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본문: 고린도전서 7장 1-7절

설교자: 조정의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으로 시작하는 본문은 이제부터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가 편지로 문의한 여러 문제에 관하여 서면으로 대답할 것을 예고한다(7:25, 8:1; 12:1; 16:1, 12). 편지는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를(16:17) 통해 전달받았을 것이다. 7장에서 바울이 답변한 문제는 바로 결혼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본문은 결혼에 관한 바울의 관점을 오해하게 한다. 

바울은 마치 자신처럼 독신으로 이성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말한다(1, 7, 38절). 결혼은 독신에 비하면 ‘덜 잘하는 것’으로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2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을” “절제할 수 없는(9절) 사람이 하는 수 없이 택하는 궁여지책 정도로 취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든 피는 다른 사람의 전화를 옆에서 듣는 것처럼 본문을 다룰 것을 제안한다(NICNT). 우리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가 나누는 대화 중에서 오직 바울의 대답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이 들은 것 즉 고린도 교회가 물어본 내용을 유추하면서 바울이 왜 이런 답변을 한 것인지 합리적으로 추정해야 한다.

바울은 결코 결혼에 관하여 낮은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엡 5:32). 부부가 서로 베풀어야 할 사랑의 본으로 희생적이고 이타적이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했다(엡 5:22-33). 또한 그는 결혼을 음행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막기 위하여 타락 이후에 하나님이 임시방편으로 제정하신 제도라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태초부터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게 하신 창조 질서에서 그 근원을 찾았다(엡 5:31).    

그러면 바울은 왜 이처럼 오해받기 쉬운 답변을 한 것일까? 먼저,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문제를 유추해 봐야 한다. 그러면 복음의 관점에서 바울의 처방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낳고 기르시는 성도가 어떻게 함께 지어져 가야 할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문제: 성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

고린도 교회의 질문과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힌트는 1절에 나온다: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많은 영어 성경에 반영된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가 쓴 질문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처럼 보인다(‘너희가 쓴 문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지 않나요?’라는 말에 대하여 내가 답하면’). 왜 그들은 남녀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까?

고린도 교회는 성적으로 양극단의 문제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일부는 창녀와 몸을 섞고 음행을 즐기는 쾌락주의, 다른 부류는 성적인 욕구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고 거룩함을 입은 영혼으로 몸의 욕구 자체를 억누르는 금욕주의에 빠졌다. 후자의 이유로 결혼 자체를 멀리하거나 부부 관계를 회피하는 성도가 생겼을 정도다. 그래서 바울은 남편은 자기 아내와, 아내는 자기 남편과 성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으라고 명령한다(2절). 금욕하려고 억지로 애쓰다가 음행에 빠질 위험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한 3~5절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각 자기 몸을 주장하고자 하는 잘못된 태도를 꾸짖는다. 특별히 5절에서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분방하는 경우를 예로 드는데, 아마도 고린도 교회 성도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기도처럼 거룩한 행실을 갖기 위해 배우자와 성관계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도의 몸은 거룩한 성전이고,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부정한 부부 관계를 금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이 성도들 가운데 있었다.

바울은 이미 전장에서 첫 번째 극단적 반응인 쾌락주의 문제를 복음으로 교정했다(6:12-20). 그리고 이제 두 번째 극단적인 반응, 곧 금욕주의를 복음의 지혜로 다루려고 한다. 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분명한 진리를 확실히 알고 행하도록.

2. 처방: 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바울은 성을 금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7절을 보면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다. 문맥 안에서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성도가 바울처럼 독신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절제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기 때문에 바울은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38절). 왜 더 잘하는 것인가?

32-34절을 보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단지 결혼하지 않은 상태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독신으로서 몸과 영을 모두 거룩하게 하나님께 구별된 예물로 바치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의 핵심이다.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만 생각하고 주의 일만 염려하는 갈라지지 않은 마음. 그것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상의 예배가 되기 때문에 더 잘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의지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은사의 문제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7절). 은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선물을 말한다. 내가 작정해서 독신이나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독신으로 부르시거나 결혼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확고한 뜻을 가르치시면서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9:11-12). 바울이 말한 독신은 마지막의 경우다. 사람에 의해 억지로 되거나 나면서부터 그런 경우가 아니라 천국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이들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유일한 비혼의 경우다.

