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돌아가지 않으리
본문: 갈라디아서 4장 8~20절
설교자: 이병권
사람들은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며 살아갑니다.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내가 속한 환경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노력들이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다이어트일 것입니다.
다이어트를 해보셨습니까? 혹시 난 해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주변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을 본적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다이어트를 할 거라고, 해야 된다고 하는 사람을 봤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다이어트와 관련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했던 사람이 있고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이어트를 했다가 다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요요현상’이라고 합니다. 다시 돌아가니까 또 다이어트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변화를 이룬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가면 그 좋은 변화는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좋은 변화를 이루는 것은 수고스럽고 어렵고 긴 시간이 걸리지만 돌아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고 간단하고 금방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그들은 어떤 변화를 경험했습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엄청난 변화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아들이 되었습니다.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죄의 종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변화를 얻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그들의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8-9)
여기 말씀에서 두 시기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8절은 과거를 말하고 9절은 현재를 말합니다. 먼저 그들의 과거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했습니다. 거짓 신들을 따르며 우상에게 매여서 그들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자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제는”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 안다는 말은 하나님을 단순히 지식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 하나님을 몰랐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자가 이제는 특별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하나님이 그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 한 명 한 명을 다 알고 계십니다. 사실, 순서로 따지면 하나님이 아신 바 된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도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전에 우리도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좇아 살았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 거짓 신들과 우상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이 달아난다 했고 저렇게 하면 복이 따른다 했습니다.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따져야 했고 우상에게 절하며 헛된 것에 기도하며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잘 지내야 나와 자녀들이 잘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나를 아시고 나를 찾아오셔서 나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거짓 우상들의 종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이고 특권입니까?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상황에서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하신 일과 지금 그들이 어떤 자가 되었는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분명한데, 그들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종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우상에게로 가서 그들의 노예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하려는 일이 돌아가는 일입니다.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돌아가서 종이 되려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옛날처럼 우상에게로 돌아갔습니까? 그들은 이방인이기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는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복음에 빠져서 몇몇 율법을 지킴으로 유대인이 되려고 하는 일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을 버리고 다시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렇게 강하게 말하고 있는 걸까요? 바울이 1장에서 말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유일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을 따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으로 만들고 우상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외에 다른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의 기준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형태가 어떻게 되었든지 결국 똑같은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깎아 만든 우상에게 절을 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과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오히려 더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정작 자신의 모습을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합니다. 그들은 다른 복음을 따름으로 영적으로 요요현상에 빠졌습니다. 단지 그 대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우상에서 절하지는 않지만 우상에게 그들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던 것처럼 지금은 율법을 통해, 율법의 행위를 통해 그런 노력과 수고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에 속아서 나의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10) 그들이 율법이 명하고 있는 날들을 지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이것을 문제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이런 날을 지킴으로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절기를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때로 특별한 주일을 보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도 합니다. 날을 지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날에 대해서 말한 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두려워합니다. 왜 일까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11)
갈라디아 교회가 이전으로 돌아갔을 때 그 결과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해 한 일은 모두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헛된 일이 됩니다. 복음이 그들 가운데 이룬 일과 하나님이 하신 일이 헛되게 됩니다.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핵심은 우리를 속박하는 신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 하나님을 아는 데서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바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버리고 다시 종이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다른 것을 신으로 만드는 일, 그리고 그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것은 다시 종이 되는 일입니다. 다시 우리를 속박하는 죄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죄성이 남아있습니다. 불쑥불쑥 나오는 옛 습관과 옛날의 모습이 나를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것들을 우상으로 섬기려는 마음과 나의 욕심을 따르려는 습관이 남아서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보십시오. 바울은 이들을 돌이키려고 강하게 책망을 했고 자신의 간증과 구약의 예를 들어 이야기하기도 했고 논리적으로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돌이키려고 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지금까지와 다른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달라진 목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바울이 교사의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지금부터의 바울은 목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2-15)
