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여,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라
본문 : 사도행전 9장 1절~31절
설교자 : 조 정 의
본문은 사울의 구원 간증을 담고 있다. 누군가의 구원 간증을 들으면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진다. 간증하는 성도의 삶 속에 역사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감사하며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사울의 간증을 들으며 우 리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헤아리기 원한다.
사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열심이 있던 사람이었 다(빌 3:5).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한 율법 교육을 받았다(행 22:3). 그만큼 유대인의 법과 문화와 종교에 능통했다는 말이다. 동시에 사울은 다소 사람으로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고 (행 22:28), 헬라어와 헬라 문화에 익숙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생업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여 자급자족이 되는 사람이었다(행 18:3).
이 모든 사울의 특징은 복음이 문화와 언어와 종교의 장벽을 넘 어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전파되는 데 큰 무기가 되었고 선 교사로서 생업을 통해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 다. 문제는 사울이 복음을 전파하기보다 제거하기 원했다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 핍박했다는 것, 교회와 함께하기보다 잔멸하기 원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울을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살펴보자.
- 자격 없는 자를 구원하셨다(1-2)
사울은 정말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었다. 그는 스데반이 순교한 그 날부터 예루살렘에 큰 박해를 일으킨 주범이었다 (8:1). 그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고, 회당 마다 다니며 그리스도인을 색출하여 신앙을 거부할 때까지 때리 고, 그들을 죽일 때 찬성표를 던졌다(26장).
누가는 사울을 날뛰는 야생짐승 처럼 표현했다. 8장 3절에 사울 이 “교회를 잔멸”했다는 표현은 시편 80편 13절에 포도원을 황 폐하게 만드는 야생 멧돼지를 가리킬 때 사용된 표현이다. 1절에 도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는 표 현이 있는데, 이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헐떡이는 맹수의 모습이 다(“멸하려던 자”, 21절). 사울은 정말 먹잇감을 좇아 끝까지 추 격하는 맹수처럼 주의 제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라도 찾아가 파괴하려 했다.
그래서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했다(1-2절). 다메섹은 갈리리 북부 수리아에 있는 대 도시로(예루살렘에서 240km, 일주일 여정) 큰 유대인 정착민 공동체가 있었고(네로 황제 때 만 명 죽음), 그만큼 안전하고 피 하기에 유리했다. 유대교 최고 권력자인 대제사장은 유대인 공동 체로 숨은 범죄자를 예루살렘으로 송환할 권한이 있었고 공문을 써서 사울에게 주었다. 사울은 그 권한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다(2절).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 그리스도인을 맹수처럼 물어뜯는 사 울을 예수님이 어떻게 하셔야 마땅한가? 그런데 어떻게 하셨는 가? 구원하시려고 친히 만나주셨다. 그리스도를 박해하러 가는 길 위에서 그를 만나주셨다.
사울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다(딤전 1:15).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이다(고전 15:9). 그런데도 주님은 사울을 구원하셨다. 그래 서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 다(고전 15:10).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자격이 조금도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혜다.
사울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사울이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어떤 본이 되는가? 그리스도가 사울처럼 괴수 같은 죄인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사울처럼 죄가 아 무리 커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입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 죄가 아무리 크고 많아도 그리스도는 당신을 오래 참으신다. 긍휼을 입게 하 신다. 주님은 당신에게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요구하 신다. 그분을 믿고 구하라. 당신이 아무리 자격이 없어도 주님은 풍성한 은혜로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미 구원을 얻은 우리는 사울과 똑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 리에게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조금이라도 있었는가? 우리도 사울처럼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거절하는 삶을 살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얼마나 미쁘신가? 자격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의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이 베푸신 구 원의 은혜에 감사를 멈추지 말라.
- 가치 있는 자로 구원하셨다(3-9)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길에서 사울을 만나주셨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3절). 사울은 후에 간증에서 “큰 빛”(22:6),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다고 말했다 (26:13).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원래 가지고 계신 영광의 빛을 나타내셨는데(마 17:2) 지금 사울 앞에 그 영광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누가 그 영광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사울은 땅에 엎드러져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박해하느냐”(4절). 주님은 친밀하고 긍휼이 가득한 목소리로 사울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르셨다.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사울의 이름만 알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내적 갈등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라고 말씀하셨다(행 26:14). 수 레를 끄는 소를 채찍질하며 길을 인도할 때 반항하며 뒷발질을 하며 수레를 걷어찰 때가 있는데 그런 소를 통제하기 위해 수레에 가시를 박아 넣는다. 그러면 소는 고통을 느끼며 주인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간다. 예수님은 사울이 그렇게 주님 뜻에 반항하 고 있으니 고통스럽지 않냐고 물으신 것이다.
사울은 내면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그를 갈등하게 했을 것이고 특히 그리스도인의 간증이(스데반) 점점 더 자기 생각과 신앙을 흔들었을 것이다. 주님은 진리를 거 부할수록 더 고생할 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처럼 높은 분이 나타나셨다는 걸 직감하고 존칭을 사용하여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다(5절). 예수님은 다 시 한번 자신을 이번엔 음성으로 똑똑히 드러내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절). 사울은 처음으로 예수님이 진짜 누구신 지를 보고 듣고 알게 되었다. 인격적으로 만나주신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울에게 비췄던 강렬한 빛과 똑똑히 들리는 음성을 같이 가던 사람들은 아무도 보거나 듣지 못했다(7절). 아무것도 못 보거나 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빛을 보았으나 주님은 보지 못했고, 소리는 들었으나 주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사울은 영광의 주를 보았고 그 음성을 들었다. 그리스도께서 친 히 그를 만나주심으로 그를 구원하셨다. 그는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 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만나시고 구원하시는 역사는 이렇게 일어난다. 똑같은 말씀을 듣지만 어떤 이에겐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 리지 않고, 어떤 이는 그 음성을 듣는다. 똑같이 성경을 읽지만 어떤 이에겐 그냥 글이고 어떤 이는 거기서 진리의 빛을 본다. 무 슨 차이인가? 주님이 만나주시고 주님이 새롭게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내적 부르심). 당신은 어떻게 거듭났는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만나 주셔서 그 영광의 빛을 어두운 마음속에 비추시고 진 리의 음성을 들려주셨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가?
