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능력은 크기보다 방향이다
본문: 사사기 13장 1절 ~ 25절
설교자: 이병권
저는 어렸을 때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상상하곤 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엄청난 힘을 가지고 나쁜 사람을 혼내줍니다. 망토를 휘날리며 빠르게 움직이고 적의 어떤 공격도 문제없이 막아냅니다. 그런데 가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것입니다. 나도 저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아마도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가 계속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인기를 끄는 것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특별한 능력을 하나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능력을 택하시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더 큰 능력, 더 엄청나고 더 특별한 능력을 원하시겠죠? 그러면 다시 질문합니다. 왜 그 능력을 원하십니까?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어떤 목적인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능력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능력의 크기보다는 능력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방향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그 능력이 개인의 욕심이나 죄악된 것을 향하고 있다면 큰 능력은 오히려 재앙이 될 뿐입니다. 능력이 클수록 더 손해입니다. 능력이 작더라도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향을 정한 후에 그 능력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입니다.
그런 면에서 삼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삼손, 사람들은 나와 다른 특별한 사람을 동경하고 기대합니다. 삼손은 그런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합니다. 그는 출생부터 달랐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삶을 보면 그런 기대는 모두 사라집니다. 능력의 크기는 컸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사사기에 나오는 어떤 사사보다 더 큰 가능성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맙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삼손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삼손처럼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과 재능을 한순간의 쾌락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좇다가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삼손의 출생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것은 크기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사람들은 크기에 집중하고 크기에 놀라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명하신 방향을 알고 크기보다 방향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럼 먼저 이야기의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삼손 이야기의 배경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1) 사사기의 반복되는 주기대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에게 이스라엘을 넘겨주십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압제를 받는 기간 중 가장 깁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타락과 악이 심해졌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번 주기에서 특이한 점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 이후에 등장했었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하나님께 간구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잘못을 고백하며 돌이키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기드온과 입다의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며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것마저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건져줄 구원자를 준비하십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2)
소라라는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23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단 지파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그 땅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노아의 이름의 뜻은 휴식, 안식처인데 그 이름의 의미와 어울리지 않게 그에게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은 여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생각해보면 사라나 리브가는 물론 라헬까지 모두 출산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마노아 가정도 그러합니다. 임신하지 못했던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 가정에 아이를 허락하십니다. 은혜로운 하나님은 이 사실을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3-5)
어느 날 갑자기 마노아의 아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합니다. 여호와의 사자, 그러니까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에 대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들은 것입니다. 천사를 보며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천사가 전하는 소식은 그녀를 더 놀라게 합니다.
그 소식은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이고, 그 아이는 하나님께 특별한 목적으로 바쳐진 나실인이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하나는 여인에 대한 명령인데, 이제 아이를 임신할 것이니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이에 대한 명령인데, 아이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 하나님께 바쳐진 구별된 사람을 말합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에 대한 규정이 나오는데, 나실인은 지켜야 하는 세 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첫째 술과 그 외에 취하게 하는 것들을 피해야 했습니다. 둘째 머리카락에 칼을 대지 말고 길게 길러야 했습니다. 셋째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고자 서원하면 나실인이 될 수 있었고,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나실인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손의 경우는 특별합니다. 삼손은 뱃속에서부터 구별되었고 평생 동안 나실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천사가 전한 말씀에 깜짝 놀란 여인은 남편에게 가서 이 사실을 말합니다.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6) 마노아의 아내는 먼저 자신이 본 사람에 대해서 남편에게 말합니다. 그녀의 말을 정리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만났는데, 그 모습이 천사와 같았고 그 사람을 마주하기에 너무 두려워서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자’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람은 선지자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내게 왔는데 그 모습이 천사 같아서 감히 물을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이 천사를 여호와의 사자로 계속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여호와의 사자는 단순히 천사가 아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마노아의 아내는 천사가 전한 말씀을 남편에게 알려줍니다. 내용을 요약해서 전했기에 그녀가 뺀 것도 있고 추가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통해 그녀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가 전한 내용 중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는 것은 그녀의 관심이 아들을 낳는 것 자체에 맞추어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하기 시작하신다는 말씀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기쁨의 소식을 들은 그녀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아내를 통해 이 놀라운 소식을 들은 마노아는 무엇을 했을까요?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8)
마노아는 그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키워야 할지 알고자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그 사람을 보내주셔서 자신들을 가르쳐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천사는 이번에도 아내 혼자 있는 곳에 나타납니다. 아내는 급히 달려가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마노아는 아내를 따라가서 드디어 천사를 직접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에게 묻습니다. 마노아의 반복되는 질문입니다.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행하리이까‘ 이 땅을 살아가는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천사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미 그의 아내에게 일러주었고 그대로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명령한 것을 다 지키라고 합니다. 마노아가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천사는 질문에 대해서 이미 했던 말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사와 마노아의 대화를 보면 마노아보다 아내가 더 영적인 분별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노아가 했던 세 번의 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마노아는 음식을 대접하려 합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15) 천사는 마노아의 호의를 거절하며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마노아가 이렇게 한 것은 이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합니다. 마노아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선지자로 생각했기에 이렇게 음식을 대접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이 사람이 천사의 모습 같다고 말한 것과 비교되는 일입니다.
