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돈, 하나님, 영원
본문: 시편 49편
설교자: 최종혁
모두 지혜를 들으라(1-4절)
1-4절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매우 분명하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를 정말 잘 들으라는 것이다. 이 시편은 지혜와 명철을 말할 것이고 그것은 비유(혹은 잠언)과 오묘한 말(수수께끼)와 같은 형식일 것이다. 사실 많은 지혜의 말, 격언들, 잠언은 실제로 ‘새로운’ 지식은 아니다. 모두가 동의하고 그렇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는 진리들을 생생한 비교, 역설적 대조, 공감되는 비유 등을 통해 새롭게 들려지게 하는 것이다. 이 시편은 인생에 대해 참으로 당연한 지혜를 우리에게 들려줄 것이다.
특히 이 지혜를 들어야할 사람들이 있다. 뭇 백성,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1절). 신분적으로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이 대상이다(2절). 이런 표현은 신분적으로 중간에 있거나 돈이 적당히 있는 사람을 제외하지 않는다. 양 끝을 언급하여 전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시편이 다루는 주제는 어떤 사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럼 모두가 들어야 하고 알아야하는 지혜가 무엇인지보자. 5절부터 20절까지 시편을 읽어보면 비슷한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5절), “두려워하지 말지어다”(16절)
- “사람은 …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2, 20절)
이 표현들을 중심으로 시편을 살펴보자.
- 지혜의 실천(5-6절)
- 지혜의 풀이(7-15절)
- 지혜의 명령(16-20절)
I. 지혜의 실천(5-6절)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5절)
두려워한다는 말은 공포를 느낀다기 보다는 염려하고 걱정하며 불안해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반대말은 평온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 평온하고 안정감을 느낄까? 안정적인 직장, 화목한 가정, 문제 없는 건강 등 우리 삶에 특별한 문젯거리가 없을 때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그런 날이 있을까? 정말 내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날이 있을까? 잠시 그런 날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지속되리라고 내가 확신할 수는 없고 대부분 행복은 잠시의 행복으로 끝난다. “이것만 해결되면… 이 일만 끝나면 … 괜찮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우리는 입에 달고 산다. 언제나 새로운 걱정거리가 우리를 찾아오고 또 우리는 그런 걱정거리들을 잘도 찾아낸다. 특별히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영역에 문제가 생기면 그 불안과 염려는 더욱 커진다. 그 불안과 염려가 극에 달할 때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우린 사실 이 시편 기자와는 정반대로 말하며 산다. “내가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랴?”
왜 그럴까? 왜 문제 없는 날이 없을까?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죄와 죄인들이다. 이것은 우리 안과 밖에 다 있다. 내가 죄인으로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그러니 두려워할만한 일이 가득하다. 죄로 인한 직접적인 그리고 간접적인 환난의 날이 바로 우리의 날들인 것이다. 있는 자든 없는 자든 더 가지려고 애쓴다. 그러니 싸울 수 밖에 없다. 서로가 믿지 못하고 이용하려고 한다. 속이고 속는다. 정직은 최고의 덕이 아니라 최악의 어리석음이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야 한다.
사실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럴 때 사람들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리고 역사 상 가장 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되어 온 것이 ‘재물’, 바로 돈이다. 사람들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돈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나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세상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돈은 단순히 재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돈은 권세이기도 하고 지위이기도 하다. 영향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돈을 의지하고 부유함은 자랑거리가 된다(6절). 의지할 돈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할 일도 줄어든다.
이 표현을 주목해 보라. 돈을 의지하고, 돈을 자랑하고, 돈이 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절).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시 44:5).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 44:8).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야할 표현들이 돈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쉽게 말해 세상은 돈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의지하고 자랑하고 그로 인해 어떤 불확실함, 환난의 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시편의 저자는 그런 이유로 두려워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유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넘쳐난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하고 자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우리가 바로 알아야할 지혜는 이것이다.
II. 지혜의 풀이(7-15절)
7-15절까지의 말씀의 핵심은 12절에 있다. 사람은 존귀할 수 있으나 결국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이 지혜는 두 개의 중요한 사실로서 풀이된다. 첫번째는 이 땅의 것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고(7-12절) 두번째는 죽음 이후의 삶은 이 땅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13-15절).
