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끝까지 신실하게

본문 :  시 71편

설교자 : 최종혁

 

이 시편은 하나의 기도이고 매우 개인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내용의 시편들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뒷부분에 가면 “우리”나 “너희”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공동체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71편은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로 되어 있다. 20절만 “우리”가 사용되어서 예외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이 역시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우리가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와 같은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일부 사본은 20절도 우리가 아닌 나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전체적인 맥락이 개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개인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지난 시편 설교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시편 70편과 71편은 하나의 시편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71편의 개인은 다윗일 것이다. 내용을 봐도 다윗이 자주 사용했던 표현이 보인다. 하나님을 바위, 반석, 요새 등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께 피한다는 표현이 그렇다. 대적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상황도 그렇다. 또한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표현도(22절) 다윗에게 잘 어울린다. 여기에 추가로 71편에는 다윗의 시편인 22, 31, 35, 38편 등에서 인용한 표현들도 있다. 따라서 다윗의 시편으로 보기에 무리는 없다.

하지만 이런 특징들이 꼭 다윗을 저자로 지목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의 시편에 익숙했던 사람이 자신의 말로 해당 시편을 인용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시편 71편은 다른 시편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 조금씩 내용이 바뀌어있다.

저자가 다윗이든 다른 누군가이든, 중요한 것은 이 저자는 매우 개인적인 기도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마치 오랜 친구에게 말하듯, 혹은 종이 자신이 평생 충성을 다해 섬겨온 오랜 주인에게 말하듯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과 이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말할 정도로 오래되었다.

시 71:5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시 71: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9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시 71:17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시 71: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나이를 먹지만, 자신이 점점 쇠약해지고 늙어간다고 느끼는 나이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20-30대는 좀 이르고 최소한 40-50대는 되어야 한다. 물론, 요즘에는 어린 학생들도 나이 먹는게 싫다는 표현들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좀 다른 의미다. 아마 시편 71편의 저자는 삶의 끝을 생각할 그런 나이에 이 시편을 기록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지금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어려서부터 함께 해 온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시편 71편이다. 그래서 이 시편은 신실한 노년의 시편이고, 그렇게 노년을 준비하는 중장년의 시편이다. 물론 지금 나이에 관계없이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를 위한 시편이기도 하다.

이 시편은 앞서 읽은 말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간적인 요소가 잘 드러나있고, 그에 따라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미래를 소망하는 가운데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이다. 5, 14절의 소망에 대한 말씀을 기준으로 전체 시편을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현재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계속해서 나오지만, 1-4절에서 먼저 언급되고 그리고 5-13절에서는 과거를, 14-24절에서는 미래를 바라본다.

현재: 기도_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함(1-4절)

시편에서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의 시편을 많이 만난다. 아마 우리 삶에는 고난이 많고 외부의 고난이 없으면 스스로 고난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항상 고난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고난이 없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에 관한 많은 시편들은 우리 삶의 다양한 고난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주고 결국은 우리가 그런 가운데 어떻게 예배자로서 살 수 있는지를 반복해서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살펴볼 시편 71편도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시편이다.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2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3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1-3절)

여기까지 시편을 읽다보면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표현들이 등장한다. 특히 이 부분은 시편 31편의 초반부를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먼저 시편기자는 이 기도를 통해 구하는 바를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께 피하니, 하나님은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인 것이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2절에서 여러 다른 표현으로 반복된다. “건져주소서, 풀어주소서, 귀를 기울이시고 구원하소서.” 3절에시도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라고 구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한가지는 시편 기자가 당위성에 기초해서 이렇게 구한다는 점이다. 2절을 보면 “주의 의”로 나를 건져달라고 한다. 구원을 구할 때는 주로 “주의 자비”에 호소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3절에서는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떤 직접적인 계시가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마땅히 자신을 구원해주셔야 함을 강조한 것일 수도 있다.

