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본문: 히브리서 10장 32절 ~ 39절

설교자: 최 종 혁

 

영원한 구원!

구원은 영원하다. 예수님의 속죄가 영원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서 하신 사역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부분을 강조했다. 10장에서도 구약의 제사와 대조하면서 예수님께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으며 한 번의 제사로 성도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고 말한다(12, 14절). 그리고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18절). 따라서 구원 받은 자는 이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 의심할 이유가 없다. 더 이상 그 죄로 인한 결과, 심판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놀라운 구원이 어떻게 나의 것이 되는가? 구원은 내가 어떻게 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 나의 노력과 관계없이 무언가를 얻는 것, 은혜를 입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구원은 나의 노력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온전한 속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수단은 믿음이다. 내가 할 수 없고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다는 믿음이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런데, 구원과 믿음의 관계는 단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구원이라는 말에 단회적인 사건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믿음도 그렇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믿음이 없어도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 없다. 믿은 자가 구원 받은 자고 현재 그 믿음을 소유한 자가 현재 구원을 소유한 자다. 진정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은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킨다. 그래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은 참된 구원 받은 자의 증거 중 하나가 된다. 오늘은 믿음을 지켜며 사는 삶에 대해서 히브리서 10장 32-39절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보고 교훈을 얻기 원한다.

핵심 구절 : 35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 그러므로 큰 보상이 있는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I. 명령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A. “너희

이 명령의 대상은 ‘너희’로 이 편지의 독자들이다.

유대 공동체 – 히브리서는 독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구약의 제사 등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독자들이 주로 유대인으로 구성된 공동체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고난 공동체 – 또 하나 이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들이 박해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본문 32-34절에서는 이들이 전날에 당했던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현재에도 담대함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은 지금도 그러한 고난이 있음을 암시한다.

혼합 공동체 – 이 공동체 안에는 참된 신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다. 이 땅에 있는 어느 교회든 그렇다. 궁극적으로 교회는 ‘불러낸 자들의 모임’으로도 구원 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시인한 자들의 공동체다. 그래서 그 안에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지만 참된 믿음을 가지지 않은 자들도 있다.

야고보의 말처럼 단순히 믿음을 가졌다고 말한다고 해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한다. 이것이 믿음과 행위(열매)의 관계다.

그런데 어려운 것은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그 믿음을 분별하는데, 때로는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도 겉으로는 참된 믿음의 증거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에 떨어진 씨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그렇다.

13:20-22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들은 마치 구원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하신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선지자 노릇을 했던 사람들도 그렇다.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누가 봐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 같았겠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에 대해서 매우 엄중하면서 현실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그의 독자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을 수 있음을 가정하며 말한다. 그들 중에는 뒤로 물러나 멸망한 자들이 있다. 반대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도 있다(39절). 겉보기에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비슷한 일들을 경험했다. 진리의 빛을 받고 믿음을 고백했다. 함께 예배하고 간증을 나누고 성도를 섬기기도 했을 것이다.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 받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느냐가 그들이 고백한 믿음이 참된 것인지 아닌 것인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믿음을 버리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한다.

26-31절. 하나님께서 진리의 빛을 충분히 비춰주셨는데 그것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맹렬한 불이 기다린다고 말한다(27절).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29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31절).

성경에 나오는 가장 강력한 경고의 말씀 중 하나다. 빛을 받고 거절한 자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선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독자들을 모두 잠재적인 배교자들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너희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9)

독자들이 처한 상황은 어려움이 있었고 그 때문에 믿음을 버리는 것이 외부에서 볼때는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뒤로 물러나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고자 하는 유혹이 있을 수 있다. 믿음만 버리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 어쩌면 이 땅에서 더 나은 삶이 약속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일이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일이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그 앞에는 평안하고 안락한 이 땅의 삶이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심판과 맹렬한 불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이 믿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B.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담대함

믿음이라고 표현해도 되는데 담대함이라고 표현했다. 용기가 필요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36절에서는 “인내”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인내가 필요한 믿음이기도 하다. 그냥 “믿어요”라고 말만하면 되는 믿음이 아니다.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담대함과 인내가 필요하다.

