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에게 십자가란?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설교자 : 이병권
<본 설교는 녹화된 영상에 문제가 있어서 텍스트로만 제공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직접 글을 적어서 편지를 쓴 적이 있으십니까? 요즘은 직접 편지를 쓸 일도 직접 쓴 편지를 받을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편지를 받는다 해도 컴퓨터로 작성된 문서를 받는 것이 대부분이고 많은 경우는 이 메일이나 핸드폰을 통해서 메시지를 받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저희 집으로 택배가 왔는데 박스를 열어보니 상품을 판매하는 분이 직접 쓴 편지가 있는 겁니다. 자신이 판매하는 상품을 안내하면서 감사의 인사가 적혀있는 편지였습니다. 이렇게 직접 편지를 쓸려면 귀찮을 텐데 수고스러울 텐데 나름의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분명 컴퓨터로 출력된 문서와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마지막을 자신이 직접 쓰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는 바울이 쓴 게 아니라는 말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분명 바울의 글이 맞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직접 적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의 말을 전문 대필자가 받아 적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편지를 쓰는데 숙달된 사람이 기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부터는 바울이 대필자의 손에서 펜을 건네받은 후에 직접 편지의 마지막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의 마지막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
당시에는 대필자를 통해서 편지를 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직접 편지를 쓰기보다 대필자가 그 일을 했고 하나의 직업처럼 훈련받은 전문 대필자가 그 일을 맡아서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필자를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는 상황이라면 어떤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조심해야 할 것이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이 편지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의 마지막은 대필자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기록했던 겁니다. 이 편지가 위조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보통 마지막에 친필로 서명을 덧붙였고 인사와 축복의 말을 직접 적기도 했습니다. 지금 바울도 그러한 방식으로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내 손으로 직접 편지를 쓰고 있다며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주목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은 정성을 담아 큰 글자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직접 바울의 이 편지를 봤다면 지금부터 확연히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큰 글자로 썼다는 말에서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에는 글을 적을 수 있는 종이가 지금처럼 흔할 때가 아닙니다. 대필자를 통해 기록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종이를 아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친필로 편지를 적으면서 큰 글자로 씁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렇게 큰 글자로 편지는 쓰는 걸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바울이 시력이 나빠서 어쩔 수 없이 크게 적었다는 것도 있고, 바울이 전문 대필자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글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더 가능성 있는 견해는 바울이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큰 글자를 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내용에 밑줄을 치거나 빨간 색으로 표시하는 것처럼 바울이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큰 글자로 적었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다가 갑자기 목에 힘을 주면서 큰 목소리로 말하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제가 왜 그러는 걸까요?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듣는 분들이 주목하게 되고 더 집중해서 듣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바울이 직접 말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여기에서 바울은 더 큰 목소리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갈라디아 교회를 생각하며 지금까지 했던 권면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이 뭘까요? 14절에서 바울이 강조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다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자랑거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에 대해서 십자가란 ‘자랑’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랑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자랑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 자랑이 자기에게 있으면, 다시 말해 자신의 업적이나 성취에 있으면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자신이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를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삽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내가 얼마나 했느냐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종교들이 그러합니다. 내가 얼마나 공을 들이고 얼마나 선을 쌓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했느냐? 그것이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행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거짓 형제들이 전한 다른 복음이 그러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자랑으로 생각했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합니다. 13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육체를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육체를 자랑하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고 유혹이 됩니다. 형태를 다르지만 우리도 나의 어떠함을 내세우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무엇이 육체의 자랑이 되겠습니까?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자랑이 될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좋은 일이입니다. 문제는 대학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하며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야!’ 이렇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차이가 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이러한 유혹이 있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에게는 직장이 육체의 자랑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재산이 될 수 있고 타고 다니는 차가 될 수 있고 살고 있는 집이 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랑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노력으로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높일 수 있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것들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 결국 우리 인생은 점점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육체의 자랑입니다.