대부분의 성도는 독신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음행의 죄에 끊임없이 유혹받아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계속해서 실패한다. 물론 하나님은 단지 성욕을 정당하게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제정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결혼을 제정하신 목적으로 1) 출산(창 1:22), 2) 즐거움(전 9:9), 3) 정결(히 13:4), 4) 동반자(창 2:24), 5)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 선포(엡 5:32), 6) 자녀 양육(엡 6:4), 7) 생명의 은혜의 공동 상속(벧전 3:7) 등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또 중요한 목적이 있는데, 바로 부부라는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는 언약의 견고한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통하여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것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다:

15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16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17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18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19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20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잠 5:15-20).

바울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2절). 성은 오직 부부 관계 속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들에게 즐거움과 만족이 된다.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음행이다.

그러니까 성도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부부 관계 안에서 부지런히 성을 나누는 것이란 말이다. 성이 집 밖으로 넘치지 않게 막는 것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 풍족하게 누리기 위해 힘써야 한다. 바울이 얼마나 부부 관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지 이어지는 말씀을 보라.

첫째, 바울은 성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의무라고 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3절). 의무라는 말은 법적 용어로 타인에게 빚진 것을 지속적으로 갚는 것을 말한다. 남편은 아내를 성적으로 채워야 할 빚이 있고, 아내도 마찬가지다. 

둘째, 바울은 남편과 아내가 각자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한다고 했다. 자기 몸에 대하여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배우자에게 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4절). 아내를 소유물처럼 여겼던 문화에서 전반부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후반부 즉 남편 몸에 관한 권리가 아내에게 있다는 주장은 정말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가르치는 복음 안에서만 발견된다(갈 3:28). 중요한 것은 사랑의 모든 행위가 상대방에게 주는 것, 상대방의 유익을 앞세우는 것이란 사실이다. 사랑의 언어, 태도뿐만 아니라 성관계도 마찬가지다. 

셋째, 바울은 분방을 금한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5절). ’속여 빼앗다’의 뜻을 가진 분방은 문맥 안에서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배우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을 말하는데 즉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적인 원칙은 부부간에 성관계하지 않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만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킨다면 금욕을 허락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는데, 1)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간곡히 구해야 할 기도의 상황), 2) 합의상(상호 합의), 3) 얼마 동안은 하되(며칠 정도의 정해진 기간), 4) 다시 합하라(다시 부부 관계를 지속할 것을 약속). 그러니까 부부 관계는 ‘언제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부부가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서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자기 몸을 내어주는 것, 배우자의 품을 족하게 여기고 그 사랑을 연모하는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부 관계는 ‘언제 하지 않을 것인가’만 아주 특별한 경우 특별한 조건을 만족시킬 때 고민하는 것이다. 바울은 5절에서 허락한 분방의 예외조차 허락하는 것이지 권장하는 명령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6절). 왜 이렇게까지 부부 관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가?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5b절). 많은 부부가 결혼 생활이 오래되거나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부부 관계를 소홀히 여긴다. 서로 그만큼 필요가 없고, 성관계가 별로 없거나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성욕 자체가 완벽하게 절제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집 안에서 물이 줄어들고 말라가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집 밖으로 더 많은 물이 흘러 나가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수많은 성도를 성적인 죄로 무너뜨리고 복음의 은혜와 능력에서 멀어지게 만든 사탄은 당신을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3. 적용: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본문의 적용은 6장 20절 마지막 명령과 같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현재 미혼이든지 기혼이든지, (앞으로 나올 문제처럼) 사별 또는 이혼한 경우,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났거나 혹은 함께 살고 있는 경우 모두 마찬가지다. 성도는 성자의 몸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특별히 몸으로 맺는 성적 결합에 있어서 더욱.

미혼이라면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를 고민하라. 독신이 당신의 은사가 아닐 수 있다. 정욕 때문에 사탄의 시험에 자주 빠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부지런히 결혼을 위해 준비하고 기도하고 또 노력하라. 그리고 주께서 예비하신 짝을 만나 부부가 될 때까지는, 절제하며 음행을 피하고 당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라.

기혼이라면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처럼 희생적이고 이타적이고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서로에게 베풀 때, 부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특별히 성적인 관계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 성에 관한 당신의 호기심, 욕구, 만족, 기쁨, 즐거움은 오직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우자와만 누려야 한다. 그/그녀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고 그/그녀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 5:19). 복음은 이처럼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부부가 복음의 능력으로 함께 세워질 때,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함께 지어져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