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만하게 하는 지식, 덕을 세우는 사랑

본문: 고린도전서 8장

설교자: 조정의

결혼에 이어서 바울이 답변한 주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것이었다(1절). 고린도 도시엔 다른 헬라 도시와 마찬가지로 많은 신전이 세워졌고, 기본적인 제의뿐만 아니라 결혼, 장례, 행사, 회의 등이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대표적으로 고기, 13절) 특별한 제사 방식에 따라 신에게 돌려지고, 남은 것은 제사장과 제사자에게 나눠졌는데, 자주 연회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자와 그가 초대한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자리가 마련됐다. 때로는 평민과 천민에게도 귀한 음식을 먹을 기회를 제공했고, 많은 양이 시장에서 매매되는 음식이 됐다.

복음은 우상을 섬기던 자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 섬기는 자로 변화시켰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자로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선언하며,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복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예전처럼 신전에 가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 가까운 지인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 신전에서 열리는 잔치에 초대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시장에서 판매되는 음식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확인하고 먹어야 할까? 오늘날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이나 할랄 푸드와 같이 우상과 연관된 음식에 관하여 마땅히 복음이 요구하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발견하기를 원한다. 또한 모든 지혜가 우리를 교만이 아닌 사랑에 이르게 하여 참 복음 안에서 함께 견고하게 지어져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우리가 아는 지식(1-6절)

바울은 먼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안다고 말했다. 지식(그노시스)은 고린도 성도들이 특별히 자랑했던 ‘성령께 받은 특별한 계시’를 말한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서 지식이 풍성했지만, 성도들은 앞서 살펴본 대로 성령께 선물로 받은 그 지식으로 자기를 앞세우고 다른 성도를 억압하며 서로 시기하고 다투면서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켰다. 그들의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도구로만 사용됐고,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일에는 거듭 실패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평가한 것이다(1절). 

바울은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는 이들에게 촌철살인 같은 말로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게 한다: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2-3절). 가장 오래된 사본인 클레멘트 사본과 P46엔 대괄호 부분이 없다. 만일, 이 독법이 옳다면, 뜻은 더욱 명확해진다. 안다고 생각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대괄호를 포함한 독법도 뜻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을 아는 줄로(완료형)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식의 완성에 이르렀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지식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요일 3:16, 4:11).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참지식은 바른 내용을 아는 것에서(지식)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바른 목적으로(사랑) 활용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참지식과 사랑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진리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말한 것처럼, “모든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2, 6절).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사랑(혹은 사랑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하기 위하여 진리를 버리지 않는다. 반대로 진리 또는 진리라고 여기는 것을 지켜내기 위하여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명령하고(엡 4:15), 언제나 진리를 순종함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요구한다(벧전 1:22).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도 올바른 지식과 사랑이 함께 일해야 한다. 바울은 먼저 그들이 공유하는 참지식을 말하고(4-6절), 그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설명한다(7-13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아노라”(4절). 바울을 포함한 고린도 성도 모두가 ‘아는’ 우상에 관한 올바른 지식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모든 우상은 허상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라는 것이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4절). 이것은 단지 쉐마를 지혜의 근본으로 여기는 유대인 또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으로 영접한 기독교인에게만 해당하는 지식이 아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모든 만물에 적용되는 지식이다: 5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5-6절). 우상 숭배자들은 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신들을 많이 만들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주인으로 섬긴다. 하지만 참지식을 가진 자들은 우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 오직 한 하나님만을 아버지 곧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주권자가 되신 분으로 모신다. 유대인이 가진 지식은 여기까지 기독교인과 동일하지만, 기독교인은 여기서 더 분명하고 충분하게 계시된 지식을 가졌다. 바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또한 유일하신 창조주, 주권자로 믿는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빌 2:6), 그분을 주로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바르게 알고 실천한다(요 6:40).

그러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이 복음의 지식을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가진 참지식은 어떻게 여기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는가?

2. 사랑을 맺는 지식(7-13절)

먼저, 오직 하나님만을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일에 어떻게 이 지식이 실천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바울은 바른 지식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반면교사의 예를 통하여 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절). 여기 어떤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복음의 참지식을 온전히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오직 한 하나님만 섬기고 그리스도만 따라야 한다는 급진적인 결단을 아직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해왔던 습관대로 우상을 모신 신전에서 열리는 여러 가지 모임에 사회적 요구와 압박에 따라 참여한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것임을 알고도 계속해서 타협하며 믿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행한다. 바울은 앞서 분명히 “우상 숭배하는 자”를 “불의한 자”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꾸짖었다(고전 6:9). “우상 숭배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한다(계 21:8). 그런데도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똑같은 모습을 취하며 자기 양심을 계속해서 더럽히고 약하게 만들었다. 음식이 문제인가? 우상 숭배하는 일이 문젠가?

