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본문: 누가복음 2장 1절 – 14절

설교자: 조정의

2019년 5월 6일 영국의 해리 왕자와 매건 마클 왕자비 사이에 첫아들, 아치 해리슨 마운트배튼-윈저가 태어났다. 그는 왕실의 아기라고 하여 “로열 베이비”라고 불렸다. 나면서부터 영국은 물론 전 세계의 축복과 관심을 받았고 영국 도박사들은 아기에게 어떤 이름이 붙여질지 여러 후보를 두고 내기했다. 부모는 윈저성 세인트조지홀에 모인 수많은 취재진 앞에 아기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아기는 영국 왕실이 애용한 유명 브랜드 허트앤선에서 수작업으로 만든 양털 모자와 담요로 싸여있었고 역시 영국 왕실이 애용하는 실버크로스 발모랄 유모차에 뉘었다. 시가 600만 원 상당의 고급 유모차였다. 해리 왕자 부부가 낳은 아들은 왕실의 명예와 권력과 부에 걸맞은 관심과 축복과 대우를 받았다. 

본문은 또 다른 “로열 베이비”의 탄생에 관하여 다룬다. 예수님은 겨우 228개국의 나라 중 하나인 영국의 짧은 역사를 가진 왕실에서 태어난 후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영원히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독자로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철저히 의존적인 아기가 되어 여자의 몸에서 나셨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겸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빌 2:6-7) “로열 베이비”셨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는 예배를 받으셨다(계 5:12). 예수님이 탄생할 때 마땅히 그분은 그에 걸맞은 관심과 축복과 대우를 받으셔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과 그 소식이 선포되는 모습에서 극적인 대비를 발견한다. 예수님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에 걸맞지 않은 평범 그 이하의 모습을 본다. 다시말해 그분의 철저한 낮아지심을 본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더 큰 감동을 받고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돌려드리기 원한다.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고후 8:9).

1. 구주의 탄생(1-7절)

세상의 구주가 나신다면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 18:18). 또한 그 구주는 다윗의 자손이어야 했다.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89:4).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나신 시점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1-3절). 가이사 아구스도는 누구인가? 로마의 황제다. 그가 당시 천하를 지배하는 왕이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황제가 세운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 예수님은 자주 국가로서 통일된 이스라엘 왕국, 다윗의 왕실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솔로몬이 명예와 지혜와 부를 크게 누릴 때,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침략국의 명령에 따라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던 한 포로민의 아들로 예수님은 이 땅에 나셨다. 선지자 이사야는 구주에 관하여 예언하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라고 했다(사 61:1). 모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 자리를 버리고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자리를 택한 것처럼, 구주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기 위하여 포로된 자, 갇힌 자와 같은 자리로 내려오셨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4-5절). 육신의 부모로서 요셉과 마리아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들은 다윗의 집 족속으로 구주가 예언된 지파의 자손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다윗의 집 족속 중에 가장 유력하고 뛰어난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요셉은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말을 들었던 나사렛 동네(요 1:46) 살던 “목수”였고(마 13:55), 마리아는 그의 약혼녀였다. 무척 가난했다는 사실 외에도(눅 2:24) 그들을 부끄럽게 할 이유가 있었는데, “약혼한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구주가 여자의 몸을 통하여 나셨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참 신비로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다. 그러나 분명히 대비되는 관점도 존재한다. 마리아는 약혼기간에 임신한 부정한 여인처럼, 요셉은 그 죄를 드러내어 심판하거나 가만히 끊어버리지 않고 데리고 와서 사는 남자로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구주께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실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61:1). 구주 예수님은 간음중에 잡힌 여인이나 창녀, 세리 등 당시 손가락질 당하는 죄인들에게도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로 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여 그들을 부요하게 하시고, 상처입은 자가 되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셨다.

자, 이제 아기가 태어났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왕으로 오신 것이다. 이 로열 베이비를 어디에 눕히고 무엇으로 싸야 합당한가?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6-7절). 베를레헴은 구주가 나실 동네로 예언된 장소다(마 2:6). 많은 성탄절 연극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 집집마다 문전박대 당하고 여러 여관에서 쫓겨나면서 결국 허름한 마굿간에 들어가는 장면을 연출하지만, 실제로 그런 거절과 냉대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날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구원할 구주를 위하여 럭셔리한 침대가 준비되지 않았다. 수십년간 왕실을 지원하는 담요나 모자로 덮은 것도 아니다. 세상을 구원할 왕은 가축이 풀을 뜯는 먹이통, 구유에 뉘었고 별볼일 없는 포대기 천 강보에 싸였다. 모든 부와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께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대우가 아닌가! 

2. 구주 탄생의 선포(8-14절)

자, 이제 구주 탄생 소식이 어떻게 선포되었는지 살펴 보자. 2024년 한강 불빛 공연에서는 드론 라이트 쇼가 열렸다. 1000대의 드론이 10분간 펼치는 화려한 쇼는 회차당 평균 1억원의 비용이 들고, 이 공연을 보기 위하여 약 2만명 정도가 몰려든다고 한다. 구주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드론 라이트 쇼와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불빛 공연이 펼쳐졌다. “수많은 천군”이 “천사와 함께” “찬송”하며 보여준 경이로운 장면이었다(13-14절). 세상 모든 나라 백성이 이 멋진 장관을 보고 듣기 위하여 몰려들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그 지역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보여주셨다(8절).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1절).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너희” 곧 목자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구주가 나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나 부유한 집에 사는 자들에게 먼저 전달된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 몇 명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었다. 천군 천사는 이렇게 외쳤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과 그 의미는 위로는 지극히 높은 곳까지, 아래로는 땅의 모든 하나님 백성에게 미칠 좋은 소식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장 풍성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일이 구주의 탄생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땅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마침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단번에 영원히 바쳐질 구주로 인하여 영원한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다주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높고도 넓은 복음의 은혜를 먼저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알리시기를 기뻐하셨다. 20절을 보면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평생 그들에게 얼마나 큰 자랑거리와 감사의 제목이 되었을까? 하지만 그들이 보고 들은 것보다 더 큰 감사의 제목은 구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나셨고 그것이 그들에게 좋은 소식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세대의 변론가, 지혜 있는 자, 학자(선비)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 성도 중에서는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다(고전 1:26).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누구도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셨다(고전 1:3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정말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가 맞는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때 주님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말씀하셨다(눅 7:22). 병자를 고치는 초자연적 역사를 구주께서 일으키셨다. 그리고 죄의 질병을 고치는 은혜로운 역사를 구주께서 ‘가난한 자’에게 차별 없이 알려주셨다.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시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자가 되셔서 그렇게 하셨다. 

빌립보서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말한다(6-7절).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나신 로열 베이비는 왕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러 오셨다. 가난한 자나 병든 자나 억눌린 자나 마음이 상한 자나 그 누구나 그분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젠가 그 이름에 걸맞은 부와 존귀와 힘과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때에, 우리 모두가 한 목소리로 구주를 높여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