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낮아지심의 이름들(2)
본문: 히브리서 2장 5-18
설교자: 최종혁
신에 대해서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있다. 사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오늘날 종교들이 섬기고 있는 신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만약 신이 있다면 이러이러해야 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대개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을 생각한다. 전쟁이나 미움, 아픔, 가난과 같은 이 세상의 현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생각하고, 현실에는 그런 문제가 있으니 신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한다.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님은 그래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다 심판하지만 나는 그런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 두고 그러다 혹시 내가 위험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구해주는 하나님만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믿고 싶다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하나님일 뿐인 것이다.
사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생각은 엄청난 오만이며 무지의 결과다. 기본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찾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육을 가진 존재로서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부요함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다.
롬 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는 우리가 찾고 이해하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내가 찾을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한계를 인정하기는 한다. 우주든, 바다든, 생물이든, 무엇이든 깊이 들어가면 우리가 현재로는 ‘모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단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지금은 ‘과학’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여전히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단지 지금 모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모른다’는 것으로 인해서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는데는 이르지 못한다. 약간의 지식과 조금의 성취를 가지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찾고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가 그만큼 크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조차도 높으신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다.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더더욱 그렇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낮아지심으로 말한다.
시 113:5–9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은 낮으신 분이 아니시다. 본질적으로 높으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낮추신 것이다.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이나 구원에 대해서도 모두 오해하게 된다. 믿음은 그냥 믿어 주는 것이 되고 구원도 받아 주는 것이 된다. 나를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해 준다니까 그리고 딱히 나쁜 것은 없는 것 같으니까 받아볼까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게 된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구원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을 인정해 주는 수준에서 그친다. 말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실제로는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기쁘게 또한 감사히 영접한 자를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것이 구원이다.
기본적으로 ‘나’와 ‘우리’를 높이 평가하는 우리 입장에서 이런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다. 사람을 비롯한 온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 심지어 사람으로 살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사람을 구원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설득력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고전 1:18–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오늘 히브리서 본문(10-13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또 다른 이름 둘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10절, “구원의 창시자”,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이”). 이 두 이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까지 낮추셔서 우리를 하나님에게까지 끌어올리신 놀라운 구원을 잘 보여준다. 특히 “구원의 창시자”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까지 낮추신 모습을, 그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우리를 하나님에게까지 끌어올리신 모습을 각각 강조한다.
구원의 창시자(10절)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살짝 복잡해 보일 수 있는 말씀이지만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다. 먼저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지칭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다. 1:2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여기 10절에서도 이 창조와 관련된 표현이 예수님을 지칭할 수도 있지만, 바로 뒤에서 예수님은 “구원의 창시자”로 명백하게 지칭되기 때문에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앞서 읽었던 로마서 11장 말씀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하나님께 사용되었다.
그냥 “하나님”이라고 해도 될 것을 이렇게 표현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여기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만물을 자기를 위하여 만드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심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의 주권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하시고 그 최종적인 목적과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구원의 창시자인 예수님을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적합, 적절, 정당)하다고 10절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선포되었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선포되었다.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었다. 그럼에도 오래 참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선포되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선포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선포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베푸셨던 수많은 구원의 일들, 즉 낮아지심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능력, 거룩, 공의, 선하심, 지혜 등 하나님의 영광은 선포되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절정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낮아지셨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는 잠시 후에 더 생각해 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하나님께 온전히 합당한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셔서 하신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구원도 조금은 독특하게 표현했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
“많은 아들들”은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형제”라고 불린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고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즉 권리를 받았다. 출생이 아닌 입양과 관련된 표현이다. 예수님은 유일하고 참된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함께 상속 받는 자들로서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 5-9절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사람이 본래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죄로 인해 잃었던 우리의 모습,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신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그런 영광스러운 삶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자들이 그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궁극적인 성취는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지금 우리도 이 영광을 맛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만큼, 다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만큼 이 영광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이 영광으로 끌어 올리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일을 하신 예수님을 성령님의 감동하심 아래서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되신 우리 구원의 창시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른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즉 고난을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들 가운데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다. 하나님의 다른 구원하심이 마치 멀리서 구명줄을 던지거나 혹은 크신 손을 뻗어서 구원하신 것 같았다면, 예수님을 통한 구원하심은 직접 우리의 재난에 뛰어들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같다. 예수님을 지칭하는 “구원의 창시자”라는 표현이 정확히 그런 의미다.
