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는 사랑하나 나를 대적하는 자에 대한 기도
본문: 시편 109편
설교자: 최종혁
이 세상에 악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악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악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실체이기에 그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재앙, 재난, 재해라고 불릴만한 큰 일들의 직접적인 원인이 누군가의 악 때문인 경우들이 있다. 그런 큰 일이 아니더라도 악은 사회에 편재해있다. 어린 아이들 사이에 서로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일들이 있다. 도덕을 배우고 교육을 받은 어른들도 그렇다. 자신의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를 놀림거리나 비방거리로 삼는다. 대부분 그 ‘누군가’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보호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쉽다.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 쌓아 온 분노를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는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저렇게 할 수 있나 싶은 일들이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서 자주 일어난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혹은 완벽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결과적으로 나쁜 일이었다고 해도 이해는 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사람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특히 그 범죄의 대상이 보호가 필요한 사람일 때 더욱 그렇다. 어린이 성범죄나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이스피싱과 같은 사기가 그렇다. 구약의 율법은 가난한 품꾼의 당일 품삯을 절대로 미루지 말라고 명령하는데(신 24:14-15), 그것이 그의 간절한 필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절실한 상황에 있는 사람은 도움을 받기보다 이용을 당하는 일들이 많다.
이런 악한 일들을 멀리서 볼 때도 있고 가까이에서 볼 때도 있다. 때론 내가 이런 악한 일을 직접 당하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여러 면에서 혼란스럽다. 하나님을 모르고 성경을 모른다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만큼 하면 될 것이다. 멀리서 욕을 하고 싶으면 욕을 하면 되고, 직접적으로 어떤 복수를 하고 싶으면 또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법의 도움을 받든, 아니면 소심한 복수이든, 뭐든 내 마음이 원하는대로 하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고민을 하게 된다. 당장에는 그런 ‘분노’의 감정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러면 안될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는 그냥 참고 넘어가게 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때는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된다. 어떻게 해야하나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선하신 하나님과 이런 악한 일들의 존재를 함께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그리고 확신하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고민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선하신 주권자 하나님께서 왜 악한 일들을, 그런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냥 두시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고민을 누구보다 많이 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다윗일 것이다. 다윗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왕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은 그의 나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자신도 악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악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인인 이상 악은 사람 사는 곳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시편에는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한 깊은 분노와 고민에서 기록된 시들이 있는데, 바로 ‘저주의 시편’이라 불리는 시편들이다. 악인에 대한 ‘저주’의 내용이 포함된 시들은 시편에 약 18편 정도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체적인 내용이 저주인 시는 7, 35, 69, 그리고 오늘 살펴볼 109편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다윗의 시편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긴 저주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시가 109편이다.
사실 이 저주가 지나친 감이 있어(특히 9-10절), 일부 학자들은 이 시편의 저주의 내용(6-20절)이 시편 기자, 즉 다윗의 말이 아닌 원수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 성경은 그렇게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일단은 사도행전 1:20에서 베드로는 이 시편의 저주의 말씀이 가룟 유다에게 적용되었다고 말했다. 만약 109편의 저주의 말이 다윗을 향한 것이라면, 그 저주는 무고한 사람을 향한 것이어야 하는데, 유다는 그렇지 않았기에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다. 또한 109:20은 분명한 다윗의 말로서 앞의 내용들이 여호와의 ‘보응’으로서 그의 대적들에게 적용되기를 구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렇게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문제는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다.
이전에 저주의 시편을 다루면서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할 3가지 전제를 강조했었다. 첫째로 저주의 시편의 동기는 개인적인 복수심이 아니다. 다윗은 개인적인 분노로 인해서 그의 대적들을 증오하여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런 시편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다윗은 신정국가의 왕으로서 이 시편을 기록했다. 증오심 혹은 복수심으로 보이는 것들은 사실 ‘공분’이나 ‘의분’으로 봐야 한다.
둘째로 저주의 시편은 자기가 이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즉, 방법에 있어 내가 그대로 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기를 구한다. 셋째로 저주의 시편은 그 목적이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저주의 시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매우 개인적인 원한의 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할수만 있다면 자기 손으로 복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심판해 달라고 저주를 퍼붓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절실히 바라는 하나님 백성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시편 109편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아마 이 때문에 ‘저주’의 말이 더 강하게 표현되기도 했을 것이다. 시편 109편에서 다윗은 법정에서의 재판 장면을 그리고 있다. 악한 자들은 거짓으로 다윗을 고소했고, 그에 대하여 다윗은 자신을 변호하면서 동시에 악한 자들을 고소한다. 신명기 19장에 이런 재판 장면에 대한 말씀이 있다.
