을 때 단 두 절로만 구성된 성경에서 가장 짧은 장이기도 하다.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라 내용도 다른 시편에서도 자주 보게되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찬양의 명령, 예배로의 초대이기 때문에 여러 사본에서 117편을 116편의 결론으로 보거나 혹은 118편의 시작으로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116편은 우리가 살펴봤던대로 매우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118편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에 감사하며 또한 베푸실 구원을 기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비해 117편은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1절)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앞선 4개의 시편과 마찬가지로 이 시편을 유월절에 부르면서(애굽 할렐의 다섯째 시) 자신들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억했겠지만, 이 시편은 그 범주를 넘어선다는 얘기다.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모든 나라와 백성이 그렇게 해야할 것을 말한다. 따라서 117편은 하나의 독립된 시편으로 봐야한다.

시편 117편은 마지막에 나오는 “할렐루야”의 의미를 가장 간단하고 분명한 언어로 표현한 시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는 좋은 일이 있을 때 외치는 감탄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분명한 명령이다. 시편 117편은 1절에서 그런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예배를 명령하고, 2절에서는 그 이유를 밝힌다. 누가 언제 기록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명령이 이 시편에 기록되어 있다.

명령(1절)

이 시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난다. 1절의 “여호와를 찬양하며”는 할렐루야의 온전한 형태이고 2절 끝의 할렐루야는 축약된 형태다. 찬양은 칭찬의 다른 말로 이해하면 그 의미가 정확하다. 둘의 차이는 방향이다. 칭찬은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향하는 것이라면, 찬양은 반대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동일하다. 대상의 뛰어남, 아름다움, 위대함, 훌륭함, 업적 등을 드러내어 대상을 높이는 것이다. 칭찬의 경우 그것을 인정하는 성격이 있다면, 찬양은 그것을 존경하는 성격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특히 “예배”라고 한다. 이 예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여기 나오는 ‘찬양’, 즉 히브리어 ‘할랄’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사어인 ‘찬송’은 히브리어 ‘샤바흐’인데, ‘할랄’과는 다르게 많이 사용되지 않는 단어다. 만약 이 시편이 포로기나 그 후에 기록되었다면, 저자는 의도적으로 당시에 다른 나라들에서도 통용되던 아람어로도 읽을 수 있는 이 흔하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의 범주가 더 와닿게 했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명령은 “모든 나라들”와 “모든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찬양하라는 명령의 대상이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겐 별로 특별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특별하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다른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시편의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온 땅”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은 종종 찾아볼 수 있다.

66:1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100: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하지만 나라나 백성이 언급될 때는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찬양하라고 명령하기 보다는 그들 가운데서 찬양하라는 명령이나 혹은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의 내용이 많다.

18: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96: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108: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그런데 시편 117편은 직접적으로 이방 나라와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할 것을 명령한다. 찬양으로의 부름이나 초대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않을 때의 결과를 생각하면 이는 엄중한 명령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이다. 따라서 여기 1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도 그런 특권을 누려야 하고 또한 누릴 수 있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백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구원은 신약에 와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존재했던 개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시면서 그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2:3).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면서도 그들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출 19:6).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나라로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 그런 역할을 하게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읽었던 말씀처럼 “백성들 가운데에”, “만민 가운데에”, “뭇 나라 중에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크신 일을 선포하는 일을 하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이다. 이 명령은 다른 민족들 앞에 가서 자랑을 늘어 놓으며 그들을 조롱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을 알게 하여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는 명령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점점 그 본래 의미를 잊었고, 그들과 다른 민족을 구분할 뿐 아니라 분리하기에 바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거룩은 도덕적인 분리였지 관계적인 분리가 아니었는데, 그들은 보다 편한 관계적 분리에 집중했고, 도덕적으로는 오히려 이방인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은 다른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으로 선포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랬고, 심지어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는 이 문제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왔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이 땅에 임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권능을 얻었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그런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처음 세워진 교회의 특징은 ‘하나됨’이었다. 그들은 “함께 있었”고 사로의 필요에 따라 소유를 나누었다(행 2:44-45).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썼고,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을 예배했다(행 2:46-47). 교회 안에 구제의 문제로 어려움이 생겼었지만 교회는 그 문제를 잘 해결했다. 교회 밖에서 큰 핍박에 있었을 때 교회는 흩어졌지만 교회는 나눠지지 않았다.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구원 받는 자를 더하셨다.

교회의 이런 하나됨에 큰 균열을 가져왔던 것은 내부의 큰 죄나 외부의 극심한 핍박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교리적 견해 차이였다.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자기들처럼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보내시면서 하나님은 같은 환상을 3번이나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셔야 했다(행 10:15). 베드로를 통해 전해진 복음을 통해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이 구원 받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는 것이 보였을 때, 유대인들은 놀랐었다(행 10:45). 성령이 임하신 것이 놀라웠던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신 것이 그들에게는 놀라웠던 일이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비난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그제서야 유대인들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 11:18). 그들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일련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하셨음을 분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이방인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정리되었어야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시고, 본격적으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의 구원 문제는 더욱 큰 이슈가 되었고 결국 예루살렘에서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서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야했다(행 15장). 결론은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그 사실을 다른 교회들에게 알렸다.

