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당신은 어떤 그릇입니까?
본문: 디모데후서 2장 20~26절
설교자: 이병권
사람은 누구나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어릴 때에는 장래희망이나 꿈, 막연한 기대를 가지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과 명예와 권세가 있으면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외모가 뛰어나면 얼굴이 잘생기고 예쁘면 가치 있는 사람이 될까요? 학생의 경우 공부를 잘하면 가치 있는 학생이 되는 걸까요? 이런 것들이 세상에서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바라보는 기준이며 상대적인 것입니다.
사실, 사람의 가치를 정하는 기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관점은 왜곡되어 있고 올바르지 못합니다. 오직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사람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사람의 가치를 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본문의 비유로 생각하면 사람을 그릇에 빗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큰 집에는 여러 그릇들이 있습니다. 금으로 만든 그릇, 은으로 만든 그릇, 뿐만이 아니라 나무나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 상황으로 말하면, 사기그릇도 있고 유리그릇도 있고 스텐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그릇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그릇이 가치 있는 그릇일까요? 가치 있는 그릇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그 쓰임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있는가 하면 천하게 쓰이는 그릇이 있습니다. 주인이 귀하게 쓰느냐 아니면 주인이 천하게 쓰느냐, 종류가 아니라 주인의 쓰임에 따라 그릇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릇의 가치는 주인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주인이 귀하게 쓰는 그릇은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주인이 천하게 쓰는 그릇은 그럴 수 없습니다.
여기 말씀에서 “귀하게”와 “천하게”를 우리가 조금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귀하게 쓰는 그릇은 손님이 올 때나 특별하게 쓰는 그릇이고 천하게 쓰는 그릇은 평소에 편하게 쓰는 그릇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하게”라는 단어는 불명예, 수치가 되는 부끄러운 것을 말합니다. 천하게 쓴다는 것은 훨씬 더 안 좋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생각해보면 당신은 어떤 그릇입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이 질문은 당신은 가치 있는 그릇입니까? 라는 질문이고 그랬을 때 사람들이 먼저 생각하는 것은 그릇의 원료일 것입니다. 무엇으로 만든 그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인지, 아니면 나무나 진흙인지를 두고 가치를 따집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를 말하는 것처럼 부모를 두고 사람의 타고난 배경이나 부를 가지고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배경은 그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만든 그릇인지, 그릇의 원료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두고 가치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을 다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누군가는 금으로 누군가는 은으로 누군가는 나무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알맞게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쓰임이 다르기에 특징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무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만족함이 없고 더 좋은 배경의 사람을 나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금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소유된 그릇들이 주제넘게 서로를 판단하며 싸우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가 추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순응하고 순종하며 그 뜻에 따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그릇입니까? 라고 했을 때 그 가치를 묻는 질문은 어떤 종류의 그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어떻게 쓰임 받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주인이 귀하게 쓰는 그릇입니까? 아니면 천하게 쓰는 그릇입니까?
금 그릇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천하게 사용될 수 있고 질그릇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귀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릇의 가치는 금이냐 은이냐 그 원료에 있지 않고 주인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바울이 이 비유에서 말씀하는 핵심은 주인이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되려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그릇, 주인이 귀하게 쓰는 그릇은 어떤 그릇입니까? 금도 아니요, 은도 아니요, 정답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깨끗함은 주님께 쓰임 받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거짓으로부터 깨끗해야 하며 불의로부터 깨끗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깨끗한 그릇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첫째는 거룩합니다. 깨끗한 그릇은 거룩합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종류의 여러 그릇들과 다릅니다. 따로 구분해둡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뜻에 따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둘째는 주인의 쓰심에 합당합니다. 쓰심에 합당하는 말은 쓸모 있다는 뜻입니다. 깨끗한 그릇은 주인에게 꼭 필요한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한 그릇은 주인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됩니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이미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깨끗함이 모든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이 준비를 갖추면 기꺼이 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은 음식을 담으려고 그릇을 집어 들었는데 그릇에 음식찌꺼기가 덕지덕지 붙어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릇을 그냥 사용하시겠습니까? 그 그릇은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라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릇이 깨끗하지 않으면 천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는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 그릇을 깨끗하게 씻는 설거지 방법이 무엇입니까?
