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구세주와 함께 못박힌 두 죄인
본문: 누가복음 23장 39절~43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우리는 영혼의 구원자이자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던 두 죄인의 마지막 장면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들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금요일 오전 9시경 십자가에 달린 그들은 여섯 시간 후에 다리가 꺾여 사망에 이릅니다(요 19:32). 안식일에 부정한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말아 달라는 유대인의 요청에 따라 빌라도가 군인을 시켜 그렇게 한 것입니다(요 19:31-32). 체중이 실린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다리가 꺾이면 숨을 들이마실 수 없기 때문에 몇 분 만에 질식하여 죽게 됩니다.
이렇게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것 외에도 두 죄수는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먼저, 둘 다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을 “행악자”(범죄자)라 부르고(눅 23:39), 마태와 마가는 “강도”(마 27:38; 막 15:27)라고 부릅니다. 사람, 특별히 여행자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고 이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자로 빌라도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수로 갇혀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십자가형이라는 가장 끔찍한 형벌을 받을 정도로 확실한 악을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결코 낫다고 말할 수 없고, 둘 다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한편 그들 가운데 함께 못 박힌 예수님은 확실히 무죄 판결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십자가에 넘겨줄 때까지 계속해서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판결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이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고 기록된 구세주에 관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눅 22:37; 사 53:12). 예수님은 무죄한 분으로 두 사람이 저지른 죄와 같이 많은 사람의 더러운 죄를 담당하시려고 그들과 똑같은 자리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마 26:28; 히 9:28).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유대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에게 여간해선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들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죄목이 죄 패에 적혀 있었는데,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눅 23:38).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했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하며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예수님의 죄명을 적었습니다(요 19:21~22). 로마의 라틴어, 당시 문화권에서 주로 사용된 헬라어 그리고 아마도 유대인이 사용했던 아람어까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썼을 것입니다(요 19:20).
두 죄수가 고개를 돌려 그 죄패를 보면 예수님이 자기들과 같은 유대 민족이며 나아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른 유대 민족 지도자들이나 백성, 로마 사람들, 그리고 십자가 옆에 달린 두 사람 중 그 어느 하나 예수님이 진짜 “유대인의 왕”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마 27:44). “네가 정말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하라”고 조롱했을 뿐입니다(막 15:32).
유대인으로서 심각한 죄에 대한 처벌로 사형 집행 중이던 두 죄인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곧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순간부터 그들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숨쉬기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천천히 죽음이 점점 그들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그 죽음은 모든 사람에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여섯 시간 후에 그들 역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말입니다.
흉악한 삶을 산 유대인으로서 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 그들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이 죽음 이후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 그것이 주는 진짜 공포는 이 땅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떠나 어디로 가는가에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갈 곳은 정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의 장소, 지옥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를 종종 ‘스올’이라고 부릅니다(참고: 민 16:30; 신 32:22).
한편 두 사람이 바라볼 때 가운데 달려 있던 예수님 역시 죽음에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온몸이 찢기고 머리와 양손과 발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육신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실제로 여섯 시간 후 두 죄인이 다리가 꺾여 죽었을 때 예수님은 다리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요 19:33)
두 사람은 죽음 너머 영원한 지옥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형벌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자리였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라고 숨을 거두신 예수님을(눅 23:46)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셨고(행 10:40) 지극히 높여 하늘나라 하나님 우편 곧 만민을 다스리는 자리에 앉히셨으며(엡 1:20; 골 3:1) 빌립보서 말씀처럼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빌 2:10).
“유대인의 왕” 예수님은 죽음 그 이후에 참된 왕권을 가지고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인, 로마인, 그리고 모든 민족과 만민을 다스릴 왕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왕국을 이 땅에 가지고 내려와 실현하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죄패에 조롱하듯 적혀 있는 “유대인의 왕 예수”를 하나님께서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또 만민의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각각 매달려 있던 두 사람. 그들은 죄를 짓고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형벌에 떨어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종점에 거의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형벌을 받고 계신 예수님, 그 이름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나신 분(마 1:21), 죽음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실 참 유대인의 왕이자 만민의 왕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일평생 죄를 지으며 살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는 그때, 그들 인생에 있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엄청난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구세주가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 있는 예수님이 그들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운명을 바꿀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함께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1. 한 사람의 반응: 비방(39절)
여기 한 사람이 먼저 이렇게 구세주께 반응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
이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군병들, 백성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비방한 것입니다(눅 23:35~37).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에 예수님은 절대 그리스도일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여기서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죄인을 가리킵니다) 구원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예수님을 조롱한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그럼 어디 한 번 너를 구원하고 덩달아 우리도 같이 구원해 보시지. 그럼 내가 믿겠다. 그런데 그렇게 못 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네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니 얼마나 우습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주장이란 말인가?
이런 식의 반응이었습니다. 절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이유가 이 사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이 죄인처럼 자신이 어느 정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죄의 삯인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두신 양심으로 인해 죽음 그 이후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감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걸 아는 것입니다(히 9:27).
