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당신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뻐하십니까?
본문 : 골로새서 1장 24-29절
설교자 : 조정의
골로새서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골로새 교회 소식을 그 교회를 세우고 돌보고 있던 일꾼, 에바브라에게 듣고, 골로새 교회를 격려하고 그들이 처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이 편지를 로마 감옥에서 썼습니다.
1장 내용은 인사말로 시작합니다(1-2). 그리고 골로새 교회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3-8), 그리고 간구(9-14)로 이어집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초점을 맞췄던 바울은 뒤이어 아들 예수님께 초첨을 맞추어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며, 만물과 교회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분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15-20).
예수님을 찬양한 바울은 이제 골로새 성도들에게 관심을 돌립니다(21-23). 과거에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였으나, 현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고, 미래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복음의 소망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서 있으라는 권면을 받았습니다.
1장의 마지막은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작이 “나는 이제”이고, “나”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인 24-29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바울의 고백, 사명, 전달한 메시지, 그 일의 목적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사항에 대하여 우리가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1. 바울의 고백(24)
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4절에서 바울이 한 고백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 바울이 받은 괴로움, 고난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바울은 왜 그 괴로움을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고 하였는가? 셋째, 바울은 왜 그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였는가?
첫째로 바울이 받은 괴로움이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골로새서 4장 3절을 보면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러므로 바울이 받는 괴로움은 일반적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행위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 때문에 받게 되는 괴로움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전도하며 당하는 수많은 괴로움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이 직접 말한 바에 따르면 바울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고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그러면 둘째로 바울은 왜 이 괴로움을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즉 골로새 성도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고 말했을까요? 골로새 성도들을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말입니다(2:1).
힌트는 24절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와 상응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골로새 교회는 예수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는 강력하게 연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모든 괴로움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전체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1장에 기록된 바울이 받은 고난의 목록에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고후 11:28). 바울은 교회를 생각하며 날마다 속에서 눌리는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골로새 교회 역시 바울이 염려하는 “모든 교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이 당하는 정신적인 괴로움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질문입니다. 바울은 왜 이 괴로움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했을까요?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에 어떤 부족함이 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치르신 고난에 무언가 더 추가되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1:20, 22).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은 몸된 교회를 통해 연장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가운데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14). 이 일에는 고난이 수반됩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에게 속하였으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9, 20).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인을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충만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과 같은 고난을 맛볼 것입니다. 그것이 “남은 고난”입니다.
정리하면 24절에 바울이 고백하는 내용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당하는 괴로움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가 속해있다는 증거이며, 그분을 증언하면서 마땅히 받아야 할 고난이며, 결국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에 별로 감흥이 없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이건 바울 이야기니까요. 누가 괴로움이 좋아서 일부러 자기 삶에 채워 넣으려 하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의 이 고백은 마땅히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후에 나올 바울의 사명, 메시지, 목적이 곧 우리의 사명, 메시지, 목적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의 사명(25)
25절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바울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받는 고난을 기뻐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일을 하라는 사명을 확실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울)은 본래 정통 유대인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유대교 전통과 신앙을 좇았는지, 그리스도를 믿는 이웃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죽일 정도였습니다(행 22; 빌 3:6).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바울이 갑자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꾼(종)이 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그리스도께 사명을 받는 장면이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다메섹에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가는 중에 홀연히 하늘에 빛이 그를 둘러 비추고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에게 이렇게 주어졌습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일꾼)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교회)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18; 갈 1:15).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자기 삶에 채워넣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곧 투옥될지도 모른다며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은 부득불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9:16). 사명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기 때문입니다(고전 4:2).
이 말씀을 들으면서, ‘바울이니까, 바울은 그런 사명을 받았으니까…’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하지만 우리도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20).
예수님의 대사명은 사도들을 시작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에 이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모든 몸된 교회가 순종해야 할 사명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명에 순종하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성도들 위에 오늘날 교회인 저와 여러분이 세워졌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 차례입니다.
이 사명은 여러분 삶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차지합니다. 직장생활, 가정생활, 교회생활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삶 가운데서(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이 사명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골 3:18, 20, 23, 24).
여러분, 비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삶)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은 보이는 것을 위해 일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 일합니다. 그 하나님께 받은 사명대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사명을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막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바울과 같은 각오가 필요합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려함에는 내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주께 받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 사명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3. 바울의 메시지(26-27)
바울은 단지 사명감에 억눌려 어쩔 수 없이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영광스럽고 풍성한 소망에 빠져있었습니다. 26절과 27절을 보십시오.
