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대를 현실로 바꾸는 믿음
본문 : 시편 56편
설교자 : 최종혁
I. 현실과 기대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1절)
1절에서 다윗은 이 시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대조를 말한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다. 다윗은 사람이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일(현실)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셨으면 하는 일(기대)을 언급한다. 이 둘이 1절 뿐 아니라 이 시편 전체에서 대조되어 이 시편을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 먼저 이 대조에 대해서 살펴보자.
현실 – 사람들이 내게 하는 일
1절에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다윗을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는 일을 했다. 다윗을 짓밟아 부수어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고 했다는 말이다. 다윗은 ‘종일’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이런 일이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한다(1, 2, 5절). 정말 문자적으로 그들이 24시간 동안 그렇게 했다는 표현은 아니겠지만, 다윗이 볼 때 그들은 종일 다윗을 해할 생각만하고 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2절도 1절의 내용을 반복하며 상황을 강조한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2절)
이번에는 ‘사람’ 대신에 ‘원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문자적으로는 “나를 지켜보고 있는 자”다. 6절에서 이 단어가 설명된다.
“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6절)
좋은 의도를 가지고 다윗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까지 주시하면서 그를 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전부터 계속해서 그럴 기회를 찾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5절)
이들은 다윗의 말을 왜곡했고 어떻게든 다윗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고 그를 무너뜨리려는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했다. 1, 2절에서 다윗이 사용한 다양한 표현들(“삼키다(짓밟다)”, “치다”, “압제하다”)과 5-6절에서 묘사하는 이들의 의도와 모습은 다윗의 원수들이 정말 결심하고 다윗을 해하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절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웠다(3절). 이런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혹은 다수가 나를 해하기위해 결심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기회를 엿보고 있고 또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시편의 표제는 이 상황을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라고 알려준다.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사건이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본격적으로 도망을 시작한 때다. 이미 그전부터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윗이 백성들의 인기와 신임을 얻자 사울은 위기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로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직접적으로 명령했다(삼상 19:1). 하지만 다윗을 좋아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중재로 다윗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사울은 여전히 다윗을 죽여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도 했었다. 요나단은 여전히 다윗의 편에 서서 다윗을 옹호했지만, 사울이 그런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하자 결국 요나단도 사울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다윗을 도망하게 도왔다.
다윗이 처음 사울에게서 도망하여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로 갔을 때. 성경은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도망했다고 말한다(삼상 21:10). 다윗은 매우 급하게 도망한 상태였고, 그와 함께 한 사람도 적었다. 무기도 없어서 중간에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얻은 무기도 하필 골리앗의 칼이었다. 사람들이 몰라보기를 바랐겠지만, 사람들은 똑똑히 다윗을 기억하고 있었다(삼상 21:11).
이에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했다(삼상 21:12). 그리고 미친 체를 하여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윗이 블레셋인에게 잡혀 있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장면이다.
사울의 심복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수많은 공로를 세웠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다윗이었다. 그리고 그의 편에는 든든한 친구 요나단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요나단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해줄 수 없었고 지금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찬양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그에게 복수심만 가지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최악은 사울이 결심하고 그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인해 다윗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두려운 현실이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으려할 때 다윗은 하나님께로도 시선을 돌린다.
기대 – 하나님이 내게 하실 일
다시 1절의 시작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 모습으로 드러난다. 공의로운 심판과 구원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7절)
첫부분은 언뜻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는데, “그들이 악을 행하고도 안전하겠느냐”는 수사적인 의문이다. 즉, 악을 행하고 아무렇지 않게 평안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나타내셔서 그들을 낮추시는 것을 다윗은 기대하고 있다. 교만하게 자신의 힘을 믿으며 경건한 자를 공격하는 자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개입하셔서 그들을 멸하시고 더 이상 그런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간구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낮추시면 다윗의 생명을 찾던 원수들은 물러갈 것이고(9절),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신 것이다(13절).
하지만 다윗은 결과로서의 구원 뿐 아니라 그로 가는 과정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을 기대한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8절)
“유리함”은 거처가 없이 방황하는 것을 의미하고 “계수하다”는 것은 우리식 표현으로 바꾸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다”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이런 고난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지만 또한 그것을 반드시 기억해 달라고 구한다. 그 일들을 주의 책에 기록하실 뿐 아니라 내가 흘린 이 고통의 눈물도 주의 병에 잘 담아 보관하여서 기억하고 보상하여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대조를 정리해보자. 하나님과 사람이 대조된다. 사람은 다윗을 두렵게 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사람은 지금 다윗의 눈 앞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현실인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 볼 수 없다. 다만 기대를 가질 뿐이다. 다윗 앞에 두렵게 하는 사람과 은혜 베푸실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도 이런 상황을 자주 경험한다. 어쩌면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 사람과 하나님, 현실과 기대 사이에서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있다. “두려워하는 날”은 우리에게 항상 있고, 그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III. 믿음
다윗의 선택은 이렇다.