바울은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갈라디아 교회 개척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의 처음 만남이 어떠했습니까? 바울 입장에서는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만난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바울의 모습은 형편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들 앞에 섰을 때 그에게는 육체의 약함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약함이 어떤 문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 견해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이렇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렸다거나 핍박으로 인한 심한 부상 중에 있었다거나 아니면 간질이나 혹은 심각한 눈병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약함이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육체의 가시”와 같은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약함으로 “말미암아”(13) 바울이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함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이러한 육체의 약함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편견 없이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울이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심지어 바울이 예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바울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 바울이 어떻게 말합니까?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서 주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근거로 해서 바울의 약함을 눈에 대한 문제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추측도 가능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헌신을 말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표현입니다. ‘간이라도 다 빼줄 수 있다’ 이 말은 간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만 쓰는 표현은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바울을 향한 갈라디아 교회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했던 갈라디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 복음을 전한 자와 복음을 받은 자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바울과 바울이 전한 복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는 변했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도 벌어졌습니다.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벗어났기에 바울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시험이 될 만한 육체의 약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버림받을 만한 바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따뜻하고 너그럽게 바울을 영접했는데 지금은 원수로 여깁니다. 다른 복음이 들어와서 좋았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진리를 전하는 바울은 이제 율법을 의지하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원수가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7-18)
지금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에 대한 바울의 설명입니다. 거짓 형제들은 잘못된 열심으로 바울과 교회 사이를 멀어지게 했습니다. 열심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질투의 감정을 묘사합니다. 거짓 형제들은 자신을 위한 잘못된 목적으로 교회가 열심을 내게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열심을 내어 복음이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좋은 것입니다. 그 열심은 올바른 방향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낸다면 어떤 모양이든지 좋습니다. 그런데 열심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열심은 결국 자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열심은 반드시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짓 형제들과는 달리 자신을 위해 갈라디아 교회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건강과 올바른 믿음과 진리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지금 어떤 심정으로 말하고 있는지 한 번 들어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이렇게 부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목자인 바울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바울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단순한 목표를 위해 수고합니다. 예수를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거짓 형제들에게 가지 말고 다른 복음을 따라가지 말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고 예수를 닮아가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지 말고 닮아가라”
이것은 지금 우리의 목표이도 합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돌아가지 말고 닮아가라”바울은 이 목표를 위해서 다시 수고하겠다고 합니다. 이 수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해산하는 수고로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각 성도들이 작은 예수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려고 바울은 마치 엄마가 된 것처럼 그들을 위해 수고하겠다고 합니다. 해산하는 수고, 생명을 낳는 수고와 아픔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괜히 그들을 향해 “나의 자녀들아”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녀를 위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수고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이 편지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어떤 심정으로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을 들었을까요? 지난 과거를 떠올리며 바울의 모습을 생각하며 복음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던 그 때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지금 상황을 생각하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며 바울의 경고와 사랑이 담긴 권면을 마음에 새기지 않을까요?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할 때 자녀의 잘못에 대해서 엄하고 강한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잘못에 대해서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도 필요합니다. 바울은 좋은 목자로서 그들의 영적인 부모로서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돌아가지 말고 닮아가라”
여러분은 돌고래를 실제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돌고래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동물입니다. 재빠르게 움직이며 물 위를 뛰어 오르는 장면을 보면 감탄하게 됩니다. 그렇게 돌고래는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누비며 삽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수족관에 갇혀 사는 돌고래도 상당히 많습니다. 수족관에서 사육사의 보살핌을 받고 먹이를 받아먹으며 재주를 부리기 위해 훈련을 받습니다. 돌고래는 영리해서 사람에게 쉽게 적응하고 수족관을 익숙해합니다. 그런 돌고래를 불쌍하게 생각한 동물보호운동가들이 수족관에 있는 돌고래를 풀어주려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돌고래 한 마리를 수족관에서 바다로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돌고래는 조금 먼 바다에서 헤엄치며 짧은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수족관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바깥에서 위험하게 사는 것보다 힘들게 먹이를 찾는 것보다 좁은 수족관에 갇혀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에서 벗어나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금방 싫증을 느꼈습니다. 길이 불편했고 가나안에 사는 주민들이 두려웠습니다. 울부짖음과 불평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가 애굽을 떠났던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차라리 종으로 있을 때가 좋았다.‘ 백성들은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수족관으로 돌아간 돌고래처럼 말입니다.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더 쉬워 보입니다. 더 좋게 느껴집니다. 더 익숙하고 더 안전하고 또 다른 수고가 필요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내가 잘 하면 되고 내 뜻대로 내 능력에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옛 습관을 따라 살며 더 나은 변화를 위한 수고를 미루어둡니다. 우리의 목표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을 포기합니다.
여러분, 과거에 우리가 어떤 자였는지 제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종이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종이었던 삶을 그리워하지 마십시오. 과거를 제대로 보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과거를 잊은 사람은 현재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은 미래를 바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잊어서도 안 되지만 과거에 매여 있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를 떨쳐버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을 바르게 살 수 있고 미래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뒤를 돌아보지 마시고 앞을 바라보십시오. 돌아가지 말고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삶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좇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했던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요요현상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종의 신분이었던 과거의 습관들과 헛된 것들을 내어버리시고 아들의 신분에 맞게 아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