예수님에 대해서 “구원자”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지만 “구원의 창시자”라는 표현은 익숙한 표현은 아니다. 사실 여기 히브리서 외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다. “창시자”는 헬라어 ‘아르케고스’를 번역한 단어인데, 사실 번역이 쉽지 않은 단어 중 하나다. 그래서 번역본마다 다양하게 번역했다. ‘창시자’, ‘주님’, ‘지도자’, ‘구원자’, ‘개척자’, ‘설립자’, ‘입안자’, ‘대장’ 등이다.
아르케고스는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무언가를 처음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단순히 순서 상 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남들이 그 사람을 따라갈 수 있게 어떤 길을 개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가문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나 어떤 철학 사상을 처음 주장한 사람에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구원을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이라고 할 때, 그 시작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의 아르케고스’라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표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의미상 우리말 중에 가장 적합한 것은 ‘선구자’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아르케고스’의 또 다른 면이 있다. 아르케고스라는 단어에는 고난이나 희생이 포함되어 있다. 남들이 하지 않았던 어떤 일을 처음하려면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구원의 측면에서 봤을 때, 아르케고스는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즉, 외부에서 길을 뚫고 온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길을 뚫고 나간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고난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윌리엄 바클레이는 배가 좌초한 상황에서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서 먼저 밧줄을 가지고 해변가까지 헤엄쳐 가는 사람이 아르케고스라고 설명했다. 켄트 휴즈는 산을 오를 때 남들보다 앞서 올라가면서 발디딜 곳을 만들고 암벽에 고정핀을 박고 동료에서 로프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 아르케고스라고 설명했다. 불이 난 건물에서 불길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사람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장 큰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희생해서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아르케고스는 때로 ‘영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담대하게 행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구원의 창시자”라고 표현할 때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멀리서 구원의 밧줄을 던지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로 뛰어드셨다. 마치 물에 빠진 아이나 불길에 갖힌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기 안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뛰어드는 부모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셨다. 그것이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인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와 같은 상황에 계시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었고 죄도 없으셨다. 예수님이 위기의 상황에 봉착하신 것이 아니었다. 재난을 만난 것은 우리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배반했다. 그래서 생명에서 멀어졌고 영원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즐겁게 그 길을 가고 있었다. 불이 나서 연기가 들어오고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있으니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며 서로 위안을 얻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현실은 다 같이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지만 그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를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내려놓으셨다. 하나님과 동듬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빌 2:6-7). 그렇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우리의 참혹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다. 그 희생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 구원의 창시자, 구원의 영웅이 되셨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 동기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던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동기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일은 하나님의 어떤 영광을 드러냈을까?
엡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를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또 다른 이름은 그 은혜가 얼마나 높은지를 드러낸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11-13절)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이”라는 표현만 놓고 보면 삼위의 하나님 중 누구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특히 레위기에는 반복적으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는 표현이 나오는데(레 20:8; 21:8 등), 그렇게 보면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분명 아들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가 “났다”고 말하고, 또한 구원 받은 자를 “형제”라고 부르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하게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이다. 특히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 표현한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낮아지심으로 얻으신 새로운 이름이라기 보다는 원래 가지고 계셨던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원의 창시자가 되어 실제로 믿는 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다는 면에서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히 10:10–14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구약의 제사들은 실제로 죄를 없게 하는, 즉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효과가 없었다. 제사장들이 매일 서서 섬기며 같은 제사를 반복해서 드려야만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은 제사를 쉴 수 없었다.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죄 문제는 그런 짐승의 제사로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짐승의 제사는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리실 참 제사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 없는 삶을 사시고 자신을 제물로 드렸을 때 마침내 사람의 죄 문제는 해결되었다. 단번에 영원히 해결되었다. 예수님은 본래 거룩한 분이셨고 또한 거룩하게 하는 분이기도 하셨지만, 육신을 입고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실제로 “거룩하게 하시는 이”라는 이름을 얻으신 것이다. 낮아지신 예수님은 믿는 자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하셨다. 죄로 인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나아갈 수 없었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스스로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언급한다. 바로 거룩하게 하시는 그 예수님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우리 구원 받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났다는 것이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한 근원에서 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원 받은 자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 즉 아버지가 같다는 말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유일한 하나님의 친자이고,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된 것이다.
