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4
본문: 시편 103편
설교자: 최종혁
이제 다윗은 개인의 송축에서 공동체의 송축으로 관점을 옮긴다. 1-5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함께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합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함께 기억하고 예배합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개인의 송축에서 다윗은 결국 죄와 죄의 결과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풍성한 삶, 즉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삶의 은택을 기억하고 감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공동체의 송축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공동체 송축(6-18절)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앞서 개인의 송축처럼 여기서도 다윗은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시의 결론 부분을 보면 모든 피조물이 여호와를 송축해야할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 좀 더 일반화된 표현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주권자(왕)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행하시는가에 주목하여 자연스럽게 모든 피조물이 마땅히 여호와를 예배해야함을 강조한다.
시 103: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일을 하시고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주로 심판과 연결되어 있고 여기서도 그렇지만, 언제나 심판의 이면에는 구원이 있다. 여기서도 구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구원이 더 강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이라고 말하지 않고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한 심판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억압 당하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기에 그들에게는 구원을 의미한다.
“억압”은 죄의 결과로 생겨난 ‘힘의 오용’이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은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될 때 그런 차이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알게 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섬길 수 있는 힘이 된다. 하지만 죄는 그런 차이를 남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무력이 되게 했고, 그 결과가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미워하시지만, 이렇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죄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렇게 하신다.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했다(약 2:13). 억압은 마치 요리하라고 칼을 주니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마치 그런 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잠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중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들에게는 항상 억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약자들을 돌볼 것을 반복적으로 명하셨다. 이스라엘은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했고, 나그네를 돌봐야 했다. 추수를 해도 이런 자들을 위해 일부러 남겨두어야 했다. 품꾼에게 지불할 삯을 미루면 안됐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주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전당물을 취하면 안됐고, 만약 그가 가난한 자라면 전당물을 반드시 밤이 되기 전에 돌려주어야 했다.
이렇게 긍휼을 바탕에 둔 공의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서 그렇게 행하셨기에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위에서 말한 약자들을 돌보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 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을 언급하신 부분이다.
신 24: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하나님은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억압 당하는 자를 위해 심판하시는 분이심은 여러 방법으로 드러났지만, 출애굽 사건이 이를 극적으로 드러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되어 억압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애굽에게 공의를 행하셔서 애굽을 심판하셨다. 이 공의와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러낸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하심이었다.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 103:7–8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8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리고 계속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바로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8절 말씀은 출애굽기 34:6에서 인용된 말씀이다. 이 말씀의 배경은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언약의 말씀을 하나님께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면서 그것이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해 낸 신이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시면서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하셨는데,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중재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라고 구했는데(출 33:13), 모세가 말한 “주의 길”과 여기 시편 103:7의 “그의 행위”가 같은 단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세에게 드러내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바로 8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긍휼, 은혜, 인내, 인자가 풍성하신 분이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좋으신 분이시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본질적인 선하심에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드러나고 다르게 불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이 사실을 드러내셨다.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손으로 덮으셨다가 지나가는 하나님의 등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선하심을 선포하셨고, 모세는 즉시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었다. 모세는 아마 인간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특권을 누린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계속해서 드러났고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행하셨다.
시 103:9–10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시 103:12–13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 말씀은 분명 ‘우리의 죄악’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지 않았다. 아니, 완벽하지 않았다는 말은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름 괜찮았다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엉망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애굽에서 탈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들은 불평했다. 많은 사람이 메마른 땅을 이동하는 것이 당연히 힘든 일이지만, 그들은 방금 경험했던 하나님을 잊은 듯이 물이 없다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었다. 그리고 이 일은 광야 길을 가는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금송아지 사건은 어떤가.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시내산에 늦게 내려오자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한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출 32:1). 모세는 왜 늦게 내려왔을까?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위해 성막에 대해서 모세에게 자세하게 말씀해주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은 그 백성과 함께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실 때, 백성들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신랑이 미래를 생각하며 신부와 함께 살 집을 알아 보고 왔는데, 신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했다.
어찌저찌하여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둔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어떠했는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 통곡하며 하나님께 원망했다. 그들은 차라리 애굽에서 죽거나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말했고, 다른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정탐꾼들이 죽자, 그 때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가나안 땅으로 싸우러 올라가기도 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 사사 시대는 그야말로 불순종의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점점 더 그들의 죄악은 악해졌다. 이스라엘은 영적인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듯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났다. 그것이 그들의 역사였다.
그럼,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기도 하셨고 벌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이 시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매번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진노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그들의 죄에 따라서 그들을 벌하셨다면, 그들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말했는데(애 3:22),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금송아지 사건 때도 그랬고 가데스 바네아 사건 때도 그랬고, 하나님은 실제로 그들을 멸하겠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하신다고 해도 그것이 과한 형벌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셨다. 심지어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멀리 옮기셨다. 무한한 거리에 두신 것이다. 용서하신 죄를 더 이상 그들과 연관짓지 않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용서한 죄도 다시 끄집어내서 정죄하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하셨다. 조건 없이, 이유 없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희생적인 사랑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다윗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긍휼은 그 이상이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람의 긍휼은 사실 한계가 있다. 부모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은 한계가 없는 긍휼을 베푸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이다.