26절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절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먼저 바울은 복음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지나간 시대와 세대에 감춰졌던 비밀이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과거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자기를 드러내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과 제사를 주셔서 그 언약의 관계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으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엡 2:12). 이방인은 아무리 잘해도 유대인으로 귀화하여 ‘이등급’으로 그 언약의 혜택을 맛보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복된 소식, 복음이 이방인에게 풍성하게 전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어 새 사람 즉 교회로 만드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이방인)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부르심을 받은 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미친 하나님의 능력이 되셨습니다(고전 1:24).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한 소망이 되셨습니다(롬 10:12).
바울은 이 비밀을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풍성하다”고 말하고, “영광의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이토록 영광스럽고 충만합니다. 그것을 바울이 알았고 보았고 그 복음에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에 그는 고난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면서까지 그리스도를 얻기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8). 그가 사명을 받아 전달하는 그리스도가 너무도 영광스럽고 풍성한 분이시기 때문에 바울은 그분을 전파하며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자기 삶에 채워 넣었던 것입니다. 따라오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그리스도께서 그런 분이시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당신이 심각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모든 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을 당신에게 선물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당신도 먹고 고침을 받고 이 세상에 아픈 자들을 찾아가 고치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그 약을 먹고 당신은 병을 완전히 고쳐 건강하고 튼튼한 새 몸을 얻었습니다. 그 약의 효력을 직접 맛본 자로서 아픈 자들을 찾아 고칠 때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흥분되고 기쁘지 않겠습니까? 병상에 누워있는 수많은 환자들을 이 약으로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말입니다. 몇몇 환자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핀잔을 주거나 거절을 해도 기쁨으로 약을 전할 것입니다. 그 약의 풍성한 효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광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죄인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자를 빛으로 인도하시고,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를 해방하십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저주받을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로 옮기시며, 영원한 심판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운명을 바꾸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전파하는 메시지입니다. 영광스럽고 풍성한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십니까? 여러분이 받은 복된 소식, 복음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에 충성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우리 삶에 채우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복음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의 풍성함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낱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죄 많은 피조물에서 만물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된 교회가 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놀라운 복음의 가치를 여러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정에 쌓인 빚이 단번에 해결되면 이보다 더 기뻐할 것입니다. 대기업 회장의 양자가 되면 이보다 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이 땅에 눈이 고정된 사람의 감정이며 태도입니까? 하나님 앞에 별보다 많은 우리 죄가 단번에 해결되었는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온 우주의 창조자요 주인이신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는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너무 기쁘고 너무 벅차서 눈물이 많은 소식이 바로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만들 만큼 우리에게 있어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분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증거하는 사명을 고난을 삶에 채우면서까지 기쁨으로 감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 가치를 깊이 묵상하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십시오(기도, 말씀 묵상, 찬양, 암송, 집회 참석 등). 그리스도는 우리를 풍성하고 부요하게 하시는 영광의 소망이십니다. 아무리 캐내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영광의 보화로 가득 찬 분이십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십시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리스도께 있습니다(벧후 3:18).
4. 바울의 목적(28-29)
바울은 성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하며 자기 삶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을 채우기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사명을 하나님께 확실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이 전파하는 메시지 곧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전파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에게 유익을 끼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28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여기서 “나”라는 표현보다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에바브라와 디모데 등 복음 사역에 충성하는 다른 일꾼들 역시 이 일에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각 사람에게 권하고 또 각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권한다”는 것은 경계하는 것으로, 회개와 관련된 것입니다. 잘못된 사람의 행위와 마음의 태도를 올바른 것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믿음의 교리에 대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거룩하게 자라나는 데 필요한 모든 지혜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모든 복음의 일꾼들이 지금도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각 성도를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권하고, 또 각 성도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잘 자라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일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 바로 각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이루신 그리고 이루고 계시는 일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일을 각 성도 안에 이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시는 일에 복음의 일꾼들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9절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표현은 운동선수가 거칠게 겨루거나 씨름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서 바울은 모든 수고를 다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할 책임이 있습니다.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라고 편지했습니다(롬 15:14).
당신은 신앙의 방황기를 맞은 형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고난을 기쁨으로 당신 삶에 채우기 원하십니까? 갓 거듭난 자매에게 그리스도의 복된 가르침으로 양육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내어놓기 원하십니까? 여러분 교회에서 맡은 일을 진정 기쁨으로 하고 계십니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여기 모여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 한 몸으로 당신과 연합한 지체들입니다. 한 지체가 병들어 있을 때, 연약할 때, 낙심할 때 그 지체를 회복하고 붙들어주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형제자매를 완전한 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것,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쁨으로 동참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괴로움을 싫어합니다. 누가 괴로움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삶에 고난을 채워 넣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받은 사명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 풍성함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로 인해 완전하게 세워질 형제자매를 위하여 힘을 다해 수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