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
본문 : 누가복음 5장 12~16절
설교자 : 이병권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회적으로 격리된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도움 받을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기꺼이 도와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신 본문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치유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오늘 사건이 어디에서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누가는 다만,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이 일이 있었음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4장 끝에서 봤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4:34절에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지금 이 동네가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대로 이 동네, 저 동네, 여러 동네를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셨습니다. 그 사명대로 여기 한 동네에 계셨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 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누가는 그가 온 몸에 나병이 들린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사람은 나병이 온 몸에 퍼져있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람을 괴롭히는 여러 질병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병은 그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나병은 사람의 몸, 모든 조직에 영향을 미칩니다. 피부를 상하게 하고, 피를 더럽게 만들고, 뼈를 썩게 만듭니다. 당시에는 나병에 대한 치료 방법이 없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질병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병에 걸리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추방됨은 물론이고,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 즉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사회적인 모든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율법에서 나병 들린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했기에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소리를 질러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곳에서 추방당했고, 가정에서도 떠나야 했습니다.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수 없고, 삶의 모든 것이 다 바뀌어 버립니다.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수용소에서 그들을 돌보는 일을 했던 의사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다. 나병환자는 수치와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상한 일이지만 나병환자들은 일종의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멸시했기에 어떤 나병환자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 버리려고 했으며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렇게 했다.”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에게 받는 미움 때문에, 자신을 증오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 바로 이와 같은 나병환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결과적으로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비참한 상태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지만 산다고 말할 수 없는, 단지 움직이는 시체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렇게 나병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까요? 그만큼 이 나병환자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엎드립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의 지금 마음이 어떨까요?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겠습니까? “주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자신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자신을 고치기를 원하시느냐, 원하시지 않느냐입니다. “나 같은 자를,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자를, 고치려고 하실까? 모든 사람이 거절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나를, 고치시려고 하실까?” 그에게는 이것이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간절함으로 겸손히 그분 앞에 나아와 엎드리며,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이렇게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낫고자하는 간절한 마음이 담긴 행동이기도 합니다. 나병환자의 모든 소망은, 그의 인생은 이제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지금 나병환자 앞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절망에서 건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여기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 앞에 나아와 꿇어 엎드립니다. 그렇게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은혜를 구합니다.

이 나병환자의 간청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들어 주실 마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거절했던 그를,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보란 듯이 나병환자에게 다가가 손을 대셨습니다. 마치 “그 어떤 병도, 그 어떤 것도 내가 너를 품어주는 것을 막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병든 피부를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여러분은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고치는 것과 손대는 것, 둘 다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순서를 어떻게 정하겠습니까? 굳이 손을 대야 한다면, 고치고 나서 그다음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의 온 몸에는 나병이 덮여있습니다. 잘못하면 옮을 수 있는 무서운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쫓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저리가라고 소리치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간절한 요청을 들으시고,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았을 때, 나병환자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동안 자신을 만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손길일까요? 나병환자에게 이 일이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나의 마음이 어려울 때,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 나를 붙잡아 준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와서 손잡아주는 것만으로 말할 수 없는 힘을 얻을 때도 있습니다. 제가 병원에 누워있을 때, 의사 중에 몇몇 분들은 꼭 곁에 와서 손을 잡아주며, 상태를 물어보고 경과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는 같은 말이라도 제 마음에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베푸는 마음도 가지고 계십니다. 능력이 무한하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려는 긍휼의 마음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의식적인 면에서 부정하게 됨은 물론, 실제로 질병에 감염되기 쉬운 상태가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손을 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손을 대자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정결함이 나병환자의 더러움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당신이 깨끗함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하나님 뜻이면, 하나님이 하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권위로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바로 떠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병환자가 그 즉시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치유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4:27절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 그런데 오늘, 적어도 한 명이 추가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깨끗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나병환자가 여기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치유 받은 나병환자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명령하십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이 명령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과 둘째,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것과 셋째,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 명령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행동입니다. 깨끗하게 된 것을 제사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된 것은 제사장의 확인과 희생 제사를 통해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는 율법이 정한 규례를 따라야 했고, 그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는 스스로 침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이 절차에 따르기를 명하셨고, 제사장에 의해 공식적으로 깨끗하다고 선언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습니다.