둘째 마노아는 천사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17) 마노아는 이 사람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아이를 얻은 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알려준 선지자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이 질문에 대해서 천사는 또 부정적으로 답합니다. 천사는 마노아를 나무라며 자신의 이름을 “기묘자”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에 그냥 “기묘자”라고 되어 있어 조금 오해할 수 있는데, 원래 의미로 보면 ‘내 이름을 네가 이해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마노아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고 가르쳐주지 않은 것입니다.
셋째 마노아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절망합니다.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22) 하나님이 제물을 태우셨을 때 마노아는 그제야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자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시려고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도 마노아 보다는 그의 아내의 분별이 더 낫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23)
삼손이 출생하기 전의 있었던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마노아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삼손이라고 합니다.
삼손의 출생을 기록한 13장을 읽으면 왠지 모를 불안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출생을 예고하셨고 이스라엘의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을 구할 구원자가 태어난다는 소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사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타락해가는 사사기의 흐름 속에서 삼손의 부모에게서 뭔가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이런 불안함은 삼손이 성장한 후의 이야기에서 현실이 됩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목적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과는 관계없이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아이의 출생을 알려주셨습니다.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마노아 부부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여러 지파 중에 단 지파를 택하셨고, 많은 사람 중에서 마노아를 택하신 것은 그에게 큰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그동안의 수치와 불명예를 다 씻어버릴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생각이 멈춘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알고 감사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것을 주셨는지, 내가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이 마노아 부부에게 자녀를 허락하신 것은 자녀를 통해 복을 누리도록 하시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이 아이를 사용하시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 가정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구별된 삶을 살도록 나실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구별된 삶을 살도록, 엄마 뱃속에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삼손의 긴 머리를 보면서 말합니다.
‘저 아이는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해 태어난 아이야!’
삼손은 날마다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머리를 보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해!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야!’ ‘나의 힘, 나의 능력,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거야!’
우리가 진짜 인생을 살려면,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제대로 살려면 내가 왜 이 땅에 있는지, 내가 왜 여기에 이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나의 방향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우연히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하나님이 그 뜻에 따라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여기에 두셨습니다. 그냥 나 자신만을 위해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능력, 왜 하나님이 그 능력을 주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있는 재능, 왜 하나님이 그런 재능을 주셨을까요? 왜 힘을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재물을 주시고 생명을 주셨을까요? 왜 크신 은혜로 주님을 만나게 하셨고, 주님 안에서 참 생명을 얻어서 그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실까요? 왜 우리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큰 은혜를 베푸신 걸까요? 이 땅에서 내 꿈을 이루라고요? 이 땅에서 나를 위해 살라고 그러셨을까요?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인생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마노아 부부가 마냥 삼손을 낳아서 기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삼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삼손이 자신이 가진 큰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쓴다면 어떨까요?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헛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당연하게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이유 없이 나에게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지,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나의 삶을 나를 위한 목적으로, 내 개인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서 돌이키기 위해서 우리는 마노아가 했던 질문을 반복해서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계속되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을 했던 마노아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그의 아내에게 했던 말을 다시 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라고 질문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다 답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경을 기록할 수도 없고 보관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 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질문에 답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그 모든 질문에 답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답이 아닐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답이 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하나님을 더 알고, 그 하나님께 더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그분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그분의 어떠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죄인들 가까이 오셨습니다. 마노아가 하나님이 그들 가까이 오셨음을 알고 그 앞에 엎드리며 죽게 되었다고 고백했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멸하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을 나타내시며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죄인들 가까이 오셨습니다.
삼손의 출생의 이야기가 이것을 우리에게 그림자처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오신 진짜 구원자, 유일한 구원자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그들과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삼손은 부족한 구원자로 그 일을 온전함으로 행할 수 없었지만,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완벽하게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태어나시기 전에 지으신 그 이름대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우리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친히 수치를 입으셔서 우리의 모든 수치를 씻어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이제 우리는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방향으로 살기를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의 방향이 제대로 맞춰져 있는 다시 한 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여러분의 방향을 확인하시고 계속해서 주님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