신 19:15–21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16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17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21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이것이 율법이었다. 다윗은 거짓 증언하는 악한 자들이 행한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갚아주시기를 구했고, 그들이 행한 악이 그렇게 무자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시편 109편의 말씀을 살펴보자. 이 시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1-5절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이다. 그리고 6-20절은 저주인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소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1-29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에 따른 구원에 대한 간구이며, 마지막 30-31절은 찬송이다.
탄원(1-5절)
시 109:1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30-31절을 고려하면(구원하심으로 인한 찬양) 여기서 다윗이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라며 하나님을 부르는 이유는 명확하다. 하나님은 늘 다윗으로 하여금 찬양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지금 그 구원의 은혜가 다시 필요한 것이다.
특히 지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야 하는 상황이다. “잠잠하지 마옵소서”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잠잠하고 계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시편에는 이런 기도가 자주 나오는데, 그 의도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다. 다윗이 지금 법정을 생각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여기서는 그 행동이 곧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무죄를, 악한 자들에게는 유죄를 선언하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시 109:2–5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3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4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5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했던 일과 “그들”이 했던 일을 대조하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을 “까닭 없이” 다윗을 공격했다. 주로 말로 그렇게 했다. 악한 말을 했고 거짓된 말을 했다. 속였다. 다윗이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다윗을 미워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 미워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윗은 그런 말들로 포위된 것만 같았다.
진짜로 물리적인 공격을 한 것도 아닌데, 다윗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니다. 말은 때로 칼보다도 강하다. 더 깊고 오래 가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사람을 죽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 삶을 충분히 망가뜨릴 수 있다. 특히나 다윗처럼 다른 사람들의 신임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가짜 뉴스나 인터넷 댓글 같은 것이 민감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저 장남삼아, 재미로, 놀이처럼 하는 어떤 말로 인해서도 그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거짓에 의해 무너진 이미지는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다시 세우기 어렵다. 다윗의 경우 신정국가의 왕으로서 그에 대한 공격은 곧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 다윗은 두 가지를 했다. 사랑했고 기도했다. 자신을 공격하는 그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의를 베풀었다. 다윗이 사울에게 했던 것을 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진심으로 그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선의를 베풀었다.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를 위하여 조가를 불렀고, 사울의 시체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룬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했다. 사울을 사랑했던 것이다. 사울이 그의 선을 악으로 갚았어도 다윗은 끝까지 선을 행했다.
4-5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다른 대적들에게도 같은 태도로 같은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미워하고 괴롭게 하는 자들을 사랑했다. 시편 109편을 기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편 109편은 인내심의 끝에서 기록한 시편이 아니다. 할만큼 다 했고, 이제는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기록한 시가 아닌 것이다. 다윗은 지금도 과정 중에 있다. 지금도 그는 악을 선으로 갚고 있고, 그의 대적들은 선을 악으로 갚고 있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나는 기도라”가 된다. 나의 대적들은 나에 대해서 악한 말, 거짓 말, 속이는 말을 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고 계시지 않은 이 상황에서 나는 기도가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다윗은 기도에 열중했다는 말이다. 기도가 그의 삶이 되었던 것이다.
때로 우리는 저주의 시편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기도할 수 있나? 나도 이런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다윗의 이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윗은 사랑하고 기도했다. 다른 저주의 시편에서 그는 그의 대적들이 병 들었을 때 굵은 베 옷을 입고 금식했다고 말한다(시 35:13).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과 같이 했고 자기 어머니를 위해 곡함같이 그들을 위해 슬퍼했다고 말한다(시 35:14). 이것이 실제로 다윗이 그를 대적하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했던 일이다.
우리는 억울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이 구하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기도하기를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저주의 기도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기도다.
저주(6-20절)
‘저주’라는 표현이 사전적 의미로는 적절할 수 있지만(‘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어감을 생각하면 여기서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단순히 남에게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윗의 대적들이 했던 일이다. 다윗이 여기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의이며, 그것을 위해 죄인을 고소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먼저 6-7절은 판결이다.
시 109:6–7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다윗은 악인에게 그에 합당한 판결이 내려지기를 구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사탄’이 눈에 띌 것이다. 정말 엄청난 저주를 퍼붓는 것 같은 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탄은 우리가 생각하는 타락한 천사 사탄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소자’를 의미할 것이다. 31절의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오른쪽에 서는 것은 그를 돕는 힘이 된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다윗은 악인의 오른쪽에는 사탄 혹은 고소자가 있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를 변호할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고소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져야 함을 말한다. “그의 기도”는 호소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악인이 그를 다스리는 형벌이 내려지기를 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악을 행한 자에 대한 공의로운 판결인 것이다.