하지만 그 은혜의 풍성함을 헤아리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울을 구원하신 분명한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사울은 예수님의 도 구였다. 6절에 예수님은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15절에는 사울을 가리켜 “내 이름을 이방인 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이름을 멸하려던 자에서 그 이름을 전하는 자로 완전히 바꿔주신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사울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사울은 어떤 삶을 살았겠는가? 계속 그리스도의 원수로 교회를 박해하며 살다가 심판주 앞에 서게 됐을 것이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구원하셔서 바꿔준 인생은 무엇인가? 물론 16 절에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 이름 때문에 고난이 넘쳤던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포되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며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 졌다.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가? 우리도 같은 은혜를 받았다.
많은 사람이 전도를 해야 할 일,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도는 일차적으로 예배다. 의미도 목적도 가치도 없는 인생을 살다 영원한 종착지로 지옥에 가게 될 나를 주님이 만나 주셔서 의미 있고 목적이 분명하며 영혼을 살리는 가치 있는 삶으로 바꿔 주신 것이다. 전도는 내가 받은 은혜가 지극히 크고 풍성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과 삶으로 선포하는 예배다.
사울은 말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당신을 구원하신 그 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하 라. 구원의 은혜를 잊은 자는 결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은 혜가 이끄는 삶을 살라.
- 함께 서는 자로 구원하셨다(10-31)
흥미롭게도 누가가 사울의 회심을 기록할 때 더 많이 신경 쓴 부 분은 회심 그 자체보다 사울이 어떻게 교회에 더해졌는지에 대 한 부분이다(2/3 분량).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거듭났으니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잘 생각 해보라. 천하의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주인공이자 아시아, 유럽, 로마까지 복음을 선포한 위대한 선교사, 13편의 신약성경 저자 가 교회에 더해지는 데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걸 믿을 수 있겠는가? 태어난 아기에게 돌봄이 필요한 것처럼, 구원받은 성 도에겐 돌봄이 필요하다. 그리고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를 돌보신다. 교회가 함께 하도록 하셔서 함께 자라게 하신다.
다메섹 교회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각각 사울은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중간에 3년의 기간이 있었지만 (23절, “여러 날”: 다메섹-아라비아 광야-다메섹), 여전히 그는 악명 높은 인물인지라 교회에서 그를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보내 사울이 교회 안에서 교제할 수 있게 하셨다.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힘을 더 얻어 예수를 증언하 게 하셨다. 교회를 통해 보호받고 양육 받고 교제하고 힘을 얻게 하셨다. 함께 자라게 하셨다.
다메섹에선 아나니아가 그 역할을 했다. 그는 환상 중에 주님의 명령을 받고 직가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들어가 사울을 찾아 그에게 안수를 했다(10-19).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은 침례를 받고 그의 눈을 덮었던 비늘(생선, 뱀의 비늘같은)도 벗겨졌 다. 그는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져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면서 각 회당을 다니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사울이 누군지 왜 다메섹에 왔는지 알았던 유대인들은 다 놀라고 어리둥절했다.
다메섹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은 사울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광 주리를 타고 성벽에서 내려져 예루살렘으로 갔다(23-25절). 예루살렘에 있던 주의 제자들 역시 사울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 다. 그때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바나바였다. 바나바는 사울을 사 도들(베드로, 야고보)에게 데리고 가서 그가 어떻게 구원의 은혜를 얻었는지 설명했다(27절, ‘데리고’=‘자기 날개 아래 맞아들 여’).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와 함께 있으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과 변론했다(26-29절). 예루살렘에서도 죽임당할 처지에 놓이자 형제 들은 사울을 가이사랴까지 데리고 내려갔고 거기서 사울을 그의 고향 다소로 보냈다(30절). 이처럼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거듭 난 사울을 교회와 화목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 형제들이 있었고, 그 형제들을 통해 사울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자라며 더 힘 있게 복음을 전했다. 교회를 통해 위기때마다 보호를 받았다.
구원받고 오늘까지의 삶을 돌아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보내셔서 교제하게 하시고 신앙을 붙들어주고 위로와 격려가 되 고, 보호가 되어준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를 통해 함께 자라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참 감사하지 않은가?
한편 당신은 아나니아나 바나바의 역할을 해야 한다. 사울을 보 호하고 힘 있게 한 형제자매가 되어야 한다. 지금도 교회에서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 교회 안에서 건강 하게 보호받고 양육 받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 당신은 그를 날개 아래 맞아들이겠는가?
사울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바울이 되었다. 그 이후의 삶은 ‘부담스럽다’고 말할 정도로 그리스도께 헌신적이고 충성된 삶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으며,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말했고, 삶의 마지막에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았을까?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격 없는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 가치 있는 자 로 구원하신 예수님, 교회와 함께 은혜 가운데 자라게 하신 예수 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여, 구원의 은혜를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