사실 이런 인간 관계는 매우 어려운 관계다.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서로를 부정하고 싸우는 관계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같은 상속자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예수님은 본래 거룩하신 분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그조차도 지금은 완전하지 않다. 신분적으로 거룩할 뿐 실제로는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높고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올리시고 그런 우리를 자랑스럽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거룩’은 그 말 자체가 분리를 의미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엄연히 다르다. 이 둘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분리가 아닌 하나됨을 추구하셨다. 이루말할 수 없는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최근 학생들과 간식으로 치킨을 먹었던 적이 있다. 치킨을 다 먹고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는데, 몇몇 학생들이 치킨을 담아왔던 종이 가방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그 종이 가방에 그들이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연예인이 나의 사촌 동생이었다면 꽤나 우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 연예인이 실제로 와서 나에게 ‘형’이라고 하면서 친밀감을 표했다면, 최소한 그 학생들 사이에서는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자주 쓰니 이 진리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체감하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유명 연예인의 형이 되는 것과 비할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이라기엔 너무 좋게 들려서 사기라고 생각할만한 이야기다. 믿기 힘든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창시자로서 우리에게까지 낮아지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이끌어 이런 놀라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천사들이 살펴보기 원했던 것도 바로 이런 면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위해 인간이 되고 죽으실 뿐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심지어 하나님의 친 아들인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신다는 사실을 천사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계획을 말해주셨다면 그들은 경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망 속에서 겨우 구원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치로까지 올리셨다.
이 믿기 힘든 이야기는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다.
히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이 말씀은 시편 22:22에서 인용했다. 시편 22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시편으로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시편 22편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그 메시아의 시편 중간에 있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고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21절에서 끝나고 22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 가운데 드려진 찬양이다. 거기서 메시아는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사람들을 가르켜 “형제들”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이신 메시아에게 형제가 있다면 어떤 자들이겠는가. 정말 영광스러운 존재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원 받은 자들을 형제라고 하신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사야의 말씀도 추가로 인용한다.
히 2: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이사야 8:17-18에서 인용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셨고, 그것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과도 같음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믿음의 길을 가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따라야할 길인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형제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또 다른 낮아지심의 이름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높이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우리 같은 자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 우리와 함께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깊고 이렇게 높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세상 가운데 선포했다.
도전
이런 하나님이 이해가 되는가? 솔직히, 이해된다고 하면 그것이 거짓말일 것이다. 혹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 모르기 때문에 이해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은혜와 사랑은 우리의 이성과 논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기 어렵다면 이런 이유로 믿기 어려워야 한다. 사실로 믿기에는 너무 좋은 소식이기 때문에 그런면에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맞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다. 그리고 믿는 자를 거룩하게 하시는 이가 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선포하셨고, 우리에게는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이 구원은 너무나 크고 너무나 귀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감사함으로 받는 자들에게는 지금부터 영원히 누릴 수 있는 현실이 된다.
우리 중 누구도 이 귀한 선물을 거절하는 자가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에 다른 사소한 선물들로만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 주신 참된 선물을 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 내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놓고, 나를 찾아오신 그리고 나를 이해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