A. 이 땅의 것은 죽음으로 끝난다(7-12절).
먼저 시인은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며 풀이를 시작한다. 7절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율법을 어겼을 때 어떤 경우는 생명을 대신하지 않고 배상금을 낼 수 있었다. 이런 경우는 돈으로 생명을 구한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출애굽 때 장자를 양으로 대속하여 그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계속해서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은 아니다(9절). 계속해서 양을 드리고 돈을 낸다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 값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8절). 생명의 값은 무한대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모두 죽는다.
사실 돈이 많으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문제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물질적인 것으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인데 그 중 몇 개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돈으로 집을 살 수는 있지만 가정을 살 수는 없다. 침대를 살 수는 있지만 잠을 살 수는 없다. 책을 살 수 있지만 지혜를 살 수는 없고, 약을 살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수 없다. 음식을 살 수 있지만 식욕을 살 수는 없고, 옷을 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지위를 얻을 수 있지만 존경을 얻을 수 없고, 쾌락을 얻을 수 있지만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 말에 반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돈의 영향력은 이 땅, 그리고 물질적인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을 돈으로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산다. 왜냐하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차치해도 돈으로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은 생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속량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값을 매길 수조차 없으니 당연히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 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 포함된다는 것은 13절 이후에 다뤄진다.
10절은 이 말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임을 말한다. 우리 모두가 증인이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재물은 그대로 남겨진다(10절). 그들의 돈이 죽음을 막지 못하고 당연히 그 돈을 죽으면서 가져가지도 못한다. 돈은 이 땅에 속한 것이기에 이 땅에 남겨질 뿐이다. 모두가 부인하고 싶어 하지만 모두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은 죽음을 알면서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절대 이 땅을 떠나지 않을 것처럼, 나는 다른 사람의 장례식에만 참석하고 나의 장례식은 없을 것처럼 산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속생각은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못할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 가문에, 땅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한다(11절). 그것이 남아있으면 마치 자신도 남아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누구 누구 기념관이라는 곳도 많고 누구 이름을 딴 도로명, 지명, 건물명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 의미가 있을까? 살아있는 자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정작 그 이름을 남기고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첫번째 결론은 이것이다. 이 땅에서 사람은 존귀할 수 있다. 화려하게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면서 살 수 있다.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살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을 이곳저곳에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12절).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게 뭐 어떻냐고. 어차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인데, 이 땅에 있을 때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게 뭐가 문제냐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인간의 죽음이 인간의 끝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 존재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을 의미하고 새로운 영원에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원에서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죽음 이후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이 결정한다.
B. 죽음 이후의 삶은 이 땅에서 결정된다(13-15절).
13절에서 시인은 어리석은 자가 죽음 이후에 어떤 삶을 살게 되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따른 자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말하겠다고 한다. 이들은 단지 부한 자들이 아니다. 6절에서 말한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돈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돈을 하나님으로 삼는 것의 문제다. 그렇게 한 자들의 종말은 이러하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14절)
돈을 하나님으로 섬긴 자들은 결국 영원한 죽음이 그들의 목자 노릇을 할 것이다. 여기 양과 목자라는 표현은 매우 신선하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목자와 양으로 자주 비유한다. 시편 23편은 양의 입장에서 목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참 아름답게 그려낸 시다.
