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1)
본문: 시편 118편
설교자: 최종혁
이 시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 사람의 노래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내용을 고려해보면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사용된 표현을 보면 다윗의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저자를 다윗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특정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는 없다. 따라서 이 시편은 작자 미상으로 두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다윗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시편 118편의 저자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5절). 10-12절에는 “에워쌌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완전히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어디로도 도망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를 넓은 곳에 세우셨다(5절).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곳에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셨다(13절). 그를 구원하셨다(14절). 이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분명했다(23절).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시 118:2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 118:28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시편 118편 전체가 바로 이 감사의 노래다. 그에게 나타난 것은 14-1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그 능력을 통해 정말로 드러난 것, 그리고 시편 기자가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다. 당연히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몰랐다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이 시편으로 노래하기 전에도 수 없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했을 것이다. 다른 시편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노래는 많다. 특히나 너무나 많이 들어온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절기마다 노래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들어서 지식으로 아는 것과 경험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이 노래는 그 인자하심을 경험한 사람의 노래다. 그가 들어서 알고 있던 과거의 하나님을 지금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나서 드리는 감사와 확신의 노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해야함을 강조한다.
이 사람의 노래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가 되었다. 시편 118편은 시편 110편과 함께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 말씀 중 하나다. 시편 110편은 그 자체로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면, 시편 118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 사람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그 안에 매우 중요한 메시아에 대한 그림자를 담고 있고 신약에 가서 그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은 시편 118:25-26의 말씀을 인용하여 소리치며 예수님을 환영했었다(마 21:9; 막 11:9-10; 눅 19:38; 요 12:13).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이것으로 시편의 말씀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님은 그렇게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며 안타까워 하시면서 다시 같은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눅 13:35; 마 23:39).
마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비로소 제대로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예상 밖의 일은 아니었다. 시편 118:22-23은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함축적이며 비유적으로 묘사했다.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거절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시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경고하셨는데, 그 때 인용하셨던 말씀이 바로 시편 118:22-23절이었다.
마 21:42–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같은 말씀으로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그들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음을 공언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셔서 유일한 구원의 이름이 되게 하셨음을 선포했다.
행 4:10–12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7에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했다. 바울도 에베소서 2:20에서 같은 말을 했다.
113편부터 이어진 애굽 할렐의 마지막 노래인 이 시편 118편을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식사 후 제자들과 함께 부르시고 십자가로 향하셨다. 이 노래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이 노래를 성취하기 위한 길을 가셨던 것이다.
시편 118편은 오늘날 우리의 노래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믿는 모든 자들에게 궁극적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게 하셨고, 그들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유월적 저녁에 예수님께서 이 노래를 제자들과 함께 하셨을 때 앞서 언급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적인 말씀만 노래하셨던 것이 아니라 이 시편 전부를 예수님은 노래하셨다.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노래하셨고 여호와께서 내 편이시라고 노래하셨다(7절). 여호와는 나의 능력이며 찬송이시며 구원이 되셨다고 노래하셨다(14절).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다고 노래하셨다(27절).
십자가 자체만을 생각해 본다면 이 내용들은 예수님께 적용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실만큼,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 받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조롱했지만(마 27:43),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원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믿겠다고 말했지만(마 27:42),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편에 계시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께 모든 진노를 쏟으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에 대신 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이 노래를 부르셨고, 이 노래를 성취하셔서, 우리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셨다. 그래서 시편 118편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노래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출애굽에서 끝나지 않았고, 시편 118편의 기자에게서 끝나지도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궁극적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났다. 그러니,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찬양하라는 것이 시편 118편의 궁극적인 메시지다.
이런 면에서 시편 118편은 113편부터 이어진 애굽 할렐 모음집의 마무리로 매우 적합하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는 절기에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핵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선포하는 시편이 118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심으로서 오직 하나님 만이 살아계신 신이심을 증명하고 선포하셨다. 하지만 단순히 하나님은 자기 힘을 과시하시려고 그 모든 일을 하셨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었다. 물론 출애굽 후에 공식적인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그 전부터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민족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 인자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핵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출애굽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계속되기 때문이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합당한 반응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선포하는 것이다.
시편 118편의 전체 구성은 이 핵심 메시지를 따른다. 시작(1-4절)과 끝(29절)은 동일하게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에 감사하라고 명한다. 그리고 그 중간인 5-28절은 실제로 자신이 경험한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다.