이스라엘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아니다.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던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는가?
시 103: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 언약에 신실한 사랑)이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이다. 이 크기에도 한계가 없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은 감사하지도 않고 남편을 떠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음녀 고멜과 같았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사랑의 언약 관계다. 결혼 언약과 같다. 서로 그 언약을 지켜야 하고, 어느 한쪽이 언약을 깬다면 다른 한쪽도 언약을 지킬 의무에서 자유롭게 된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간음을 이혼의 합법한 사유로 말씀하신 이유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계속되는 영적 간음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언약을 깬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도 그 언약을 지킬 의무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무한해서, 몇 번이고 이스라엘을 찾아오고 구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신 둘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체질을 아신다”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바로 그들을 먼지(흙)로 만드신 분이시다.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아신다. 우리도 어린 아이가 어른과 같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는 장난감이나 먹을 것을 빼앗기면 울고 서러워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이가 그럴 때 우리는 이해해줄 수 있고 다독여 줄 수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럴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차분히 얘기해줄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이 그렇게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른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잘 아신다. 하나님이 그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연약함을 잘 아신다. 물론 그것이 죄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이유는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연약함을 핑계로 죄의 경중을 논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런 면에 약해서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할 수는 있었다. 하나님이 지금껏 그렇게 해오셨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은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6절에서 암시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알리실 때,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럼, 누구에게 하나님은 이런 은택을 주시는가? 11절과 13절은 분명하게 “그를 경외하는 자”, “자기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15-18절도 이 사실을 적시한다.
시 103:15–18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먼지와 같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 아무리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나고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풀과 꽃은 어느 순간에는 생명력이 있고 풍성해 보인다. 특히 비가 온 직후에 그렇다. 하지만 태양이 뜨고, 뜨거운 바람이 한번 불고 지나가면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 다 잊혀진다. 꽃이 있었는지, 풀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다윗은 이스라엘 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는 현상을 묘사했지만, 우리도 비슷한 모습을 본다. 결국 모든 사람은 이렇게 이 세상을 지나가게 된다. 조금 느리게 조금 빠르게 지나갈 뿐이고, 조금 더 화려하게 혹은 그렇지 않게 지나갈 뿐, 우리 삶은 어떤 면에서는 허무하게 지나간다.
하지만 그 중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자들이 있다.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살고 끝내지 않을 사람들이다. 파멸 곧 죽음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좋은 것으로 만족한 삶을 살게 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그렇다. 그들에게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손 대대로 이르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이 함께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말한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경험할 사람들이다.
그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어떤 자일까? 18절은 지금까지 3번 반복된(11, 13, 1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묘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다. 즉,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거나,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귀신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해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의 의미는 아니다. 그 반응이 긍정적인 반응이어야 한다. 두려워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하나님께로 더 나아간다.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한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순종하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언급된 하나님의 은택을 경험으로 안다.
시편 103편은 메시아 시편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가장 복음적인 시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의 죄와 허물, 연약함의 유일한 해결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은혜)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의 파멸이다. 영원한 죽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엉망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모두 엉망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조금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깨끗한 요강이든 더러운 요강이든, 요강은 요강이어서 그릇으로 쓸 수 없다. 큰 죄든 작은 죄든, 우리 죄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대로 우리에게 갚으신다면 지금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일반 은혜)인 것이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오직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택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럼, 이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던질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인가. 나는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자인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택을 주신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어서가 아니다. 그가 죄 없는 삶을 살아서도 아니다. 그가 남보다 나은 삶을 살아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죄를 따라 그를 처벌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높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의 체질을 아시고 그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람 중에서도 다윗과 같은 은택을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길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지 않아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 이르는 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 이보다 큰 사랑이 없고 이보다 큰 자비가 없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은택을 영원히,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은 이제 함께 시편 103편의 마지막 말씀들을 읽어 보자.
송축하라(19-22절)
시 103:19–22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20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모든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강조한다. 단지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 가까이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천사들도 그렇게 해야하고, 22절은 모든 피조물도 그렇게 해야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이다. 모든 것이 여호와를 송축한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다른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렇게 해야한다. 내가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그렇게 해야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어렵고 힘들고 예배가 무미건조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내가 하나님의 은택을 잊었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내 삶을 인도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것들이 그냥 그렇다. 새롭지 않다. 익숙하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그냥 당연한 것이 되었다. 사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택을 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서 다윗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해야 한다. 가장 좋은 시작 지점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의 모든 죄악을 사하신 하나님의 은택을 다시 기억해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지를 묵상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죄의 깊이를 알수록 은혜의 높이도 알수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수단들을 가볍게 보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함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사람이 만든 것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을 바라보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내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라. 하나님은 내 삶에서 역사하시고 그 모든 것들이 그분의 은택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