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난 누구인가
본문: 갈라디아서 2장 15절-21절
설교자: 이병권
“난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구분할 수 있는 나의 특징은 뭘까? 무엇으로 나는, 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을 두고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특별히 우리가 믿는 자로서 무엇으로 나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에게 있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믿는 자의 특징, 세상 사람과 나를 구분할 수 있는 특징, 여러분에게 그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을 나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주일뿐만 아니라 오늘처럼 수요일까지 교회에 오면 난 더 정체성에 맞게 사는 사람이 되는 걸까요? 아니면 말이나 행동에서 선함을 드러내는 것을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 사람 보니까 믿는 사람 같아!’ 혹은 ‘저 사람은 아닌 거 같아!’ 우리가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일까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한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장면을 살펴봤는데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은 베드로를 책망했고 그 책망은 결국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책망이 오늘 본문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그런데 본문을 읽어보면 ‘어디까지가 베드로에게 한 말이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른 구분이 없이 계속 말씀이 이어지다가 2장이 끝납니다. 그래서 몇몇 번역본은 21절까지를 베드로에게 한 말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우리 성경은 14절 끝에 “하였노라”하고 15절과 구분합니다. 15절부터는 바울이 하는 말의 뉘앙스가 좀 달라집니다. 그래서 14절처럼 베드로에게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베드로를 염두에 두면서 갈라디아 교회에게 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 믿는 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난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무엇을 교훈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5) 여기 말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대조됩니다. 그런데 이방인에 대해서 “이방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말이 이러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으로 이방인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고 바울은 그들의 생각을 가지고 와서 잘못을 짚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자신과 다른 죄인으로 구분했던 근거가 뭘까요? 율법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의 행위가 있었고 이방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율법의 행위가 없는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이방인들과 자신을 구분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 “난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 할례 받은 사람이야! 나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야! 난 이방인하고는 말도 섞지 않고, 부정한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아! 난 율법 없는 죄인들과 달라! 난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야!’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율법이 있었고 그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구분되는 율법의 행위가 그들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유대인들은 눈에 확 띕니다. 먹는 것부터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먹지 않고 식사자리도 함께 하지 않습니다.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들, 이방인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일입니다. 할례 또한 그러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극명하게 사람들과 구분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유대인들은 자신이 이방 죄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다”는 말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에 순종하는 유대인이고 율법의 행위가 없는 이방인들과 같은 죄인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유대인은 이방 죄인과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율법의 행위입니다. 내가 율법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의 특징이 됩니까? 무엇으로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며 무엇으로 나의 정체를 찾을 수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입니다. 결국은 율법에 대한 순종, 나의 노력, 나의 어떠함, 나의 수고, 나의 열심, 나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만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아닙니다. 다른 복음이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내가 만드는 거야!’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해!’ ‘내 삶의 주체는 바로 나야!’ 멋진 말들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난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 믿는 자로서 나 자신을 생각할 때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의 관점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들, 겉으로 드러나는 몇몇 행위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인 우월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더 중요한 근본적인 것들을 놓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나의 정체성을 찾으십니까? ‘나 교회 다니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착하게 살아! 나 다른 사람처럼 욕하지 않아! 물론 가끔 할 때도 있지만, 난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아! 난 세상 사람과 달라!’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이런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하는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복음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노력으로 사람의 행위로 뭔가를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은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그들이 유대인임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의롭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율법을 따른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정체성은 의롭게 되는 것이지, 단순히 유대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유대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의로움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의 행위를 말하고 사람의 노력과 수고를 말하지만, 복음의 진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말씀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방인들이 죄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이미 복음의 진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다르게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이 그러한 행동이었고 책망 받을만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17절과 18절, 연이어서 “만일”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상황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이 두려워서 그 자리를 물러난 것은 이방인과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처럼 이방인과 함께 한 것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드로를 죄인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이방인에게서 자신을 분리시킨 베드로의 행동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난 행동입니다.
18절의 표현으로 하면, 베드로는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한 것이고 유대인처럼 살지 않은 자신을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의 행동이 옳다면, 거짓 형제들의 다른 복음이 옳다면 그리스도는 죄를 짓게 하는 자가 되고 베드로는 범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가정입니다. 바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가장 강한 부정을 말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정말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한 부정은 율법의 행위를 따라 유대인처럼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난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올바른 정체성은 율법의 행위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정체성은 단순히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이고 십자가의 은혜 때문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우리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때,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나의 특징을 생각할 때 십자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 여기서 ‘못 박혔다’라는 말은 현재완료라는 시제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로 인한 결과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나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겁니다. 여기에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인생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됩니다.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인생역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에 대한 답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노력이나 수고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나의 정체성에 맞는 삶일까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이제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나를 위한 희생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통을 당하셨고 나를 위해 모욕과 수치를 참으셨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래서 보시면 바울은 “나”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직접 경험한 자신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하고 있는 고백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고백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하게 되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바울처럼 ‘나를 사랑하사’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이 나를 위한 사랑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먼 옛날에 있었던 나와 별 관련이 없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한 의미 있는 희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볼 때 그분의 사랑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다른 삶을 시작합니다. 전과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이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겁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주님 안에서 십자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난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달라지고 나의 행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이제 나는 그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난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하신 일로 말미암아 이제 나는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분과 함께 먹고 그분과 함께 마시며 그분과 동행하며 내 모든 삶에서 그분을 느끼며 그분을 직접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분이 먼저 가신 길을 따라가며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여러분이 한 일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그런 것들로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의 어떠함을 선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을 드러냅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나의 정체성이 됩니다. 바로 십자가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런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자격 없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알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에 집중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마음 두지 말고, 그런 외적인 것들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 나는 주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사는 자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 우리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정말로 축복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