그런데 여기서는 돈을 하나님으로 삼은 어리석은 자와 사망을 목자와 양으로 말한다. 그들은 이 땅에서 돈을 목자로 삼았다. 돈이 나의 목자이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며 살았다. 돈이 나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하지만 그 결과 사망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영원을 살게 되었다. 그들이 누렸던 존귀, 아름다움은 모두 이 땅에 남아있을 것이고 시간에 따라 사라질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둔 토지는 땅에 남아 있을지 모르고 그들의 가문은 그들의 바람대로 대대에 이를지 모르지만, 실제 그들의 영원한 거처는 참된 삶이 있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이 아니라 그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그곳에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말 큰 문제다. 이 땅에서 만나는 환난은 재물을 의지하여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진 자가 되면 환난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에게 환난을 줄 수 있는 힘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다. 그 시절은 곧 지나가고 그가 의지했던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영원의 때가 찾아온다. 그리고 일단 영원의 목자가 정해지고 영원한 거처가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다. 죽음이 그들의 영원한 목자가 되고 스올이 그들의 영원한 거처가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따른 정직한 자들은 이 땅의 어두움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승리할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들을 영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15절)
이것이 현재의 죄로 인한 환난의 때를 걱정과 두려움 가운데 살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아무도 자기 형제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께 속전을 바칠 수 없다.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 값을 마련할 수 없다. 사람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무한대의 비용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불되었다. 그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영접하시고 죽음의 권세에서 건져내신다.
이것은 단지 죽고 나서의 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는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면 정말 죽고 나면 좋은 일이 있을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우리의 지금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든다. 잠시 여행간 곳에서 평생을 살것처럼 직장을 구하고 집을 구하고 저축을 시작한다면 어떨까? 제대로 사는게 아니다. 여행간 곳에서는 여행에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된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영원의 일부를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영원의 삶이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의지하며 섬기고 사랑하며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겠는가?
III. 지혜의 명령(16-20절)
이 시의 저자는 좋은 교사다. 적절한 비유, 간결하지만 강력한 표현으로 교훈을 잘 전달할 뿐 아니라 반복하며 강조하기도 한다. 이제 이 시는 필요한 이야기를 다 했다. 하지만 마지막 반복과 강조를 통한 도전을 놓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말한 영원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라면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16절).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삶으로 나를 영접하실 것이고 지금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염려하며 걱정하여서 이 땅에 무언가를 쌓으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돈을 많이 모을지도 모른다. 많은 영광을 누릴지도 모른다. 믿는 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한편 불안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그 어떤 것도 그가 가져갈 수 없고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17절). 살아서 아무리 자타가 칭찬하는 사람이라도 다르지 않다(18절). 결국은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죽었던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19절). 영원히 그 어둠 속에 거하게 될 것이다.
처음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말하며 들으라고 소리쳤던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절)
12절의 말씀과 유사하지만 같지 않다. “장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깨닫지 못한다”로 바뀌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고 영원의 삶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이 중요한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이 땅에서 죽는다는 면에서는 모든 사람이 멸망하는 짐승 같지만, 사람은 참된 지혜를 가질 수 있다는 면에서 짐승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참된 지혜를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 지혜를 거부한다면 결국은 멸망하는 짐승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영광을 누리고 칭찬을 받아도 마찬가지다. 그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관에 뉘여질 뿐이다. 멸망하는 짐승으로 그것으로 삶이 끝나니 차라리 다행이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영원을 산다. 그 영원한 거처가 어떠하기를 바라는가?
조의를 표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아무 걱정과 염려가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한다. 정말 그런 곳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영혼의 목자로 영접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으로 자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없이 존귀한 자로서 이 땅에서 주어진 우리의 삶을 마무리하고 영원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
도전
돈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런 것처럼 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자들도 동일한 아이러니를 보인다. 꼭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혹은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을 두려워하고 염려한다. 삶의 고난과 어려움에 마음의 평안함을 빼앗긴다. 걱정하고 많이 가진 자들을 부러워한다. 비슷하게 더 가지려고 하고 더 가지면 더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좀 더 영적인 사람들은 그러면 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편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시편은 돈을 의지하는 자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대조한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돈과 하나님을 대조한다. 왜냐면 그 둘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를 가지려먼 다른 하나는 놓아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둘 다를 원하는가? 그럴 수 없다. 둘 다를 원한다면 둘 다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둘 다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이것이 어쩌면 이 시편이 말하려는 오묘한 말, 수수께끼일 것이다. 둘 다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둘 다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약속하셨다.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에서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어떻게 이런 수수께끼같은 일이 가능할까? 하나님이 전부이시기 때문이다. 전부를 부분으로 나누려고 하면 전부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부라고 믿는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다른 것을 함께 얻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얻으려고 살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돈은 절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신다. 이 지혜를 마음에 새기라.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라.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한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