명령(1-4, 29절)
시 118:1–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3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시 118:29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절과 29절은 정확히 동일하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인 “선하심”을 언급하고 그 중 특별히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강조한다. 2-4절은 선하심은 언급하지 않고 “인자하심이 영원함”만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고, 이 선하심이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사랑’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만큼,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보여주실 때, 바로 이런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말씀하셨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긍휼 혹은 자비는 하나님께서 비참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이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나타내시는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시는 사랑은 인내(“노하기를 더디하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사랑은 인자다. 이런 사랑의 모습이 상호배타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의 어느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1절과 29절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속성인 ‘선하심’ 중에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사랑인 ‘인자하심’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명한다고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찰스 스펄전, <시편 강해 9권 상>, 420, “선하심은 그분의 본질이요 성품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분에게서 무엇을 받든지 받지 않든지 간에 항상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하는 자들은, 한 단계 더 차원을 높여 그분이 선하시다는 이유 때문에 그분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 그분의 섭리는 다양할 수 있지만, 그분의 성품은 항상 동일하고 항상 선하시다. 그분의 섭리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분은 이제까지 선하셨고 앞으로도 선하실 것이며 또한 지금도 선하시다. 그러므로 바로 이 순간에, 설령 하늘이 구름에 가리워 어둡다고 할지라도, 그분께 감사하자.”
정말 맞는 말이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꼭 기억해야할 진리다. 욥과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며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할 뿐 아니라(욥 1:21), 하나님의 선하심도 인정하며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인자하심을 나타내셔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 알고 경험하게 하셨다. 천사를 포함한 다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피조물들은 인간의 죄와 함께 타락하여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다(롬 8:20). 하지만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하늘과 땅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불 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될 것이다(벧후 3:10; 계 21:1). 타락한 천사들은 전부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벧후 2:4; 유 1:6). 그들 중 단 하나도 구원 받지 못한다. 베드로는 천사들이 구원에 대해서 살펴 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벧전 1:12). 그들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을 나타내신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했던 가장 크고 놀라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나도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 49:14–16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어머니는 자식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어머니다. 나이가 들어서 자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되는 상황이 되어도 여전히 자녀의 안위를 걱정한다. 자녀가 남들에게 어떤 비난을 받고 무시를 당해도, 어머니는 자녀를 기뻐하고 그를 버리지 않는다. 그게 어머니다. 하나님은 그런 어머니가 자녀를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신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우리는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어두곤 하는데, 하나님은 아예 이스라엘의 이름을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두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절대 잊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또한 마치 종의 몸에 주인이 자기 이름을 새겨서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하나님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런 이스라엘이 최후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도 거절했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끝나지 않았다.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인자하심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바로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성경의 명제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예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면 우리는 “영원”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너무 심하게 배신하지 않는 한’ 혹은 ‘하나님이 참을 수 있는 한’ 정도가 “영원”의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정말로 영원하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인자하심은 모든 환경과 장애를 압도할 뿐 아니라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모든 사랑을 변함없이 베푸신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어서 특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특혜를 입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똑같이 우리 교회를 선택하셨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살후 2: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에게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사용된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하나님은 교회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인자하심을 나타내신다.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 사건이 항상 그 사실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 교회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렇다.
롬 8:31–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교회에게도 영원한 인자하심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다른 피조물도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한다.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해주신 사랑 뿐 아니라, 우리 삶에 계속해서 부어주시는 사랑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꼭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습은 아닐 수 있다. 지난 주에 배웠던 바울의 육체의 가시와 같은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바울의 삶에 있었던 것이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만 그로 인해 바울이 믿음을 버리거나 사역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에게 있었다. 오히려 그 가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에게 있었다. 가시가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울은 경험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에게는 기쁨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삶에서 만나는 고난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항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렇게 고통스럽게만(?)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원하는 바를 그대로 이뤄주기도 하신다.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꿈을 이뤄주기도 하시고, 될까 싶었던 일을 되게 해주기도 하신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시편 기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다음 주에 이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5-28절).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끝으로 주목할 부분은 2-4절에서 강조하는 부분이다.
시 118:2–4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3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계속 말한 것처럼 인자하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2-4절은 그래서 이스라엘, 아론의 집,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부르면서 그들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말할 것을 명령한다.
이스라엘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고, 아론의 집은 특별히 제사장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표현이다. 즉, 시편 118편이 기록될 당시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 언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2-4절의 시작에서 반복되는 “이제”는 일종의 감탄사로서 명령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즉 “말하라”는 명령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품는 것이 먼저 중요하겠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표현해야할 것, 즉 말해야할 것을 반복하며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순종해야 할 명령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그 인자하심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우리 삶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다.
첫째로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내 삶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어떤 것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지만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혹은 더 나아가서 ‘이런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면 난 원하지 않아’와 같은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항상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그 감사를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를 말한다면 그것이 예배다. 다른 성도에게 감사를 말한다면 그것이 교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감사를 말한다면 그것이 전도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하나님께 말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말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할 필요는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만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게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사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않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할 말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과 교회, 혹은 우리 삶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이 그렇다. 교회 때문에 힘들다는 말만 만날 때마다 한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교회나 하나님을 좋게 생각할 수 없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가정 안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가정은 편하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말하기 쉬운데, 그렇게 한 말들이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가족들에게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서 구원의 장애물이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식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진실되게 살아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그 사실을 말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지금 우리 삶에 있기 때문이다. 그 인자하심을 노래할 수 있게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언제나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