시 91: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이와 같은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마땅히 자신을 구해주셔야함을 강조했을 수 있는 것이다. 고난 중에서 크게 탄식하는 요소가 강조된 시편도 있지만, 이 시편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큰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감을 가지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지금 어떤 고난 가운데 있었을까?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4절)

무엇으로부터 피하는 것인지, 무엇으로부터 구원해달라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현들이 여기 나온다. “악인, 불의한 자, 흉악한 자”다. 이들은 시편 기자를 대적하고 모해한다(13절). 또한 20절을 보면 이들은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시편 기자의 삶에 가지고 왔다는 것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런데 핵심은 10-11절에 있다.

“10 내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내 영혼을 엿보는 자들이 서로 꾀하여 11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10-11절)

지금 시편 기자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 상황은 그의 대적들에게 그를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시편 기자의 상황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이렇게 모함을 할 수도 있겠지만, 9절이나 18절과 같은 말씀을 생각해 보면 대적들은 시편 기자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럴만한 상황은 많다. 나이가 들고 힘이 쇠약해지는 것을 언급한 것을 보면 시편 기자가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질병에 걸렸을 수도 있다.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압살롬에게 쫓겨나 도망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셨다고 이야기했을 수 있다. 예레미야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의 선지적 사역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협박하고 때리고 웅덩이에 가두고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버리셨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삭을 가지기 전 아브라함도 그런 상황에 있었다. 사자굴에 던져지기 직전의 다니엘이나 풀무불 앞의 세 친구들도 그런 상황에 있었다. 유대인을 몰살하라는 왕의 조서가 내려왔을 때의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너희를 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우리 삶에서 뜻하지 않은 고난을 만날 때 그렇다. 질병이나 가정 내 어려움, 직장, 사업 문제 등 여러가지 심각한 고난들을 만날 때 그렇다(20절).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역사하지 않으셔서 그럴 때도 있다. 세상은 달라지는 것이 없고 교회는 세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말씀에 따라서 산다고 살았는데, 변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젊을 때는 그런 고난이 그저 과정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여기 시편 기자처럼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만나는 큰 고난은 삶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것이 모두 거짓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더 큰 좌절과 절망, 무기력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다. 큰 확신 가운데 그렇게 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그래서 5절부터는 하나님이 소망이시라는 사실을 과거의 경험으로 확신하고, 14절부터는 하나님이 소망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미래를 기대한다. 이런 확신과 기대 속에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과거: 확신_어릴 때부터 신뢰한 소망의 하나님(5-13절)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5절)

시편 기자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했다. 그는 아마 신앙 공동체 안에서 태어났겠지만, 그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 정도의 신앙에 그치지 않았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소망”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나의 소망”이셨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6절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6절)

누구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를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배에서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편 기자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기 전부터 이미 그를 알고 계셨고 그를 붙드셨다는 사실이다. 그가 기억하는한,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신뢰했고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인간인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일 뿐, 하나님은 그보다 더 오래 그를 붙들고 지켜오신 것이다. 그가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다. 사실 그 전부터 그의 존재를 하나님은 계획하셨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여기서 밝힌다.

시편 기자는 그런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7절)

이상한 징조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다.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 특이하게 보이는 것, 놀라움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아마 둘 다 포함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일들을 경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의 실패와 고난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금 시편 71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를 조롱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말했을 것이다. 또한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시는 것을 보면서는 다시 놀라워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삶이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했겠지만, 그 모든 삶의 경험과 여정을 통해 시편 기자가 배운 것은 하나님이 그의 견고한 피난처시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8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8절)

6절에서처럼 여기서도 종일토록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삶이 결국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결과이고 따라서 모든 찬송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소망의 확신 가운데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9절)

지금까지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같이 여김을 받으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 10-11절에서 밝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제는 하나님이 시편 기자를 버리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이전에도 겪었겠지만, 여러 번 겪는다고 해서 고난이 쉬워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지금은 육체적으로도 쇠약해져있는 상태다.

육체적인 쇠약은 정신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영향을 준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확신은 가지고 있지만, 순간순간 진짜 하나님이 나를 버리거나 떠나신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만약 다윗이 이 시편의 저자라면 사울이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사울은 시작은 좋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났던 것을 다윗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도 혹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시지는 않을까 염려했었다. 그래서 그는 범죄한 후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했었다(시 51:11).