하나님을 의지함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3절)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말 번역에서도 “내가”가 반복되어 강조되는 것처럼 히브리어도 그렇다. 누구든 두려워할 수 있는 그런 상황, 나도 두려워하는 그런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하나님을 믿기를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강조한다(4, 10. 11절).
앞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다윗에게 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정말 두려운 일이다. 그런 두려운 날에는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도 못할 때가 많다. 두려우니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니까 아무 것도 못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두려움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기대는 것이다.
기초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한 어떤 일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떻게 반응하셔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에 기대고 그분의 공의로우신 성품에 기대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시편에서 다윗은 3번이나 “그 말씀을 찬송하리라”(4, 10절)고 말한다는 것이다. 찬송은 ‘자랑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랑한다는 말이다. 어떤 말씀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에 특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그 말씀을 찬송하는 것을 함께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에 확신을 주는 말씀이라고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을 때, 그가 왕이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예언의 말씀을 들었을 수 있다. 혹은 그가 알고 있던 모세오경 중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언약의 말씀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모든 말씀들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인지 우리가 특정할 수는 없지만, 다윗은 말씀에 따라 더욱 확고한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대를 더욱 분명한 확신으로 이끈다.
결과
이렇게 기대가 확신이 될 때, 현실은 달라진다. 나를 두렵게 하는 사람만 있었던 현실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으로 개입하시게 될 때 우리의 현실이 달라지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4절)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11절)
하나님을 의지할 때, 두려웠던 현실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두려워하는 날”(3절)이었던 오늘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아뢰는 날”(9절)이 되었을 때 두려워할 이유는 사라졌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두렵게 하는 사람과 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9절).
여기서 우리가 처음에 나눴던 대조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이다. 둘은 다윗에 대해서 하는 일도 달랐지만, 더 근본적으로 존재 자체가 다르다. 다윗은 사람을 ‘혈육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사야에 기록된 것처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사 40:6). 야고보는 인생에 대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했다(약 4:14).
아무리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그 생명에 있어서 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시 102:26-27 [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렘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단 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나를 두렵게 하는 자가 설령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최대한 할 수 있는 것은 이땅에서의 목숨을 빼앗는 것 뿐이다. 그는 혈육을 가진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정말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달라져야 한다. 우리의 기대가 우리의 믿음으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 현실에도 두려움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도 혈육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사람, 두렵게 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살지는 않을 수 있다. 두렵지만 두려워하며 살지는 않는 것이다. 그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자랑하며 살 수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두려워할 일이 없으면 믿을 일도 없을 것이다. 이땅에서 우리는 이런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것이 이 모든 두려운 날의 목적이다.
목적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2-13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는 언제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여기 다윗도 그것을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하는 것,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빛에 거하며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것이 간구의 목적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하시는 목적이 그것임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되어야 한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여기 다윗처럼 직접적으로 나를 해하려는 사람의 위협이 있을 수 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가계, 경제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두려움 등 혈육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을 현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그의 현실에 개입하시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섬기며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도전
어린 아이들이 (혹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하는 질문 중 하나는 ‘뭐랑 뭐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누가 더 강해요?’와 같은 질문이다. 사자하고 호랑이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요? 장수풍뎅이하고 사슴벌레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요? 가끔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다. 아빠랑 사자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가 그렇다.
이 시편에서 다윗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사람하고 하나님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누가 이길까? 당연히 하나님이 이긴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처럼 산다. 하나님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하나님이 지금 내 상황에는 관여하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서 그런다. 어떤 이유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최소한 나의 현실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다.
믿음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바꾼다. 믿음이 이 능하신 하나님, 강하신 하나님, 우리를 돌보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현실에서 바르게 드러낸다.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도 있는 현실에서 믿음으로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갈 때 그렇다.
여전히 우리에게 그것에 쉽지 않다. 우리가 혈육을 가진 사람이어서 그렇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장 중요한 현실로 느끼는 사람들이어서 그렇다. 그럴 때 그냥 괜찮을거야, 시간이 다 해결할거야, 뭐 어쩌겠어라는 생각만 하지 말고, 말씀에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말씀하고 계신지 묵상해 보라. 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라.
롬 8:3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