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메마른 땅에 임한 은혜
본문: 창세기 47장
설교자: 이병권
요셉의 생애가 살펴보고 있는데, 이야기의 초점이 요셉에게서 조금 더 넓게 야곱과 그의 가족에게로 맞춰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47장은 그 초점이 야곱에게로 옮겨가기 전에 요셉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47장을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세 부분이 그 내용에서부터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이 본문을 연극으로 만든다면, 세 가지 배경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바로가 있는 곳, 둘째는 요셉이 있는 곳, 셋째는 야곱이 있는 곳, 이렇게 세 가지 배경입니다. 그럼 각각의 장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본문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바로를 만났을 때 할 말을 알려줬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요셉이 아버지와 형들을 데리고 바로를 만나러 가면서 오늘 본문이 시작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가족들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 중에 다섯 명을 택해서 바로 앞에 나아갑니다.
요셉이 택한 오형제는 누구일까요? 성경에는 어떤 힌트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섯 명의 선발 기준에 대해서 학자들 나름의 추측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뛰어난 자들을 택했을 거라고 보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오히려 왜소한 다섯을 택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에게 위협감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을 거란 추측입니다. 우리는 다섯 명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섯 명이 누구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요셉이 바로에게 형들을 소개했다는 것입니다. 형들을 본 바로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3)
마치 미리 맞춰본 것처럼 바로는 요셉이 예상했던 질문을 했고, 형들은 요셉이 미리 알려준 대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명령합니다.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6) 바로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고센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바로의 가축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왕의 소유를 관리하는 특별공무원으로 채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으로 보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중요한 인물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애굽 사람들이 이들을 볼 때는 어땠을까요? 애굽 사람에게 이들은 목축을 업으로 살고 있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으로 피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자들이 왕 앞에 나아가 면담을 했고, 왕으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았습니다.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애굽의 왕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애굽의 왕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이러한 혜택을 받았을까요?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 때문에 받은 것입니다. 이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잘나서가 아니라 뭔가를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요셉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은혜’ 옛적에 다윗 왕에게 자격 없는 므비보셋이 요나단으로 인해 은혜를 받은 것처럼, 자신이 한 것은 없지만 요셉으로 인해 왕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살아계시고 참되신 왕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함이나 내가 잘나서 그 결과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일의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받을 때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 인해 내가 받은 은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도님들의 사랑을 경험할 때, 그런 과분한 사랑을 받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뭔가 잘 한 것이 있나? 내가 뭘 잘했지?’ 그런데 아닙니다. 다시금 생각합니다. ‘착각하지 말자.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내가 누리고 있구나! 주님 덕분이구나! 오해하지 말자!’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고자 다짐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그 은혜에 깊이 잠길 때,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이 은혜를 받은 자, 그 은혜를 아는 자의 반응입니다.
형들은 요셉으로 인해 바로를 만났습니다. 이제 다음 순서는 야곱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아버지 야곱을 바로 앞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선 야곱은 바로를 축복합니다. 그동안 야곱의 조상들이 다른 나라 왕을 만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와 아비멜렉, 살렘 왕과 소돔 왕을 만났고, 이삭도 아비멜렉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조상들이 왕을 축복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야곱은 바로를 축복합니다. 야곱이 바로보다 더 높은 자인 것처럼 그에게 복을 빌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축복하는 야곱을 보며 바로는 질문합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8) 처음 보는 사람한데 갑자기 이게 웬 말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바로의 입장에서 나이 지긋하게 보이는 노인이 자신을 축복하고 있으니 충분히 할 만한 질문입니다. 좀 더 우리식으로 알맞게 표현하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의 질문에 대해서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9) 야곱, 그의 나이 130세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고, 그의 아버지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으니 조상의 나이와 비교하면 그에 미치지 못한 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조상들이 겪은 어려움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험악한 세월”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았지만 형을 피해서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외삼촌의 집에 살게 되었지만 그에게 속임을 당했고 갖은 고생을 다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고, 딸은 성폭행을 당했고 아들들은 무자비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두려움으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못할 때도 있었고,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 번 죽음의 위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야곱의 고백에 대해서 바로가 어떤 응답을 했는지 기록되진 않았습니다. 야곱과 바로의 만남은 이렇게 짧은 대화로 끝이 납니다. 이 짧은 만남에서 주목할 것은 야곱이 바로를 축복함으로 시작하고 또한 야곱이 바로를 축복함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문의 배경은 바로가 있는 곳에서 요셉이 있는 곳으로 바뀝니다. 둘째 단락에서는 요셉이 애굽을 통치하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이것은 야곱이 바로를 축복했는데, 마치 그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야곱의 축복이 요셉을 통해서 바로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단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13) 계속된 기근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근으로 온 땅에 먹을 것이 없고 사람이 버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백성들은 요셉을 찾아왔고 돈을 주고 곡식을 삽니다. 그러다 이제는 그 돈이 모두 떨어집니다. 먹을 것이 없어진 백성들은 요셉에게 와서 곡식을 구하지만 돈이 없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그들의 가축을 가져오면 곡식과 바꾸어 주겠다고 합니다. 돈이 없는 백성들이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가져옵니다. 가축을 곡식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 먹을 양식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18)
