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 입으로 주의 신실하심을 말하리라
본문: 시편 89편
설교자: 최종혁
‘괴리’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 의미는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짐이라고 되어 있는데, 주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와 같은 표현으로 많이 사용된다. TV 등에서 보여지는 대학 생활은 낭만이 가득하지만 실제 대학 생활은 과제만 가득한 경우가 많다. 직장인들도 멋지게 일하고 퇴근 후에 자기 하고 싶은 일들을 즐기는 모습들이 이상적으로 그려지지만 현실은 직장에서도 졸고 집에 오면서 졸고 집에 오면 자고 하는 피곤한 삶의 연속일 때가 많다.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있는 것이다. 아마 요즘은 SNS와 현실의 괴리도 많이 느낄 것이다. ‘나’ 조차도 사진 속의 나와 거울 속의 나는 괴리가 크다.
이런 것들은 사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살 수 있다. 어차피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TV에 나오는 그런 삶이 나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은 원래 다르고 괴리감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딱히 이상에 대한 기대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괴리감은 우리에게 큰 절망과 실망을 주고 그 이상의 분노와 무력감을 주기도 한다. 기대한 현실과 경험한 현실이 다를 때의 괴리감이 그렇다. 정말 열심히 준비한 시험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그럴 수 있다. 배우자나 혹은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무너졌을 때 그럴 수 있다. 평생 건강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질병을 만나게 되었을 때도 그럴 수 있다.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던 자녀가 갑자기 말도 듣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겠다고 할 때 그럴 수도 있다. 교회나 국가에 대해서도 기대한 현실과 경험한 현실이 다를 때 우린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 기대가 너무나 기본적이고 그래서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을수록 괴리감은 더 커지고 거기서 오는 충격도 커진다.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괴리감을 경험한다. 바로 믿음과 현실의 괴리감이다. 믿음으로 기대하는 현실과 눈으로 보는 현실의 괴리감은 믿는 자들을 당황하게 하고 실망과 절망, 분노와 무력감을 넘어서 의심과 불신으로까지 그들을 몰아붙인다. 사실 시편 3권의 첫 시인 73편에서 우리는 이런 신앙인을 만났었다. 바로 아삽이다.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자신의 재난을 보며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했었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감으로 인한 결과였던 것이다. 사실 시편 3권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느낀 이런 괴리감 속에 기록된 시편들이 많다. 그래서 개인 혹은 국가적인 재난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답게 공의를 베푸시기를 혹은 그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구하는 내용의 시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속성이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과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실 수 있으시며 또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로 인해서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은 괴리감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시편 89편은 시편 3권의 아주 적절한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시편 89편은 내용상 크게 3부분으로 나눠져있다. 앞부분인 18절까지는 하나님의 능하심과 신실하신 속성에 대해서 말하고, 중간인 19-37절에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에 대해서 말한다. 즉, 이 시편의 전반부는 믿음으로 기대하는 현실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38절부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느끼고 있는 현실의 괴리감을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를 드린다.
시편 89편은 몇가지 특징이 있다. 일단 이 시편은 시편 119편과 78편에 이어 18편과 함께 세번째로 긴 시편이다. 또한 저자가 ‘에스라인 에단’이라고 기록된 유일한 시편이기도 하다. 아삽의 경우처럼 에단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에단일 수도 있고 그의 후손일 수도 있다. 따라서 저자만을 가지고 배경을 특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내용을 보면 왕의 시편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탄식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그런 괴리감을 다룬다는 면에서 앞서 살펴봤었던 시편 44편과 내용적으로 가장 유사하지만 89편이 좀 더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89편이 좀 더 어둡고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88편처럼 “그러나 나는”이 없고 오히려 “그러나 주께서”(38절)가 있기 때문이다. 즉 매우 밝고 희망적으로 시작해서 어둡고 절망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일반적인 탄식시의 순서와는 반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사실 앞서 말한 89편의 세 부분을 거꾸로 읽으면 매우 희망적이다. 탄식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여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대로 읽으면 반대의 순서가 되기 때문에 더 어둡고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나 89편은 하나님의 속성과 약속을 매우 강조하여 길게 기록되어 있다. 밝고 희망적인 내용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만큼 어둠과 절망도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둠의 시편이라고 할 수 있는 88편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89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둠보다는 하나님 자체를 더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 시편에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사용된 단어들이 세 개있다. 바로 인자하심, 성실하심, 그리고 영원히다. 각각 7번씩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속성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의 속성이기도 하다. 89편도 믿음과 현실의 큰 괴리감에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스스로 숨기실 것인지를 묻지만(46절), 결국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언약에 신실함을 나타내셔서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시편 전체를 통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편의 결론은 끝이 아니라 처음 네 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 89:1–4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이 네 구절이 시편 89편의 요약이자 결론이다. 여기 “주”라고 되어 있는 것은 모두 2인칭 대명사다. 즉, 시편기자는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금 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영원히 대대에 노래하고 알게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현한다.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자신이 이 땅에 영원히 살면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끝까지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고 그 성실하심을 견고하게 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견고하기 때문에 자신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노래하고 그 하나님을 사람들이 알게 하겠다는 말이다.