그런데 영원한 심판에서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 예수님에 관한 소식 즉 복음을 들어도 그들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소리처럼 들립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발소리가 들리고 있는데도 구원자 예수님에게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던 사람처럼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오직 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면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습니다. 그 비방 속에서 강도의 주요 관심사를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입니다. 강도는 영혼의 구원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목숨을 건지는 것 하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좋은 밭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 때문에 복음의 씨가 그 마음 밭에 온전히 뿌리 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눅 8:14).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안개처럼 사라질 이생의 삶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서 구세주가 주시는 영원한 영생의 복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마치 정신없이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자기를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승무원에게 비행기에서 마실 음료수를 가져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죽음 그 이후의 운명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이와 다를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 형벌에 떨어지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데도 구세주에게 구원을 간청하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원을 요구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정말 그리스도냐”라고 비방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죽은 한 비참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중에는 예수님을 좋게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다. 도덕적인 모델이다. 세계 사대 성인 중 하나이며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의 본이 되신 분이다. 인격이 훌륭한 스승이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억울하게 죽었다. 죄 없이 죽었다.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죽었다. 십자가 위에서도 사랑의 완벽한 본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분이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며 “그리스도”로 죄인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그 이유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죄패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많은 사람을 당혹게 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의 모델이자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내 영혼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자가 자기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한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한 이유였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구세주를 거절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사가 온통 이 세상의 것에 있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도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2. 또 다른 사람의 반응: 간청(40~42절)
여기 또 다른 사람의 반응이 나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도 처음엔 앞의 한 사람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욕했습니다(마 27:44; 막 15:32).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그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자칭 “유대인의 왕 예수”를 보며 비웃었는데, 그 예수가 진짜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의 고백에서 우리는 그의 참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A) 먼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40절…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그는 자신이 십자가라는 끔찍한 처형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임에 틀림이 없고 이런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구원 받는 이들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분명한 역사입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죄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건 아니다…이런식으로 말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희망이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는 이들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십자가에 달린 강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분명히 판결 내립니다(롬 3:23).
당신이 진정 구세주의 구원을 얻기 원한다면 먼저 당신의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 철저히 깨닫기 전에는 당신은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B) 둘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의 무죄함을 보았습니다.
41절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사람은 단순히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한 일 가운데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가 조금도 없을 수 있습니까? 사대성인 중 한 사람? 훌륭한 스승? 인격의 완성자? 도덕적인 스승?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시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죄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당신이 멸망으로 향하는 인생에서 구원받기 원한다면 반드시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세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선생으로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도덕적인 모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준 성인으로도 부족합니다. 당신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죄 없이 죽은 당신의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자기 옆에서 똑같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죄 없는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 미련해 보이는 구원의 방법을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죄 없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의 죗값을 치르게 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가능합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셨다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 4:25).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가 은혜로운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라는 것을,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해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에 관해 이해하고 있었는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는 1)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2)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고통을 받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3)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C) 그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참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나라가 지금 여기에 바로 시작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시작될 것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사라질 분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서 자기 나라를 차지할 왕이 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구하기를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라고 구한 것입니다.
더불어 그는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의 구세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구원을 간청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여~”라고 예수님을 친밀하게 부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구원의 정통 교리를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편지하면서 자신이 받고 전파한 복음을 설명한 내용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님을 믿었으며 그 예수님께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아직까지 예수님께 이 간청을 드리지 않은 분들께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저주 받을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영원한 저주를 향해 날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실 유일한 구세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왜 구세주께 당신의 영혼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으십니까? 왜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이 땅에 정신이 팔려 살다가 영원한 지옥에 빠지려 하십니까? 왜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황하십니까?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그러면 찾아낼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 7:7~8).
십자가 위의 두 행악자는 동일한 조건과 상황 가운데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의 숨이 끊어지기까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약속(43절)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께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 곧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십자가에서 자기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이 다시 부활하여 만민의 왕이 되실 것이라 믿은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아멘) 너에게 이르노니.” 이것은 강조입니다. 내가 확실히 말하는데, 분명히 말하는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이 됩니다(고후 1:20).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한 죄인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이 아닌 바로 “오늘”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낙원’은 페르시아어로 정원을 가리키는데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에덴 “동산”에서 동산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막힘 없는 교제, 죄가 없었던 아름답고 행복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의인이 죽음 이후에 이 “낙원”에 거할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의인 아브라함도 거기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는 표현을 예수님도 하셨습니다(눅 16:23).
쉽게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 바로 “낙원”입니다. 몸의 부활은 나중에 일어나지만, 영혼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죽음 이후 즉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를 믿고 구원을 요청한 죄인에게 그 순간 바로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던 그가 한순간에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들 모두가 이 죄인에겐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짓고 결국 십자가에서 사형당할 정도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행악자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인생 대반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옆에서 자기 죄를 대신 지고, 자기가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심장이 뛰고 있는 한 그리스도의 초대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384p). 그는 심장이 멈추기 몇 시간 전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4. 결론: 그들의 운명
여러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유평교회 계속해서 참석 중인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지 않고 있는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기도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 시간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두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으며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놓친 인생 최고의 기회를 영원히 후회하면서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유대인의 왕이요 만민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잡은 인생 최고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안개와 같이 금방 있다가 사라집니다. 죽음은 언제나 갑자기 옵니다. 예상하지 못했을 때, 아니 예상하였더라도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종종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성도님의 믿지 않는 가족을 방문할 때가 있는데, 그때 저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 생각이 납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제발 하나님을 붙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께 구원을 간청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을 마치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처럼, 금방이라도 찾아올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 옆 두 죄인처럼 바라보며 애타는 마음으로 요청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구하십시오. 더는 지체하지 마십시오. 오늘이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생일대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빠져 영원한 운명을 바꿀 기회를 차버리지 마십시오. 의식을 잃고 침상에 누울 때까지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죄를 직시하십시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죄가 없는 그분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영혼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을 기억해달라고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구세주를 영접한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와 찬양이 줄어드는 삶을 볼 때 우리가 또다시 이생에 눈을 두고 살고 있구나! 가슴을 쳐야 합니다. 또 내 사랑하는 가족, 친척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처할 영원한 운명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십자가의 강도처럼 그들이 빠르게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영원한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복음이 여러분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습니까? 가서 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