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본문: 갈라디아서 2장 20절
설교자: 조정의
당신은 ‘구원받았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가? 말로만 이른 복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일으키는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요한계시록이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복음을 알고 믿는 자는 영원한 천국, 복음에 무지하고 불신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누리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는 마귀의 자녀로서 영벌을 받는다.
참으로 안타깝고 충격적이게도 교회 밖이 아닌 안에서, 수많은 세월 종교 생활을 했음에도,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편 기독교 용어, 복음 교리에 익숙하면서도 자기의 것이 전혀 되지 못한 이들도 많다. 이는 개인의 문제이기 전에 설교자의 문제다. 설교자 자신이 거듭나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변질된 복음이 선포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이고, 많은 설교와 봉사를 통해 결과적으로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 뿐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자가 어떤 상태인지 분명하게 설명한다. 바울 개인 경험으로 확증된 객관적 진리이고, 다른 복음으로 속히 변질된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하면서 선포된 거룩한 진리다. 이를 통하여 복음이 무엇인지,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자.
1. 예수님의 공로로 죄사함 받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은 영혼을 살리는 복된 소식이다. 그 말은 복음의 능력을 얻기 전에는 모든 영혼이 죽은 상태라는 의미다. 모든 사람은 죄 때문에 날 때부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다. 성경은 이를 영적으로 죽었다고 표현한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죄 때문에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죽은 관계)가 영원히 회복된 것이(영원히 연결된 살아 있는 관계) 바로 구원이다.
수많은 사람이 죄의 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구원의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적지 않은 죄를 범했다고 수긍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문제인지 잘 모른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아무리 작은 죄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무한하신 하나님께 반역한 죄는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암세포가 사람의 생명을 무참히 빼앗는 것처럼, 죄는 크고 작음,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사람을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몰아가기에 충분히 파괴적이다.
그러면 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본문에 나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값으로 우리 죗값을 치르셨다. 함께라는 말에 주목하라.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셔서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에 ‘함께’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에 대하여 산다(벧전 2:24). 그리스도의 연합하여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엡 2:5-6). 구원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만을 신뢰할 때 얻는 선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행위를 내세우려 한다.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지, 얼마나 많은 헌금을 내는지, 어떤 직분을 얻고 어떻게 헌신하는지에 따라 구원이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계명을 잘 지키면 구원받았다고 여기고, 죄를 많이 지면 구원을 의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과거의 죄는 모두 해결되었지만, 현재와 미래의 죄는 날마다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교인들도 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라고.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행위로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를 보탤 필요가 없다. 21절을 보라.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 곧 계명을 지키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말한다. 둘 중 하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면, 우리의 행위는 구원받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의 행위가 구원받는 데 아주 조금이라도 공헌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벧전 3:18).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래서 모든 죄책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롭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2. 예수님을 위하여 의롭게 사는 것이 구원이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결코 공짜가 아니다. 성경은 신자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 고귀한 가치를 드높인다(벧전 1:19). 구원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인자하심이 담겨 있다면, 이를 믿음으로 값없이 누리게 된 자의 마땅한 반응은 무엇인가? 순종하는 사랑이다.
본문은 그래서 바울 개인의 경험으로 확증된 객관적 진리를 제시한다. 모든 신자는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삶의 주체가 바뀌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신비주의와 정적주의 영향을 받아 완전한 수동성과 자아의 철저한 부정을 신자의 성숙한 삶의 태도로 받아들인다(예: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각, 감정, 의지의 확실한 구분). 하지만 바울은 바로 이어서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주체라는 명백한 사실을 주장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그러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같은 의미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신자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분의 것이다(고전 6:19-20).
구원받은 자의 삶은 매우 단순하다. 자기 생각, 감정,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각, 감정, 의지를 두고 그것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철저히 그분 안에 아버지께서 사시는 삶을 죽기까지 사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쏟아내신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생각해 보라. 하지만 주님은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눅 22:42).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본(이상)이라면, 현실과의 분명한 격차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은 바로 그 격차를 조금씩 줄여나가는 삶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을 방해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장애물은 바로 유혹과 시험이다(가시떨기와 돌밭에 뿌려진 씨앗, 마 13장). 둘 다 예수님이 아닌 자신을 주인으로 삼게 한다. 유혹은 예수님의 자리에 돈, 쾌락 등의 우상을 두게 하고, 시험은 온통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치중하게 만든다. 세상을 사랑한 데마, 돈을 사랑한 가룟 유다, 여러 가지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유대교로 전향한 히브리서의 독자들 등 수많은 사람이 유혹과 시험을 통하여 그들의 참된 영적 상태를 드러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단순하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다. 자기 생각, 감정, 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 감정, 의지를 품는 삶이다.
3. 성령님의 힘으로 믿으며 사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하지만, 쉬운 것은 아니다.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주님도 말씀하셨다(마 7:14). 유혹과 시험에 취약한 육체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직전에 삶의 목적을 분명히 세웠다면, 이제는 삶의 동력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힌다. 신자는 자신에 관한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어떤 유혹과 시험에도 굴복하지 않을 자신감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전 1:31). 예수님은 신자를 버려두고 떠나신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 구하여 진리의 영, 능력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성경은 성령님을 “예수의 영”이라 부른다(행 16:7).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사신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는데, 새 언약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기 영을 자기 백성에게 주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겔 36:27). 구원받은 자는 그 약속이 성취된 삶을 산다. 육체 가운데 사는 오늘의 현실 가운데서 성령이 이루실 것들의 실상을 믿음으로 본다.
때로 우리는 믿음을 거의 잃어버릴 것 같은 유혹과 시험을 만난다. 성도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도록 하나님이 택하신 일꾼들도 예외가 아니다. 유명한 목사 중 우울증을 앓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박해들(태장, 돌로 맞기, 파선, 강도, 광야, 시내, 바다, 거짓 형제 위험, 불면, 굶기, 추위, 헐벗음) 외에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로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림이 있다고 토로했다(고후 11:24-28).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는 책임감이 무겁게 그를 눌렀던 것이다(히 13:17).
과거엔 기도의 의무감이 컸다면, 갈수록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해야 하니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찾고 싶어서 주님을 찾는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강한 믿음과 탁월한 사역의 비결이 기도에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구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무리 강한 유혹이나 혹독한 시험을 만나도 우리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 기억하게 하는 이 기도의 시작부터 우리는 무한한 위로와 능력의 원천을 만난다.
믿음으로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히 11:26). 믿음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성도들이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고,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이들이 믿는 대상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다(롬 8:32). 주 안에서 우리가 얻은 것과 앞으로 주실 상을 바라보라.
우리는 단번에 영원한 죄 사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 자녀라서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할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를 죽이고 의를 행하며 살 수 있게 되었으며, 날마다 그분을 닮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생을 누리게 되었고, 그분의 통치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며 영화롭게 되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며, 우리가 흘린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영원한 즐거움으로 보상하실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구원의 의미도 알고 복음 교리도 친숙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본문 말씀으로 자문해보라. 당신은 이렇게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