32-3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핍박이 있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지켜왔다. 인내했고 오히려 기뻐했다. 그렇게 그들이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인내와 담대함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런 담대함이 필요한 상황이고 그래서 그것을 버리지 말라고 한다.

버리지 말라

이런 부정형의 명령은 긍정형의 명령을 보다 더 강조한다. 담대함을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무엇을 버리는가? 필요하지 않은 것, 거추장스러운 것, 내가 가지고 싶지 않은 것, 나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버린다. 그런데 담대함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금 이들에게 담대함이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이런 담대함이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담대함이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전히 육체의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비난과 조롱, 차가운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 거절당할 것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을 알면서 복음을 전하려면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세상의 보편적인 생각이 성경의 가르침과 대치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창조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성공의 기준이 다르고 선악의 기준이 다르다. 이런 세상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담대함이 필요하다.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억울함과 조롱을 당할 때도 있다. 나조차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기도 한다. 담대함이 필요하다.

믿음을 계속해서 지키고 살기 위해서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는 아직 우리 아버지의 집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믿음을 지켜야 하고 그러기위해 담대해야 한다. 다른 것들을 버릴지라도 담대함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 명령은 단순히 어떻게든 그렇게 해보라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이 명령을 한다.

 

II. 근거 그러므로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명령의 가장 직접적인 근거는 약속된 미래, 바로 소망이다.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지금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소망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소망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삶을 바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란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를 바라고 상급과 기업을 바란다. 이 소망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속한 것이고 미래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 이 땅에서의 삶과 관련이 없을 수는 없다. 이 소망에 근거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한다. 이 소망이 어떤 소망이기에 그럴까? 본문에서는 4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A. 이 소망은 더 나은 것을 바란다

“더 나은 소유”(34절) – 여기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더 나은 것일까? 그들이 포기한 것들, 잃은 것들보다 더 낫다. 이들은 무엇을 잃었을까?

“전날을 생각하라”(32절)

히브리서의 저자는 “전날”을 생각하라고 한다. 과거의 일들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 과거는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내 던” 날들을 말한다. 단순히 힘들게 고생하던 때를 생각해 보라는 말은 아니다. “빛을 받은 후”에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즉, 구원 받은 후에 믿음을 위해 핍박 받았던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인내했던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이 유대인들은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당하지 않아도 됐던 일들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유쾌한 것들이 아니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33절)

이들은 말로 행해지는 비방을 당했고 물리적으로 행해지는 환난을 당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공적으로 수치를 당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조롱하고 비웃었다. 직접적으로 해를 가했다.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환난을 당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은 해를 당하지 않았으니 잘 됐다고 생각하고 같은 핍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피하거나 숨지 않았다. 오히려 환난에 동참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34절)

그들 중에 감옥에 갇힌 자도 있었고 소유를 빼앗긴 자도 있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를 빼앗겼다. 때로는 공식적으로 불법을 저지른 것이 되어 무거운 벌금을 내거나 재산을 몰수당했다. 때로는 감옥에 갇힌 동안에 그들의 대적들이 물건을 노략해갔다. 49년에 로마에서 추방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을 두고 떠나야만 했다.

이들은 무엇을 잃었는가? 평판을 잃었다. 부를 잃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었다. 그들의 삶을 잃었다. 이것들이 나쁜 것이어서 이들이 버린 것인가? 아니다. 이것들 자체는 분명히 좋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더 나은 것’을 위해 이것들을 버렸다.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나은 것을 위해 그렇지 않은 것을 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이들이 어떤 사람들로 보였을까? 어리석어 보였을 것이고 이성을 잃은 광신도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조롱하고 비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은 가장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더 나은 것을 위해 그렇지 않은 것을 포기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이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사람이다. 그저 밭 하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렇게 했다. 그것도 기쁨으로 그렇게 했다. 왜 일까? 밭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고 밭에 감추어진 보물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어리석다고 평가할 것이다. 더 나은 것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더 나은 소망이다.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도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B. 이 소망은 영원한 것을 바란다

아무리 좋은 것도 일시적이라면 그 가치가 감소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가진 소망은 영구한 소망이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라는 말이다.