공식적으로 결론이 내려졌으니 더 이상은 같은 문제로 다툴 일이 없었을 것 같지만 이번에도 역시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초대 교회 안에는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서신서를 보면 그런 주장을 하는 거짓 교사들이 여러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더라도 율법의 규례는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이방인은 먼저 유대인이 되고 나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리 측면에서 보면 이방인이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싶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진 이후 유대인들은 약 1500여년을 이방인과 자신들을 분리하며 살아왔다. 최소한 종교적으로는 그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포로기 이후의 유대인들은 더욱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여전히 이방인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교제를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던 바울은 이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맞닥뜨려야 했다. 그 중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15:7–1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8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0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을 이미 구약 성경이 분명히 기록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구약의 말씀을 인용했다. 9절은 사무엘하 22:50에서, 10절은 신명기 32:43에서, 그리고 11절은 시편 117:1에서, 12절은 이사야 11:10에서 인용했다. 구약의 율법서, 예언서, 시편에서 고루 인용하여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항상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셨다.

여러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이 시편은 애굽 할렐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고 함께 불렀던 노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성하실 것이었다.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길을 활짝 여실 것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나라와 민족이 여호와께 돌아와 예배할 것을 기대하셨을 것이다.

시편 22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기록한 후에 그분의 승리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22:27–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시편 117편을 부르시면서 기대하셨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2:11–18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교회는 “한 새 사람”이 되어, 그 안에서는 어떤 나라나 민족적인 구분도 사라진다. 그렇게 지금 각 나라와 민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따로 또 함께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에서 모여 드리는 하늘의 예배가 요한계시록 7:9부터 기록되어 있다.

7:9–12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즐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수만명이 들어가는 경기장이 생기고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경기를 보는 것은 중계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잘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기를 제대로 즐기려면 모여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현장에 가지 못하면 어느 장소에 모여서 함께 경기를 즐기기도 한다. 그마저도 안되면 온라인으로라도 같이 경기를 즐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성 중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가지고 우리는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 인해서는 비할 수 없이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배다. 그것이 찬양이고 찬송이다. 노래하는 것도 즐겁지만 그보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누구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고, 누구와도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이것이 정말로 우리가 사모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기다리고 기대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명령이다.

이유(2절)

다음으로 2절 말씀은 이 명령이 합당한 이유를 말한다. 이유는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다. 여기 언급된 두 속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하시는 핵심적인 표현이다.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 헤세드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이셔서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속성이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이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사랑은 쉽게 변한다. 사람이 쉽게 변하기 때문이다. 십대 아이들을 보면 어제까지 누가 너무 좋다고 하다가 오늘이 되면 또 다른 사람이 너무 좋다고 한다. 이유도 많지만, 결국 자기가 좋은 사람이 좋은 것이다.

요즘 결혼식에서 결혼 서약을 들어보면 재밌는 내용이 많다. 정말 일주일이라도 지킬까 싶은 서약을 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침대로 밥을 해서 가져다 주겠다거나, 매일 밤마다 꽃을 선물하겠다는 내용들이 그렇다. 어떻게든 그렇게 사랑을 표현하겠다는 예쁜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대로 지키기는 불가능한 서약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은 다르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에 대한 언약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여자를 사랑하라고 명하셨다(호 3:1). 언약을 깬 이스라엘이라도 여전히 사랑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2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다”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는 일반적으로 크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강함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서 지배적이라거나 이기다는 의미를 가진다.

7:18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65:3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즉,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압도다. 그래서 스펄전인 이 부분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찰스 스펄전, <시편 강해 9권 상>, 406, “이 자비는 매우 크고 강력하다. 하나님의 강하신 자비는 마치 온 땅을 뒤덮는 홍수처럼 압도적이다. 그것은 모든 경계들을 파하고, 온갖 부류의 모든 인류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다는 것은 모든 장애와 방해를 압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그 사랑을 나타내신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 사건이 그런 사건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보여주셨다. 로마서 8장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우리를 대적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크고 그의 진실하심은 영원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는 진리이다. 시편 117:2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도전

시편 117편을 정리하면 이렇다. 모든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해야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조금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가? 2절의 이유는 “우리에게 향하신”이라고 하여 그 대상이 한정되어 있다. 그럼 1절의 명령도 “너희 하나님의 백성들아”가 되어야 맞을 것 같다. 하지만 1절은 그 범주가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로 확장되어 있다. 어떻게 이 관계를 이해해야할까?

1절은 모든 나라들과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은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충분하고 합당한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117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경험한 우리가 아직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와 함께 예배하자고 초청하는 노래인 것이다.

마치 정말 맛있는 식당을 발견한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식당에 가자고 하는 것과 같다. 정말 좋은 노래를 발견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노래를 추천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다.

이스라엘이 빠졌던 함정,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을 우리만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일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회 밖의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아무래도 한 교회에는 비슷한 사람들(성향, 배경, 출신, 비전 등)이 모이기 쉽다보니 그렇지 않은 사람 그 안에서 소외감을 느껴서 떠나기도 쉽다.

어떤 부분들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편에 내포된 중요한 의미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지만, 우리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 모든 백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1절의 명령을 선교적인 명령으로 보기도 한다. 모든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그들에게 가서 하나님에 대해서 전해줄 사람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고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명령 자체는 찬양하라는 명령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심을,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선포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할렐루야”라는 가장 높은 명령에 올바르게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도 누구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진다. 언젠가 우리는 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릴 구원하신 어린양을 모든 나라와 민족이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찬양하는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날을 고대하며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의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