이런 확신의 근거에는 3-4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 여기서 에단이 언급하는 언약은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다윗 언약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이 아니라 그의 자손이 성전을 건축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대신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실 것을 약속하셨다(11절).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8절). 즉, 하나님께서 별 것 아니었던 다윗을 선택하셔서 왕의 자리에까지 높이셨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에 이어지는 언약도 다윗이 잘 한 것에 대한 댓가성의 보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은혜의 언약이다. 다윗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언약을 받은 후에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라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볼 수 있다(18절). 성경의 다른 언약과 마찬가지로 다윗 언약도 조건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언약이다.
그래서 이 언약에서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영원성’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언약을 성취할 자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고(13절), 그래서 다윗의 집과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하셨다.
에단도 이것이 다윗 언약의 핵심임을 알았기에 3-4절과 같이 언약을 요약한 것이다. 언약의 성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원히 견고한 왕위를 약속하셨기에, 언약의 성취에 대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이 관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언약은 견고하고 영원하다.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에단이 붙들고 있었던 진리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에 대한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나타내실 것이고 그것을 보는 자신은 입으로 주의 인자와 신실을 노래하고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기에 그의 찬양도 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면서 5절부터 에단은 그런 굳은 다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느끼는 괴리감을 상세하게 표현한다. 37절까지는 그의 믿음으로 기대하는 현실이고 38절부터는 그의 눈이 보여주는 현실이다.
믿음으로 기대하는 현실(5-37절)
믿음으로 기대하는 현실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두 기초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속성과 언약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주’는 모두 2인칭 대명사다. 즉, 이 사실을 에단은 모두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 당신은 이런 분이시고 당신께서 직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에단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한다.
하나님의 속성(5-18절)
시 89:5–8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6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7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8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이어서 에단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언급한다.
시 89:9–14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10주께서 라합을 죽임 당한 자 같이 깨뜨리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11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12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나이다 13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이 들리우셨나이다 14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능력있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권세가 없어서 어떤 일을 못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원하는대로 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재는 아니다. 악한 자가 절대적인 권세를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에는 의와 공의가 그 기초에 있고 언제나 인자함과 진실함이 함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자들이다.
시 89:15–16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16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누가 이런 복을 얻은 백성들일까? 에단은 자연스럽게 그들에서 우리로 대명사를 바꾼다.
시 89:17–18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18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런 복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다윗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인 왕을 통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은 이런 복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은 어떨까?
하나님의 언약(19-37절)
시 89:19–20 그 때에 주께서 환상 중에 주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능력 있는 용사에게는 돕는 힘을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함 받은 자를 높였으되 20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임을 분명히 선포하셨다.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은 하나님이 원했던 왕이 아니라 백성들이 원했던 왕이다. 사울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을 두려워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런 사울을 폐하시고 그의 마음에 맞는 다윗을 선택하여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다.
다윗은 공적으로 왕위에 오를 때까지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에서 그와 함께 하시면서 그를 보호하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역사서 뿐 아니라 다윗의 시편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윗 언약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를 약속하셨고 에단은 그 약속을 이렇게 기록했다.
시 89:21–25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22원수가 그에게서 강탈하지 못하며 악한 자가 그를 곤고하게 못하리로다 23내가 그의 앞에서 그 대적들을 박멸하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치려니와 24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25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다윗이 이룬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힘으로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신 일이다. 그를 선택한 것도 하나님이시고 그로 큰 일을 이루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다르게 말하면 다윗의 통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통치 아래서 이 놀라운 일을 경험했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실 때 다윗만을 선택하셨던 것이 아니고 그의 자손들도 선택하셨다. 매우 특별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시 89:26–29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28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29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이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폐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날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세우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사람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
시 89:30–37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31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33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34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35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36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37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낮에는 해가 있고 밤에는 달이 있듯, 그 사실이 변하지 않는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폐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언약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능력과 권세가 있으시며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변하지 않는 언약을 주셨다. 바로 함께하시며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는 다윗 뿐 아니라 그의 자손들에게도 주신 약속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의 자손이 온전하게 하나님을 따르지 못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럴 때에는 그를 벌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절대로 언약 자체를 폐하지는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언약을 알고 있다면 어떤 현실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약속하신 그대로가 성취되는 현실을 기대할 수 있다. 다윗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승리와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 종일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웃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는 그런 현실을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 이스라엘은 그런 현실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에단이 눈으로 보고 있던 현실에 대한 기록을 보라.