이 말씀에서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제 식물을 심을 수 있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먹을 것과 함께 구하는 것이 “종자”입니다(19). 곡식을 기를 수 있도록 씨앗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몸과 땅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땅을 팔고 바로의 종이 되기로 합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요셉은 씨앗을 주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추수했을 때 1/5은 바치고 나머지는 모두 가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풍년 때 비축해 두었던 곡식을 통해 애굽의 모든 돈과 가축과 땅을 모으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좀 심한 것 아닌가? 딱한 처지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백성들에게 저렇게까지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백성들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빼앗아가는 것 같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어려운 백성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형편을 이해함으로 나눔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요셉이 자기 가족들에게는 돈을 다시 돌려주면서까지 곡식을 나누어주었었는데 애굽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요셉이 했던 것처럼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의 것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빼앗는 것, 할 수 있는 일일까요? 고리대금업이나 다른 사람의 간절한 필요를 두고 이용하는 것, 괜찮을까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우리도 요셉처럼 해도 되는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오늘 본문의 기록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기록된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요셉처럼 하라고 기록된 걸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을,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요셉처럼 따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으니 우리도 열두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장면에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찜찜함은 이것입니다. 본문에서 요셉이 한 일들은 잘못된 것 아닌가요?
생각해보겠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있습니다. 총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총리는 바로의 왕위를 굳건하게 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요셉은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 일을 하는 것은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 “바로”입니다. 요셉이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거두어서 어떻게 합니까?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14)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20) 그리고 요셉이 말합니다.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23)
이 당시의 애굽을 우리가 이해하는 나라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애굽은 바로의, 바로에 의한, 바로를 위한 나라입니다. 요셉은 총리로서 바로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요셉이 한 일이 잘못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한일이 백성들에게는 부당한 일일까요? 만약 터무니없는 값으로 곡식을 판다면 잘못이겠지만, 적절한 가격으로 곡식을 파는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또한 가축의 경우, 사람들도 먹을 것이 없어서 힘겨운 상황인데 가축까지 돌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요셉에게 가축을 맡기는 것이 오히려 가축들을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원하면 기근이 끝나고 형편이 나아졌을 때 다시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로에게 속한 소작농이 되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닙니다. 그 대가로 지불하는 금액이 1/5이라는 것은 적절한 수준이며 백성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요약하듯이 백성들이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25) 그들이 요셉에게 우리를 살리셨음을 고백합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고백합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입니다. 그들의 이런 반응을 볼 때, 요셉이 한 일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극심한 기근에서 요셉이 보여준 지혜로운 통치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머리를 써서 다른 사람의 것을 차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으로 인해 애굽의 백성들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근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애굽의 백성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3절과 14절, 15절에 계속 언급되는 것이 “애굽 땅과 가나안 땅”입니다. 이 심각한 기근이 애굽 땅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곡식이 있는 애굽 땅에서도 이 난리인데, 가나안 땅은 어떻겠습니까? 그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야곱의 가족들이 계속 그 땅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으로 인해 그들은 기근으로부터 살리심을 받았고 단순히 생명이 보존되는 것, 이상으로 번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셉의 지혜로운 통치에 대한 결론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27)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하셨던 말씀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28)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며, 그의 자손들을 인도하셔서 지금 요셉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센 땅에서 충만하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둘째 장면이 끝이 나고 다음 셋째 장면은 야곱이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가나안과 애굽의 온 땅에 임했던 기근은 모두 끝이 났고, 시간은 흘러서 야곱이 애굽에 내려온 지 어느덧 17년이 지났습니다. 야곱은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요셉을 불러 말합니다. ‘요셉아!’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요셉의 지혜로운 통치는 야곱의 가족들에게 안전과 번성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백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하고, 바로를 크게 부요하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애굽 사람들이 요셉을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으로, 구원자로 부른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전에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셨음을 고백했었습니다(45:7)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시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들을 택하시고,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 당시에는 왜?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분명한 뜻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을 통해 그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애굽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었고, 야곱의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근 자체를 그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굳이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간단하게 처리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사람들과 함께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맡겨주시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 은혜는 기근과 같은 우리 인생, 메마른 땅과 같은 우리의 삶을 촉촉하게 적시는 단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속한 곳에서, 내가 자리한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뜻을 이루는 일에 내 마음을 쓰고, 내 힘을 쓰고, 내 물질을 쓰고, 내 지혜를 사용하고, 나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풍성함과 그분의 충만함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빚으셨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제 삶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