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다른 신들에게 빠진 백성들
본문: 사사기 2장 11~19절
설교자: 이병권
사사기는 두 번에 걸쳐 서론이 나오는데, 지난주에 두 번째 서론의 첫째 단락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둘째 단락입니다. 오늘 본문, 둘째 단락은 11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우리 번역에는 19절의 문장이 끝나지 않고 20절로 이어지는데 원래 성경에는 19절에서 문장이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기에서 계속해서 볼 수 있는 반복되는 주기, 사이클을 소개합니다. 이 주기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조금 차이가 있는데 그 단계를 4개에서 7개 정도로 나눕니다. 저는 가장 간단하게 4단계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타락 – 진노 – 간구 – 구원’ 오늘은 이 주기를 살펴보고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시작되는 것은 타락입니다.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 어떤 모습인가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11-12)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전에, 하나님 눈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 악이 무엇입니까? 다른 신들을 따르며 그들을 섬긴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타락에서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1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립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을 버렸을까요? ‘이제부터 하나님 섬기는 것은 금지!’ 백성들이 이렇게 선포하고 한 마음으로 다른 신들을 섬기기로 약속했을까요?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다른 신들을 추가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신들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다른 신들에게도 예배드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다른 신들이 주는 복도 받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추가로 섬긴 것을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긴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무슨 일을 한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 목전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럼 백성들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왜 다른 신들을 섬겼던 걸까요?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그 땅에 어울리는 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주위의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능력이 있어 보이는 신들을 따랐던 것입니다.
특별히 두 신이 언급되는데 바알과 아스다롯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으로, 사람들은 바알이 풍년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스다롯은 바알의 아내로 다산의 여신이었는데, 아스다롯이 식물과 동물에게 생명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자신의 소유가 풍성해지는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했고 이제 그 땅을 일구며 살아야 합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시며 그들 조상의 필요를 채워주셨는데, 지금 정착한 땅에서는 하나님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의사가 모든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는 것처럼, 가나안에서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가나안 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입니다. 조상들이 섬겨왔었던 여호와라는 신도 섬기고, 가나안 땅에 왔으니 가나안 백성들이 섬기고 있는 신도 섬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땅에서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더 많은 복을 받고, 더 잘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좋아 보이고 뭔가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든지 관계없이 눈에 보이는 가나안 신들이 좋아 보이니까, 다른 신들이 나에게 도움을 줄 것 같으니까, 가나안 백성들이 그 신들을 섬기고 있으니까, 그들을 따라 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이런 타락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타락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14-15)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십니다.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이 하신 경고의 말씀은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러는 거처럼 ‘너 자꾸 그러면 정말 혼난다! 다음에 또 그러면 진짜 용서 안 한다’ 그러면서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주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대적들에게 노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경제적인 풍요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이스라엘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져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길 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주변에 있는 적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적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했던 가나안을 정복했던 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은 적들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던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행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수24:20)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둘 때 말씀하신대로 진노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부정적인 모습이 생각나서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화가 난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면 자신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고, 보통 안 좋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노하는 것, 그 자체는 사랑에 반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화를 내셨습니다. 때에 따라 진노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러합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있다면 어떨까요? 정말 어리석고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사랑한다면 정말 화를 내며 그 악에서 돌이키도록 어떻게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스스로를 절제 하지 못해 화가 폭발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안에서 나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며 그 관계를 망치는 일을 하는데 그냥 받아주고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무관심일 뿐입니다.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왜 자녀에게 화를 내며 잔소리를 하겠습니까? 사랑의 관계이니까, 자녀를 위해서 하는 말 아닙니까? 나랑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의 자식이라면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내들이 왜 남편들에게 그렇게 잔소리를 하겠습니까?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죠? 물론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기도 하지만 사랑해서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왜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기에,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섬기는 대상에 다른 신들을 추가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목록에 여러 신들이 추가되었습니다. 마치 카톡에 친구를 추가하듯이 이 신도 추가하고 저 신도 추가하고 인맥을 넓히듯이 자신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신들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더 큰 복을 누리며 잘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다른 신들을 추가한 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들에게 강조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서 속히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허투루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말씀 하나 하나 기억하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저주를 약속하셨다면 그 저주는 반드시 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결과가 뻔히 보이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일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없기를 바랍니다. 나는 괜찮겠지, 아무 일 없겠지,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보면서 왜 저럴까 생각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나도 같은 선택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다른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밤늦게 치킨을 시켜 먹고 시시때때로 간식을 먹고 있지만, 그러면서 소파에 누워 TV리모컨을 누르고 있지만 살이 찌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혼자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데, 자녀들이 알아서 잘 크고 가정의 문제가 없기를 바랍니다. 부부 사이에 친밀한 대화나 서로를 위한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서도 그 관계가 발전되고, 서로를 위한 희생 없이도 가정이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겁니까?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도둑놈심보 아닙니까?