교회들도 보면 중요하지 않은 숫자에 민감하기도 합니다. 성도가 몇 명인지를 비교해서 교회를 평가하기도 하고 교회 건물이나 헌금 액수로 교회의 가치를 따지기도 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이 들어와서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주목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다릅니다. 십자가의 초점은 내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려줍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나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준에 절대로 이를 수 없었던 나를 알게 되고, 그런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을 자랑하며 사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서 누구나 다 부러워할 만큼 대단한 일을 성취하고 수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십자가라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그 사람이 부러우십니까? 세상에서 그 모든 자랑이 얼마나 지속될까요? 그 유효기간이 얼마일까요? 길게 잡아도 100년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이 사는 날 동안에는 그것이 크고 대단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짧은 인생이 끝나면 그렇게 순식간에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인생의 끝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가진 것들이 성취한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늦었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통과할 수 있는 자랑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인생에서 유일한 자랑인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반복해서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주의하지 않으면, 내 삶에 세상의 기준이 들어와서 세상의 자랑을 따르기도 하고 주님이 하신 일보다 내가 한 일을 주목하며 자랑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이 말씀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를 더 십자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과 나는 그 관계가 끝났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었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완전히 정리된 관계입니다. 더 이상 얽매이고 영향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에 대해서 십자가란 ‘분리’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분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세상과 분리되었습니다. 나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유일한 자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세상과 우리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습니다. 분리시켰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더 이상 세상에 속해있지 않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만큼 십자가에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멀어집니다. 그만큼 십자가에 집중하면 할수록 세상에 속한 자랑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가 내 삶의 중심이 되면 세상은 가장자리로 밀려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로 만족하면 세상에 속한 것들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가 놀라운 분리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주목하게 합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것을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15)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할례를 받고 안 받고 율법의 행위가 있고 없고 내가 뭔가를 하고 안하고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어찌할 수 없는 우리를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고 십자가로 새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이 하신 일, 그 능력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고전1:18). 그래서 다시 제목에 대해서 생각하면 십자가란 ‘능력’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축복하면서 편지를 끝내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더 이상 다른 복음에 속아서,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괴롭게 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의 편지에 귀를 기울이고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돌아와 진리를 따른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이 언급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율법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할례에 대응되는 것입니다. 몸에 있는 표시라 할 수 있는데, 여기 “흔적”이라는 번역된 단어는 당시 노예나 가축에게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찍었던 낙인을 말합니다. 학자들은 예수의 흔적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았던 수많은 박해들로 인해 몸에 남은 상처로 보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겪은 여러 희생과 고난의 흔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짓 형제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십자가로 말미암은 박해를 피하려고 했지만, 바울은 십자가로 말미암은 박해를 피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흔적은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상처와도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이 따릅니다. 주님께서 먼저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에 대한 마지막 대답은 ‘희생’입니다.십자가는 희생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정말 십자가가 그의 인생의 ‘자랑’이고 십자가를 통해 세상과 ‘분리’되어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인생이라면, 십자가의 ‘희생’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희생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희생은 예수의 흔적으로 남아 우리 인생을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흔적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의 소유인지 기억하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예수의 흔적이 있으십니까? 십자가를 생각함으로 나를 희생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생각함으로 수고하고 선을 행하며 순종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예수님께 속한 자라는 표시이며, 예수의 흔적을 내 삶에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저는 바울의 이 마지막 권고를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나와 같이 예수의 흔적을 남기도록 해라. 십자가의 희생으로 생기는 예수의 흔적은 내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단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너희도 나와 같이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십자가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를 자랑하여라.’
우리는 자주 나에게서 자랑거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바깥에서 자랑거리를 찾고 겉으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진짜 우리의 자랑은 내 안에 있는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십자가에 대해서 네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란 자랑입니다. 십자가란 분리입니다. 십자가란 능력입니다. 십자가란 희생입니다. 이렇게 살펴본 것은 누구의 고백입니까?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바울의 십자가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십자가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바울이 고백했던 십자가가, 오늘 제가 말씀드린 십자가가 동일하게 여러분의 십자가가 맞습니다. 같은 고백을 하실 수 있습니까?
바울에게 자랑이었던 십자가가 나에게도 자랑이고, 바울에게 분리였던 십자가가 나에게도 분리이고, 바울에게 능력이었던 십자가가 나에게도 능력이고, 바울에게 희생이었던 십자가가 나에게도 희생입니까?
여러분,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나를 위한 희생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영원한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이야기가 되었을 때, 나의 모든 것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유일한 자랑이 되어 나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내 삶의 힘이 되고 어려움을 이기게 하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자 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십자가로 살아갑니다. 또 십자가를 바라보며 또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또 십자가를 짊어지고 또 십자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십자가로 말미암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겪는 어려움이 생각보다 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할 만큼 괴로운 일이 나를 힘들게 한다 하더라도, 그럴지라도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십자가가 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우리가 생각할 때 세상의 욕심과 세상의 속한 것들을 버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로 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고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는 삶, 십자가를 통해 주님이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주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주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주님의 종이 되어 섬기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것이 참된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은 자의 삶이고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의 삶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삶이고 성령으로 심는 자의 삶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이며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