현재의 상황을 보면 이런 불안함이 있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알기 전부터 붙드신 분이심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12절에서 이렇게 또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2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때의 결과는 이렇게 묘사한다.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이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들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13절)

이것은 명백한 결과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했고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반대로 그의 대적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이 상황에 개입하시면, 둘 중에 수치를 당할 사람은 대적들이 분명하다. 그들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누가 수치를 당할 것인가는 시편 71편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1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라고 구했고 24절에서는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여기 13절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라는 것은 그저 자존심이 상하고 좀 부끄러운 정도를 넘어선다. 누구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가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기자는 마치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맞섰던 엘리야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만약에 불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아무리 좋게 봐도 바알과 같은 신 정도로 밖에 보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야의 수치이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수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상황에 개입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5-13절을 정리하면 이렇다.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의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로서 신뢰할 만한 분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지금 그는 쇠약해져 있지만, 지금도 그에 대한 확신은 분명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의를 나타내시고 그를 구하셔서 자신의 수치 뿐 아니라 하나님의 수치를 벗을 수 있기를,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구한다.

이어지는 14절부터 말씀에서는 이런 기대를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미래: 기대_더욱더욱 찬송할 소망의 하나님(14-24절)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14절)

다시 하나님께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더욱더욱 하나님을 찬송하겠다는 다짐을 말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시편 기자는 평생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더욱 그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찬송의 내용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이다.

“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16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15-16절)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는 거의 같의 의미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시는 것이 곧 시편 기자의 구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행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가지고 오겠사오며”라고 표현했는데, 예배의 자리에 가지고 와서 선포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간증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이상한 징조, 이 경우에는 긍정적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그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런 부푼 기대를 가지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다시 기도한다.

“17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17-18절)

시편 기자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신뢰해 왔고, 그가 배우고 경험한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선포해왔다. 그리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하심을, 능하신 하나님을 그의 후대에, 장래의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순수한 동기다. 그는 단순히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 힘들기 때문에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정말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젊은 날 할만큼 했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늙어 백발이 되어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끝까지 신실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 잘 알고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19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20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19-20절)

하나님같이 의로우신 분, 하나님같이 큰 일을 행하시는 분이 없다. 아무도 주와 같지 않다. 심지어 고난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사실 하나님께서 지금 시편 기자를 구원하시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서 이 땅에서 찬송 받으시지 못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이렇게 구한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21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때 그 삶의 모든 퍼즐이 맞춰지고, 시편 기자는 정말로 마음껏, 거침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2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24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22-24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궁극적인 결과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 우리는 기뻐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욱더욱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도전

나이가 들어 가면서 좋은 점이 있을까? 노인이 대접을 받던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지금은 모두가 젊음을 원한다. 버스에서 누가 자리를 양보하면 오히려 기분이 안좋다. 최대한 젊어보이려고 노력한다. 간단한 미용을 넘어서 수술까지 해가면서 젊어보이려 한다. 같은 말을 해도 나이든 사람이 말하면 꼰대가 된다. 젊은 사람의 욕심은 비전이지만 노인의 욕심은 노욕이다. 그나마 뭐를 원하는 것도 줄어든다.

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느릿느릿 움직인다. 생각도 느리다. 소화력도 떨어지고 밤에 잠도 잘 못잔다. 20년전 일은 어제같이 생생한데, 어제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이 있을까? 오늘 시편을 보면 분명히 좋은 점이 있다. 그 시간만큼 하나님과 더 오래 함께 했다는 좋은 점이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오래 경험했고 하나님의 구원을 더 오래 맛보았다. 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과거보다 덜할지 몰라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리스도인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 세월만큼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할 말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우리가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되고 원하는 것도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시편 71편의 저자처럼 우리는 나이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해야 한다. 항상 그렇게 하기를 원해야 한다. 종일토록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해야 한다. 더욱더욱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가 삶의 끝까지 신실하게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항상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전처럼 일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여러 면에서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여 더 많이 찬송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끝까지 신실하게 사는 방법이다.

이렇게 끝까지 신실하게 산 삶은 수치를 당할 수 없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우리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함께 찬송하며 살아가자. 우리의 주변에,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그렇게 사는 삶이 정말 가치 있는 삶임을 증명하며 살아가자. 끝까지 신실하게 살고, 끝까지 신실하게 할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