노력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으면 수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다르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다를 거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악을 행했을 때 그에 대한 대가를 치릅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맞고 나니까 그제야 정신이 듭니다. 맞기 전에 정신 차리고 잘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게 잘 안됩니다.
고통 중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슬피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진노 다음으로 이어지는 단계가 간구와 구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18)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단계가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과정입니다. 괴로움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사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사사를 통해 대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이유입니다.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18) 하나님이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괴로움으로 슬피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돌이켜야 합니까? 백성들이 그 악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돌이킨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그 뜻을 돌이키십니다.
여기 돌이킨다는 이 단어는 회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회개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데 정작 회개해야 하는 이스라엘은 돌이키지 않고, 성경은 하나님이 돌이키셨다고 말씀합니다. 참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회개, 이스라엘의 돌이킴은 나오지 않는 걸까요? 아닙니다. 나옵니다. 백성들도 돌이킵니다. 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큰 역설이 있습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19)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죽은 후에 백성들은 어디로 돌이킵니까?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잘못 돌이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들에게로 돌이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고통이 사라지니까 다시 우상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표현이 어떠합니까?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에게로 돌이킨 백성들은 더욱더 타락합니다. 사사기의 이 주기가 반복될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타락합니다. 주기가 거듭될수록 발전되는 것은 그들의 타락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부르짖음이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회개함으로 부르짖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고통으로 인해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죄로 인해 고난이 찾아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짖습니다. 죄로 인해 얻게 되는 결과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지나면 또 다시 그 죄를 반복합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의 죄가 계속 반복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단지 고난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진정으로 회개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범죄 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시편 51편에 보면 그는 무엇보다 그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며 애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돌이킴의 모습, 회개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형벌을 피하려고 애쓰기보다 죄 자체를 깊이 반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자체를 슬퍼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회초리가 무서워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한 마음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에서 돌이키기보다 그들의 조상의 길에서 돌이켰고, 하나님에게서 다른 신들에게로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한 후에도 돌이켜 우상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더욱 심해져갑니다. 사사기가 진행될수록 타락은 더 심해지고, 사사들도 더 흠이 많아지고, 사사들이 가져오는 구원과 회복도 갈수록 더 약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나오는 사사들은 사사 같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인간 구원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완벽한 존재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가 필요합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해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사기에서는 그런 구원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구원자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십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참 구원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통해 사사기의 반복되는 주기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타락, 거듭되는 우상숭배, 그렇게 다른 신들에게 빠진 이스라엘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왜 저러는 걸까? 왜 저렇게 징글징글하게 우상숭배를 반복하는 걸까?’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했던 우상숭배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다른 신들로 교체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여러 신들을 섬기고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신들은 그들의 능력이 미치는 특정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어떤 신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주권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농사를 하면 농사의 신을 섬기고 그 신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내가 바다에 나가면 바다의 신을 섬기고 그 신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사람이 신을 선택하고 자기 원함에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이 원했던 것은 그들에게 도움이 주는 부적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의 삶에 개입하시는 주권자는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 부담스러운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영역에 대해서 주인 되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심하면 우리도 금방 다른 신들에게 빠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처럼 나무로 깎아 만든 우상에게 빠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보다 위험한 우상들이 우리 마음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 우상들은 아주 미묘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닫기 어렵고, 자신은 계속 믿는 자로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삶에 자리 잡은 우상이 없는지 정직하게 나의 삶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 나의 가정과 학교나 직장, 교회에서 내가 사용하는 시간과 재물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용히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나는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해서 나의 어떤 영역에서는 말씀과 상관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나는 하나님이 나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대로 행하기보다 내 생각이나 내 원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나는 내 삶에서 하나님 아닌 무언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서 내 삶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나는 내가 가진 물질을 통해서 나의 존재감이나 안정감을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나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나는 하나님보다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나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나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의 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과감히 그 우상을 버리고 나의 삶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신들 중에 하나인 하나님, 좋습니다. 다른 신들보다 뛰어난 하나님, 그것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신이다. 뭐! 상관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오케이.
그런데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신이다. 그건 싫습니다. 너무 독선적이고 무례한 것 아닙니까?
나의 삶을 돕는 신, 좋습니다. 나의 삶의 일부를 관여하는 신,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의 모든 삶을 주장하는 신, 그건 싫습니다.
주일에 예배하는 시간을 드리고 나의 재물 일부를 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다른 모든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신입니다. 나는 그 신을 따르겠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아니라 나의 일부를 원하는 신이 나는 좋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도 사사기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다른 신들에게 빠져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나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많은 신들 중에 하나입니까? 아니면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