“영구한” – 머무르다. 남다. 지속되다. 그 자리에 계속 있는다는 의미다. 세상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 사용해서 사라지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아도 썩고 더러워지고 낡아간다. 인간이 만든 아무리 튼튼한 건물도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간다. 부도 명예도 영원하지 않다. 아무리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항상 그 자리에 있지는 않다. 그 어느 것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 않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그렇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렇지 않다.

벧전 1:3-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누군가 빼앗아 갈 수는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키고 계시는 것으로 절대 다른 누군가가 가져갈 수 없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더 나은 것일 뿐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C. 이 소망은 큰 상을 바란다

“큰 상”(35절) – 여기서 상은 ‘보응’이라는 의미다. 무엇에 합당한 대가로서 부정적으로는 벌을 의미하고 긍정적으로는 상을 의미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창조만 하시고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세상을 붙들고 계시고 다스리시는 주관자시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모든 선과 악을 심판하시고 그에 합당하게 보응하시는 재판관이시기도 하다.

12:13-14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악에는 그에 합당한 벌을 선에는 그에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궁극적이고 유일한 재판관이시다. 우리는 전후 사정을 다 알지 못하고 사람 마음의 동기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이런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 세상의 선과 악이라는 것이 사실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모든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다. 그런데 심판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은 1:1 대응은 아니다. 하나를 넣으면 하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소유를 포기하면 하늘의 보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마 19:21). 이 땅에서의 삶을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면 영원한 삶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작은 것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셨다.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6:22-23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이시다. 이보다 더 투자가치가 있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큰 상을 바라는 소망이다.

 

D. 이 소망은 확실한 것을 바란다

“약속하신 것을”(36절)

이 소망은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누구는 얻고 누구는 얻지 못하는가? 어떤 사람은 실패할 수도 있을까? 우리는 서로 경쟁하면서 어떻게든 이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소망은 믿는 모두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믿는 모두에게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망은 확실하다.

사실 소망이라는 말은 무언가 불확실한 것을 바란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런 것이 아니다. 확실한 것을 바라는 것이 소망이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37절)

지금의 삶은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은커녕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조차도 잘 모르겠는 상황이 우리 앞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우리의 구원자, 심판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다. 우리 생각처럼 지체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오실 날을 기다리고 계시다.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함에 대한 강조다. 오긴 올건데 언제 올지 몰라라고 말하는 것과 바로 올거야, 금방 올거야라고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고 그 때 우리의 모든 소망은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38절)

 

가진 소망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

제자들 –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당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것에 대해서 기뻐함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바울 –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

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히브리서 11장 – 믿음의 선진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여기 히브리서의 독자들도 그런 소망 중에 살았다. 그들은 이 소망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고난을 당했을 뿐 아니라 그런 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동정했다. 그들을 돌봤다는 말이다. 위험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런 일들 중에 자신들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당했다(34절).

그렇다면 계속해서 담대함을 버리지 않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할 이유는 충분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 믿음으로 그가 소망하는 것의 실체를 알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산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도전

그러므로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담대함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을 약하게 만드는 다른 수많은 것들이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마치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처럼 살기도 한다. 담대함을 버리고 소망을 바로 보지 못하고 낙담하여 살기도 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삶인가! 그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크고 확실하고 영원하고 더 나은 것을 바라본다면, 그 모든 것을 주시는 크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담대함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사는가? 믿음으로 사는가, 아니면 보이는 것으로 사는가?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9)

믿음 때문에 이 땅에서 많은 것을 잃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염려는 전혀 없다. 믿음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 많은 것 때문에 믿음을 버려서는 안된다. 마치 믿음을 버린 자처럼 살 수도 없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