이어지는 8-15절은 형벌(형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 109:8–15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잔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죄에 마땅한 형벌이 나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살인한 자에게 사형이 선고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악인은 이 땅에 오래 살면서 그 악의 영향력을 키워서는 안된다. 그의 죄는 이미 그 자녀와 아내에게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다윗은 그 모든 영향력이 사라지기를 구하고 있다.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셔야 하고, 그래서 그에 대한 기억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이런 악을 행한 자에 합당한 형벌이라는 것이다.
앞서 읽었던 신명기 말씀이 이 형벌의 근거가 된다. 신명기 말씀은 악인이 계획한 대로 그에게 형벌을 내려야 하고 긍휼을 보이지 말 것을 말했다. 다윗이 말하는 악인의 죄는 이렇다.
시 109:16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이것이 그들의 죄다. 이들은 보호 받아야 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핍박하여 그들을 죽이려 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인자하심은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익을 위해, 쾌락을 위해, 기쁨을 위해, 약자를 괴롭힐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유죄이며 그에 합당한 형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 다윗의 고소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은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임을 호소한다.
시 109:17–20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악한 자들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을 보응하시는 것임을 강조하며 다윗은 대적들에 대한 고소를 마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저주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비방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구할 수 있다. 그 간구가 21절부터 이어진다.
간구(21-29절)
다윗이 구하는 것은 구원이다.(21절, “건지소서”; 26절, “구원하소서”). 지금 하나님의 공의가 바르게 선포되고 있지 않은 이 상황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의 대적들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의 대적들이 즐거워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상황이 역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면서 두 가지 이유 혹은 기초를 제시한다. 하나는 자신의 괴로움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명성, 영광)이다.
시 109:21–29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22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23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24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25나는 또 그들의 비방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26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27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28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29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모든 상황들, 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불합리하고 공의롭지 못한 일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지 않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다른 나라들에게도 하나님을 비방할 거리를 주는 일이 된다.
그래서 다윗은 가장 먼저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형식상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정말로 다윗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이 그의 힘이 아닌 “주의 손으로 하신 일인 줄”을 알게 해달라고도 구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구원을 얻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도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면서 다윗은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한다(22-25절). 그는 마음이 가난하고 궁핍하게 되었다. 마음 중심이 상했다. 석양 그림자처럼, 손으로 툭 치면 떨어져 나가는 메뚜기처럼, 삶의 끝을 향해 가는 것만 같았다. 그의 기도에는 금식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육체가 쇠약해졌고, 사람들은 그런 다윗을 비방하며 조롱했다.
이런 기도가 다윗의 정직함을 엿볼 수 있는 기도다. 다윗은 ‘하나님, 저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중요합니다.’라고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한 것을 알고 그것을 가장 먼저, 그리고 결론에서도 언급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괴로움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괴롭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영광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를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어떤 재료처럼 이용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신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괴로움을 구원을 구하는 기도의 이유로 주저없이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죄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하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내 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할 때도 같은 기도를 드릴 수는 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 괴롭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내 죄로 인한 괴로움의 경우 하나님 앞에서 죄스러운 마음으로 인한 주저함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여기 다윗처럼 까닭없이 이런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는 주저함 없이 이런 상황을 아뢸 수 있다. 물론 그 경우도 여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해야 한다. 우리에게 마땅한 은혜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나를 대적하는 자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할 수 있는 기도다.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선을 베풀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공의를 나타내셔서 나의 괴로움을 끝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에 우리는 확신의 찬송을 더할 수 있다.
찬송(30-31절)
시 109:30–31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31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탄원, 저주, 간구가 언젠가는 감사와 찬송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의 대적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른쪽에 서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 구원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다. 그 구원이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함 때문에,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에게 현실이 되었음을 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다. 그때까지 우리는 사랑으로 행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도전
스데반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사랑과 기도가 헛되지 않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었던 사람이다. 그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이를 갈고 죽이려고 했다. 그 때 스데반은 하늘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편이시며 이제 곧 그를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스데반은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선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이 되신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십자가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는 이 구원의 소망이 더욱 선명하다.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다. 그런 우리 곁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 때와 방법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괴로움 가운데 기도할 수 있다. 사랑으로 순종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오른쪽에 서셔서 나의 모든 대적에게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될 것이다. 그 굳건한 소망으로 우리가 괴로울지라도 두려움 없이 오늘을 살아가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