딤후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2절에 두 가지 명령이 나옵니다. 피하라는 명령과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차례로 살펴보면, 먼저 피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청년의 정욕이라고 하면 쉽게 성적인 유혹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런 유혹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디모데에게 있는 젊은이의 기질이나 완고한 열정, 논쟁하려는 욕구, 그런 욕심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청년의 정욕이라고 말씀하지만 어디 청년 시절뿐이겠습니까! 중년의 정욕, 노년의 정욕, 소년의 정욕, 인간의 정욕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피하는 것입니다.
여기 피하다는 단어는 ‘도피하다’는 뜻입니다. 안전을 위해 위험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소돔에서 롯이 그랬던 것처럼 위험을 두고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즉시 도망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따라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따르다는 단어는 전쟁이나 사냥에서 목표를 추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 분명하고 따라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영적 위험을 피하고 영적 유익을 따라야 합니다. 더러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죄의 유혹으로부터 도망쳐야 하고 깨끗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에게 말씀하는 두 가지 명령, 피하고 따르라는 명령은 이미 디모데전서에서 했었던 명령입니다. 그래서 전서의 말씀을 참고해서 오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이 말씀의 단락에서 강조되는 말씀이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딤전6:6)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의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 우리가 피해야 하는 것은 자족하는 마음을 빼앗아가는 욕심들이고 우리가 따라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선한 것들 경건에 이르게 하는 유익한 덕목들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거듭 강조하는 피하라는 명령과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주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는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명령에 순종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혼자서 하기 어렵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혼자 하면 어렵습니다. 혼자 있으면 유혹이 큽니다. 혼자일 때 마귀의 공격은 더 집요합니다. 혼자일 때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면 함께해야 합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이기를 힘써야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함께 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일에 소홀해지기 쉽고 또 모이기 쉽지 않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이 허락하셔서 기회가 될 때마다 더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하기 위해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함께 하지 않고 떨어져 있으면 그만큼 더 영적으로 위험해질 것이고 유혹에 더 많이 노출될 것입니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있으면 사냥감이 되기가 더 쉬운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성도와 함께 교회와 함께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그럴 때 위험으로부터 피하고 깨끗함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짝을 이루는 두 명령, 피하라는 명령과 따르라는 명령을 한 후에 한 가지 명령을 추가하는데 “버리라”는 명령입니다.
딤후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생각해보면 변론을 버리라는 이 명령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는 명령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특별히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디모데에게 이것이 더 어려움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서 이것을 조심하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말다툼을 하지 말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라는 것은 성경의 진리에서 떠난 거짓에 근거한 내용으로 사람의 생각대로 무의미한 논증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다툼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다툼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이러한 변론은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거짓에 속한 사람들, 거짓 교사들과 거짓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을 경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이런 말씀을 들으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거짓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진리를 전하면 안 되는 걸까요?
딤후 2: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딤후 2: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특별히 “주의 종”이라고 언급되는 자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라고 말씀하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 것을 명합니다. 가르치기를 잘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의 대상이 모든 성도에 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주의 종”이라는 대상은 디모데를 포함해서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가진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들이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사람은 결과를 알 수 없고 사람은 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하도록 역사하시고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돌이키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뜻대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의 말씀에서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생각하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딛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성도에게는 멀리하라는 말씀에 더 무게를 둘 수 있고 일꾼에게는 한두 번 훈계하라는 말씀에 무게를 둘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릇의 비유를 통해 어떤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가치 있는 사람은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쓰임 받는 비결은 깨끗함입니다. 주님은 깨끗한 그릇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덕목을 따라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계속해서 깨끗함으로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계속해서 내 삶을 가치 있는 삶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솔직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울까요? 주님께 쓰임 받는 삶,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쉬울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쉽게 생각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을 가볍게 여기고 간단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금방 무너지고 실망하고 무기력해지고 쉽게 지치고 도중에 그만 둡니다. 적당히 안주하며 사는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삶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되는 일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정말 가치 있는 것으로 채워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도 참고 인내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지고 갚아줄 수 있지만 다툴 수 있지만 그러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일입니다. 억울할 수 있습니다.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오하지 않으면, 쉽게만 생각하면 금방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죄의 유혹과 육신의 생각과 욕심으로부터 도망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의를 좇아야하고 계속해서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자족하는 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허락하실 지라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쉽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면 진지하게 자신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적당히 내 욕심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 좁은 길을 가셨고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가장 가치 있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삽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떤 그릇입니까?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사용할 수 없는 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그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