당연히 음식은 문제가 아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8절). 음식은 먹든지 먹지 않든지 하나님 앞에서 뭐가 더 잘하고 잘못하는 거라고 말할 수 없다. 음식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유리하게(칭찬받게) 혹은 불리하게(심판받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서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음식을 우상 숭배자들과 같이 먹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의 양심을 파괴한다. 바울은 10장에서 이 문제를 종결하면서 이렇게 책망했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전 10:19-20).

이 복음의 원칙은 여러 삶의 회색지대에 적용할 수 있는 강력한 지혜를 제공한다. 가령 술에 대한 성경의 지식은 다음과 같다: 술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축복이며 음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음료(음식) 자체가 복음을 거스르는 것은 분명 아니다(만찬, 절제된 사용). 하지만, 술에 대한 성경의 지식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방식으로 열매를 맺는가를 진지하게 판단해 봐야 한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과 똑같은 목적과 방식으로 마신다면, 술은 당신의 양심을 서서히 더럽히고 연약하게 만들 것이다.  

자, 바울은 명백하게 우상의 집에 앉아서 먹는 것을 금하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 성도들 중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는 지식에 따라 음식을 먹을 권리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나에게도 하나님만 유일한 신이고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지식이 있다. 하지만, 여러 사회적 요구나 개인적 유익을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음식을 신전에서 먹는 것뿐이다. 음식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나아가 자신들처럼 확고한 지식이 없는 자들을 “믿음이 약한 자들”로 취급하고(9절), 무엇을 먹을지 마실지 결정하는 자유 또는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9절). 바울은 10장에서 이것이 우상 숭배하는 일이라고 확실히 책망한다. 하지만 본문(8장)에서는 참지식이 맺어야 하는 두 번째 열매인 성도 사랑과 연관 지어 그들의 생각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만을 낳을 뿐이라고 꾸짖었다.

9그런즉 너희의 자유(권리)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9-11절). “믿음이 약한 자”와 ‘너의 지식’이 반복되어 사용된다. 그들이 내세우는 지식이 결과적으로 그들이 ‘믿음이 약하다’고 평가한 형제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고(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함) 최악의 경우 멸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배교의 길로 돌아섬, 끝내 회개하지 않음). 그들의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들 자신을 우상 숭배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에도 실패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이웃을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게 보호하는 일에도 실패한다. 아무도 복음 안에서 세워주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복음 안에서 자라도록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다만 교만하게 하는 지식인 것이다. ‘걸려 넘어지다’는 ‘실족하게 하다‘와 같은 뜻으로, 어떤 사람을 죄에 넘어지도록 유혹하고 이끄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막 9:42). 

주님은 형제자매를 위하여 죽으셔서 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이끄시는데, 자기 지식을 자랑하면서 그 형제자매를 멸망에 이르도록 이끄는 죄는 그만큼 심각하다. 바울은 그것이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아주 급진적인 결단을 하겠다고 과장하며(영원) 선언한다: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12-13절). 고기를 먹을 권리가 바울에게 없는가? 있다(고전 9:4). 하지만 바울은 자기 권리보다 복음으로 영혼을 얻는 것(사랑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 오히려 자기 권리를 쓰지 않고 범사에 참았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고 그래서 그 자유를 마음껏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불가침 권리라고 여긴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종이 되라고 말하고, 형제자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고 요구한다(갈 6:2; 약 2:8).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복음의 원칙은 술, 화장, 춤, 주일 스포츠, 음악, 영화 등 여러 가지 자유로운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강력한 지혜를 제공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금하지 않으셨다’는 지식을 가지고 자기 권리를 섣불리 주장하려 한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혹시 나의 지식이, 나의 자유가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나의 형제자매를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지는 않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내가 하는 무언가로 인하여 담대하게 죄를 짓고 양심을 더럽히고 최악의 경우 교회를 떠나 멸망의 길로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 특별히 부모가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라는 바른 지식으로 양육할 때(엡 6:4), 단지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유익을 주는 지식으로써 전달되어야 한다. 부모가 알고 있는 복음의 지식이 부모의 실질적인 삶에서 전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자녀는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담긴 지식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