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매주 교회에서 사랑을 이루라: 3.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

본문: 골로새서 3장 12-17절

설교자: 조정의

매주 교회에서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두 가지 목적을 다뤘다. ①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한다. ②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택하셨다(12절).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받은 사랑의 힘으로 할 수 있게 하셨다. 거룩과 사랑은 별개가 아니다. 매주 교회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성과나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을 이룬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사랑, 평강, 감사(12-15절). 이것은 먼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풍성한 사랑이며, 우리를 통해 맺기 원하시는 거룩한 열매이다. 주님은 또한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사랑을 닮은 모습으로 서로를 섬기는 데 필요한 완벽한 본이 되어 주셨다.

우리의 부르심을 분명히 알았고(섬김의 목적, 거룩한 사랑을 이루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부르심에 합당한 것인지 배웠다(긍휼~감사). 그러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섬김을 하는 데 필요한 동력을 어떻게 얻을까? 교회에서 매주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주시는 동기와 힘을 얻을 수 있을까?(빌 2:13).

1. 말씀으로 충만: 가르침(16절)

16-17절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일들의 요약이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교회가 시작됐을 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말씀 충만)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지혜로 가르치고 권면),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고(시, 찬미, 신령한 노래 감사하며 예배),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사랑의 섬김). 교회가 하는 이 일은 12-15절까지 설명한 거룩한 사랑의 성품/덕목을 옷 입고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거꾸로, 이 일을 통하여 우리는 거룩한 옷을 입고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도록 이끄는 소원과 능력을 얻는다(다이나믹: 서로 관계되는 세력, 영향력 사이의 역학).

먼저 가장 중요한 말씀으로 풍성히 채워지는 것에 관하여 살펴 보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16절에 따라오는 모든 것(교제, 예배)에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역학). 말씀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거나 감히 부정하는 성도는 없다. 하지만 ‘말씀이 풍성히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풍성히’라는 말에는 양과 질의 개념이 모두 들어간다. 우리는 솔직히 너무 적은 말씀으로 우리를 채우려 한다. 매일 당신의 영혼은 얼마나 충분한 말씀으로 배부른가? 만일 그만큼 식사한다면 당신의 몸에 충분한 영양소와 에너지가 공급될 것 같은가? 소식은 장수의 비결이지만, 말씀은 소식이 아니라 충분한 공급이 필요하다.

이제 질적인 면에서 ‘풍성하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어떤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풍성히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너희 속에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풍성히 우리 속에 담아야 하는 말씀은 원산지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 우리가 동의하는 말씀의 내용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어야 한다.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모든 말씀(성경)이다. 그것을 우리 속에 곧 우리의 지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정서와 의지에까지, 한 마디로 속사람 전부에 풍성히 채우면 역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이 가능해진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16절).

말씀이 풍성해지면 우리는 그 말씀을 지혜롭게 삶에 적용할 수 있다. 머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데 말씀을 활용하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그 지혜를 자기 삶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피차)에게 가르치고 권면(상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말로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그 말씀을 성도의 삶에 적용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춘다(고후 4:6). 그 영광을 보고 알게 된 자는 자연스럽게 그 영광의 주를 예배한다. 이것이 말씀이 질적으로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소용이 없다는 사람은 열이면 열 양질의 말씀을 풍성히 자기 영혼에 채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지혜로 충만: 교제(16절)

다음은 교제다. 그리스도인의 교제 역시 양질의 공급이 필요하다. 교제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 성도는 힘을 잃고 외로움을 느낀다. 초대 교회 성도가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모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교제 공급양이 압도적으로 우리가 나누는 교제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의 문제로 그렇게까지 하지 못할지라도 성도가 거룩한 사랑을 이루는 일에 충분한 교제가 요구된다는 점을 기억하라. 교제의 질은 어떠한가. 근황(삶)을 나누는 것엔 문제가 없지만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말씀으로 풍성히 채워져 그 말씀을 성도에게 가르침으로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잘못된 삶을 교정하며, 올바른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을 지향해야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역학 관계를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은 말씀을 기가 막히게 잘 전달한다. 성도가 겪는 상황에서 정답을 탁탁 내놓는다. 그런데 정작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이 하신 일에 감사하며 예배하는 삶은 살지 못한다.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는 적용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예배는 그것을 위해 창조되고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자연스럽고 마땅한 반응이다. 하나님을 예배(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말씀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일에 매진한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마음은 멀다고 책망하셨다(마 15:8). 우리가 매주 교회에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교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예배자들 사이에서 나누는 교제다. 우리가 서로에게 전달하고 권면하는 말씀은 결국 서로를 더욱 하나님과 성도 사랑하는 삶으로 이끈다.

3. 감사로 충만: 예배(16절)

다음은 예배다. 사도행전에서는 떡을 떼는 것과 기도가 예배의 행위로 언급되었고, 골로새서에서는 찬양(시, 찬미, 신령한 노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다뤄진다. 여기 나온 노래의 종류를 추측할 수는 있지만(시=시편),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과 행하신 일을 높여 찬양하는 노래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시편). 특별히 신약시대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타내신 영광과 행하신 구원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찬양이 주로 불렸을 것이다(서신서). 예배엔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는 경외심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움 앞에 드리는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매주 교회에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우리의 힘은 주를 기뻐하는 것이다. 떡과 잔을 나누면서, 찬양을 부르면서 우리가 함께 진정으로 주를 경외하고 기뻐한다면, 그 힘이 우리를 기쁨으로 섬기도록 이끌 것이다(17절).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역학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섬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이 너무 영화로우시고 그분이 행하신 일에 너무 감사가 되어서 그분을 닮은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일이 기쁘고 즐거운가?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눈물을 흘리고 찬양을 부르며 감격에 겨워한다. 그런데 섬길 기회가 생길 때 피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버거워하거나 꺼린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한 것이 아니다. 자기 정서적 필요를 예배 행위를 통하여 채운 것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마땅히 그분의 자녀를 사랑하기 마련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4:20).

4. 사랑으로 충만: 섬김(17절)

마지막으로 섬김이다. 무엇으로 섬기는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하든지. 로 하는 일이나 로 하는 일이나 모두 해당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섬김이 1)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2) 그를 힘입어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3)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은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에 예수님의 브랜드가 붙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 받기 위해서 또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일이 되어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의 특성을 닮은 모습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를 섬겨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완벽한 본을 보여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 완벽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바울처럼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섬김을 행할 수 있다(빌 4:13). 그리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아버지를 경배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역학 관계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섬김과 예배를 분리할 때가 많다. 주방이나 마당에서 땀 흘리며 힘껏 섬기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기뻐하는 마음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로는 주를 위한 일이라고 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분께 힘을 조금도 받지 못할 때가 있다(말라기때 이스라엘 백성들). 그렇게 하는 섬김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주님은 행함뿐만 아니라 진실함을 원하신다(요일 3:18). 그리고 진실한 행함으로서의 섬김은 그 자체로 우리가 더욱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다.

가르침, 교제, 예배(찬양), 섬김. 우리는 이것을 넓게 은혜의 방편이라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고,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데(빌 2:13), 이러한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신다. 우리에겐 다른 방편이 없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이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지혜와 능력을 얻어라. 공예배나 연령별 예배, 구역집회와 형제, 자매 모임에 참석하여 유익을 누려라. 은혜의 방편을 얼마나 사용하는지(양), 어떻게 풍성하게 사용하는지(질)도 매우 중요하다. 주가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그 힘으로 매주 교회에서 사랑을 이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