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그리스도인의 자유
본 문: 고린도전서 10장 31-33절
설교자: 조 성 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본문 말씀은, 구약의 교훈들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시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우상숭배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만드셨는지부터 시작하여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고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들의 자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애굽에서 고통 받다가 모세를 통해 나오게 되고 광야를 어떻게 지났으며, 사사시대가 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어떤 왕을 세웠는가, 그 이후에 포로 생활이나 성전을 재건하는 등의 많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시편이나 전도서, 아가서와 같은 개인적인 기록들, 예언서들이 있습니다. 국가의 역사가 있고 개인적인 간증이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와 부흥, 하나님의 돌보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성경이 기록들이 우리를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고 교훈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오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들을 보았지만, 험난한 광야를 지나면서 불평하고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말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일의 결국을 보았으니,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이 그냥 우리들에게 의미 없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의 한계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시고 그 장소에 양을 준비해 주신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냐는 아들의 질문에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와 같이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욥과 같이 자녀가 한 순간에 죽고 재산이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욥의 아내는 그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십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부르시고 평생 그와 함께 하셨고 야곱도 그가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에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저는 제 아들과 딸을 사랑하고 그들의 연약함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은 맡기지 않습니다. 5살 먹은 아들에게 쌀 한가마를 사오라는 부모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알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23절부터는, 하나님께서 금하시거나 권하신 것 이외에,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먹을 때는 먹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는 모든 삶에서 어렵고 연약한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은 여유가 없는 사람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어떤 물건을 사는데 있어서 그것을 갖지 못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기를 먹는 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얀마에 갔을 때, 싱가폴에서 온 형제들에게(그들은 개고기를 절대 먹지 않습니다) 식사 중에 개고기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고 먹게 한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사랑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특정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성도들에게 거리낌이 된다면 그들의 양심을 생각하여 먹지 않고 권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질을 사용하거나 내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다른 성도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을 세우는 데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