눈이 보여주는 현실(38-51절)
시 89:38–45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노하사 물리치셔서 버리셨으며 39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의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40그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요새를 무너뜨리셨으므로 41길로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의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42주께서 그의 대적들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은 기쁘게 하셨으나 43그의 칼날은 둔하게 하사 그가 전장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셨으며 44그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45그의 젊은 날들을 짧게 하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
이 표현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지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있다. 에단의 눈이 보여주는 현실은 그의 믿음이 기대하게 했던 현실과 너무 달랐다.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왕)는 언약을 이어받은 왕인데, 하나님은 지금 그 왕에게 진노하시고 그를 버리신 것 같다.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자체도 미워하셔서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다. 왕의 머리에 있어야할 왕관이 땅에 떨어져 있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0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은 전쟁에서의 치욕스러운 패배에 대한 묘사다. 하나님이 능력이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의 방패가 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대적에게 힘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다.
이 모든 눈에 보이는 현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실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파기하시고 그들의 대적과 새로운 언약을 맺은 것 같았다. 정말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에단은 37절까지의 긴 말씀을 통해 자세하게 검토했다. 에단은 그의 믿음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언약을 지금의 현실과 함께 이해할 수 있는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께 묻는 것이었다. 첫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시 89:46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의 형벌에 대해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런 비슷한 일들을 경험할 수는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하나님 그럼 언제까지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를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언제까지 노를 그치지 않으시겠습니꺄? 라고 묻는 것이다. 사실 에단이 생각할 때는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상황이다. 이렇게까지는 하시면 안될 것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유일한 가능성은 이것이니 이제는 그 노를 멈춰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빨리 그렇게 해주실 것을 구한다.
시 89:47–48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48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자기가 죽기 전에 그렇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의 입으로 주의 신실하심을 말할 수 있고 의심이 아니라 확신 가운데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편을 기록한 에단이 다윗과 솔로몬 시기의 에단이라면 그는 다윗 때의 진실함과 솔로몬 때의 찬란함을 경험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는 솔로몬이 다윗 언약의 성취자가 될 것이라 기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솔로몬 이후 나라는 반으로 나눠졌고 회복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허무하게 삶을 끝내기보다 다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며 선포하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다른 에단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런 괴리감에 대한 긴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했고 선포하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하나님께 묻는다.
시 89:49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이 질문은 꽤나 도전적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그 언약이 “그 전” 즉, 과거의 일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에단은 37절에 걸쳐 자세히 검토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하나님께 담대히 구한다.
시 89:50–51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51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
언약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하는 일은 곧 하나님께 하는 일과 같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비방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비방하는 일이고, 왕의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다. 에단은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구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숨지 않으시고 그들의 편에서 움직여 주시기를 바란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52절의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은 3권을 마무리하는 송영이지만, 시편 89편의 시작을 생각해 보면 89편의 마무리로도 합당하다. 에단은 그의 입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하기 원했고 그의 말을 들은 자들은 이렇게 화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전
시편 89편을 통해 믿음과 현실의 괴리가 크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에단이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통해 우리도 어떻게 기도할지를 배울 수 있다.
1.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은 영원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뭔가 모순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날 때면 더 확실한 쪽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다른 쪽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가 느껴질 때 우리에게 무엇이 더 확실하게 느껴질까? 일반적으로는 현실이 더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내가 지금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짓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은 영원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구약과 신약이 일관성있게 가리키는 한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실을 증명하신다.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신 분보다 우리가 더 믿을만한 것은 없다.
어떤 상황이 내 눈 앞에 보이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다. 믿음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고 생각될 때, 에단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충분히 생각해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를 말씀드리라. 하나님이 정말 잊어 버리고 계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뢰를 더욱 자라게 할 것이다.
2. 결국 믿음과 현실의 괴리는 하나님께서 제거하실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도 기대하는 현실과 경험하는 현실의 괴리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고 계신다. 공의로 다스리시고 사랑으로 다스리신다. 그 사이에는 어떤 괴리나 충돌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괴리를 느끼는 것은 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 때문인 것이다. 결국 이것을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기대하며 신뢰 가운데 현실을 사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에단이 경험한 괴리가 완전히 해결되려면 다윗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나라를 시작하셔야 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에단과 같은 상황을 살고 있다. 물론 십자기 이후에 사는 것이기에 에단보다는 훨씬 상황이 낫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궁극적인 다윗 언약의 성취를 기다린다는 면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믿음과 현실의 괴리를 크게 작게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에단처럼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입으로 주의 신실하심을 말하며 주님께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사는 참된 하나님 백성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