메르스를 예를 들어 생각해보겠습니다. 메르스에 감염된 사람이, 자신이 다 나았음을 안다하더라도 의사로부터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고, 완치되었음을 인정받아야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있고, 사람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차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처럼 나병환자도 자기의 몸을 제사장에게 확인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17:14절에서 열 명의 나병환자에게도 이와 같은 지시를 하셨습니다.

레위기 14장을 보면, 나병환자에 대한 규례가 자세히 나옵니다. 제사장이 나병환자를 깨끗하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데는 7일 동안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8일째 되는 날에 나병환자는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그 모든 과정을 마친 다음에, 나병 들렸던 사람은 깨끗함을 인정받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에게는 자신이 깨끗하다는 것을 선언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의 선언은 그가 나음을 받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병환자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완전히 치료하십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 가족은 물론, 그 마을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구성원으로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였던 그에게 육체적인 회복은 물론, 그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적인 회복도 허락하십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의 소문은 더욱 멀리, 넓게 퍼져 나갑니다. 15절을 보면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누가는 예수님의 영향력과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으로, 그분의 말씀은 더욱더 널리 퍼져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수많은 무리가 몰려듭니다. 17절을 보면, 이 소문이 갈릴리 지역을 넘어서 유대와 예루살렘까지 퍼져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6절을 보면,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아니,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으려고 모여들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신다니요? 지금 사람들을 고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바쁜 활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따로 시간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거나,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거나, 그들에게 소유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사역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렇듯 누가는 사역의 중대한 시점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하며, 습관처럼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이후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부딪히고, 논쟁이 되는 일들, 제자들을 부르시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일들… 누가는 예수님이 그 사명을 감당하고, 때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에 앞서서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봤습니다. 혹시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뭔가 재미있는 표현이다’ 하신 것이 있습니까? 이건 왜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까? 이거 좀 색다른 표현인데! 하고 생각되는 게 있을까요? 12절, 13절, 14절 반복해서 말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깨끗하게 한다”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12,13절은 동사로, 14절은 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깨끗하게, 깨끗함을 받으라, 깨끗하게 됨”으로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병에서 나으면, 어떻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까? 병에서 치료되었다, 치유되었다, 회복되었다, 나았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일반적인 표현은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보시면 사람들이 자기 병을 어떻게 하고자 예수님께 모였습니까?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4장 40절에도 예수님께서 온갖 병자들을 고치셨다고 말씀합니다. 병은 고치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나병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나병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제목이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인데, 본문의 표현대로 수정하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더러운 것에서 정결하게, 깨끗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표현은 많은 경우에 죄와 함께 나옵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이 죄로부터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나병에 대해서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왜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나병에 대해서 그냥 병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병에 대해서 가지는 기본적인 생각은 더러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나병은 더러움, 죄에 대한 결과로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에서 낫는 것은 고침 받는 것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이 사람이 죄를 지어서 나병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걸렸느냐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나병을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보면, 4장에 기록된 이적들과는 좀 다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4장에서는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권위와 그 능력을 강조했다면,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통해 죄라는 측면이 드러납니다.

그럼 함께 5장에 나오는 이적들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베드로가 어떻게 고백합니까? 8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20절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인정하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러한 5장의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볼 때 우리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를 사하시고 죄인을 회개시키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 죄인을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을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회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병환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나병이 온몸에 덮여있었습니다. 가까이하기 힘든 지독한 냄새와 쳐다보기 힘든 혐오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기꺼이 받아주셨습니다. 그 어떤 더러움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모습을 아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지금 나의 상태를 제대로 알고, 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며, 그 앞에 엎드리는 사람을,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람을 받아주십니다. 은혜로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십니다. 지금까지 맛볼 수 없었던 참된 만족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 죄인에게 다가가 그 넓은 품으로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단지 눈에 보이는 질병만을 고치는 분이 아니십니다. 망가진 나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고장 난 나의 마음을 고치시며, 죽은 나의 영혼을 다시 살리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에게로 돌아가십시오. 그분께 겸손히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이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미 그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은혜와 사랑이 한량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적인 모습이나 조건을 두고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을 가리며 사람을 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관계없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고,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든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자를 받아주십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러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도 실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