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난 중에 믿음을 경험하라
본문 : 출애굽기 14장
설교자 : 최종혁
성경 안에서 출애굽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할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후의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출애굽 사건이 종종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이 사건이 예수님에 대한 예표임을 밝히기도 했고 출애굽 자체가 영적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좋은 모형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출애굽기 14장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고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성령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의 배경과 상황을 통해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안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
I. 여기까지의 상황
이 사건의 배경은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던 창세기 12장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가 믿음으로 화답하기를 기다리셨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화답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시며 공식적인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리고 그 때 그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400년을 객으로, 노예로 고통 중에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해 낼 것을 약속하셨다.
결국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때에 엄청난 가뭄으로 인해서 야곱은 애굽(이집트)로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 그와 모든 가족들이 정착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그곳에 보내셔서 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두셨다. 그리고 창세기의 끝에서 요셉은 죽으면서 아브라함께 하나님께서 하셨던 약속을 그 형제들에게 상기시켰다.
창 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단순히 약속의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 요셉의 바람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경우는 그렇게 해달라고 유언을 했고 그의 아들들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장사하였다. 요셉도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의 형들, 그리고 모든 자손들이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방의 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노예가 되어 이방 왕을 섬기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번성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애굽이라는 당시의 강대국 안에 거주하면서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강하게 성장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출 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 그리고 요셉이 말했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실 때”가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출 3장).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리시면서 그 자손들을 “애굽에 있는 내 백성”(출 3:7)이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계획을 밝히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이 계획에 애굽의 대항과 그로 인한 심판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애굽을 치실 것으로 그 모든 일을 통해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참 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지고 계신 계획이었고 출애굽기에 와서 하나님은 그것을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며 약속하시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허무맹랑할 것이다. 사실 애굽 왕 바로가 이 말을 듣고 처음에 보인 반응도 그랬다.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당대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왕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보내달라는 모세의 말은 기가 찼을 것이다. 니가 뭔데, 니가 말하는 여호와라는 신이 뭔데 내가 그렇게 해야되느냐라고 바로는 반응했다. 그 여호와를 나는 모르니 그가 하는 말도 난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의 이 말은 틀린게 없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이 후에 이어지는 모든 출애굽 사건의 목적은 사람들도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출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이스라엘]가 알지라
출 7: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출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바로]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8:10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바로]가 알게 될 것이라
출 9:14-16 [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바로]가 알게 하리라 [15]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10: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모세, 이스라엘, 그 자손]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결국 이 모든 재앙과 사건을 통하여 바로와 당시의 애굽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는 결국 이스라엘에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 12:31)고 말하게 된다. 여호와를 모르니 보낼 수 없다고 말하던 그가 이제는 여호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제 요셉의 유언에 따라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상징하는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낮에는 구름 기둥을 따라 이동하고 밤에는 불 기둥 아래 쉬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조금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든 일들때문에 약간 얼떨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도 정말 하나님을 알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뒤에서 살펴보자.
상황은 다 끝난 것 같았다. 바로는 백기를 들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많은 물품(금, 은, 패물, 옷 등)을 취하여 나왔다. 이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다. 바로가 마음을 바꾼 것이다.
출 14: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시간이 좀 지났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다. 재앙은 끝났고 지금 자신들이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잘 부려먹던 노예들을 다 그냥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그래도 상식적으로 그 동안의 일들을 생각하면 사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들의 굳은 마음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길을 돌이킨 것(14:2)을 보면서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신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여호와는 광야에서는 힘을 못쓰는 그런 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로는 그들이 내보낸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잡아오기 위해 추격대를 보낸다.
출 14:6-7, 9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가장 빠르고 강력한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이스라엘을 추격해 왔다. 바로 전만 해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영화로 치면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에필로그로 잔잔한 음악이 이어지면서 평온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이어질 그런 상황이었다. 소설로 치면 발단, 전개, 절정을 지나 이제는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이 눈 앞에 현실로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때, 그들의 눈 앞에 그들이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바로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
끝인 줄 알았는데 끝나게 생긴 것이다. 결말인 줄 알았는데 절망이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숫자가 많았지만 그냥 숫자만 많았다. 그들은 군대가 아니었다. 바로의 군대가 끌고온 병거는 지금으로 치면 탱크다.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보병과 민간인 앞에 탱크 부대가 나타난 상황이다.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 싸울 수 없다. 이길 수 없다. 그럼 도망할 수는 있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바닷가에 있기 때문이다.
II. 이스라엘의 두려움과 원망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반응을 보라.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상황을 보면 이 정도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이 상황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어지는 이들의 말을 보면 이들은 단순히 두려운 마음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이 이들을 삼켜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이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죽음의 두려움, 공포를 느끼고 있다. 지금 여기서 절대로 살아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을거면 그냥 애굽에서 살던대로 살다가 나이 들어 죽으면 되는데, 이렇게 광야까지 나와서 비참하게 죽어야할 이유가 어디있냐고 모세에게 따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전에 그들이 모세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우리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누가 종살이에서 구해달라고 했느냐. 5장에 보면 모세가 처음 바로를 만나고 나서 그들은 오히려 더 학대를 당했고 그로 인해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판단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마 그때 이들은 이런 식을 말을 했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이후에도 힘든 일을 만날 때 마다 종종 이런 식의 과거미화를 하며 왜 애굽에서 우리를 구해냈느냐는 식의 불평과 원망을 한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에서는 자신들이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16:3). 물이 없을 때에도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원망한다(17:3). 가나안의 정탐꾼들이 돌아왔을 때도 이들은 애굽에서 죽는게 나았다고 말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폭동을 일으켰다(민 14장).
결국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평안, 안전, 만족,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고 모세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깨뜨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적이고 내가 벗어나야할 상황이었다. 나에게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어려움보다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지금의 이 상황, 애굽의 군대가 그들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난 이 상황은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었을까? 조금 있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뜻밖의 상황, 예상 못한 상황, 내가 원하지 않았던 상황, 흔히 고난, 시련, 어려움이라고 부르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난은 나에게 좋지 않다고 단정짓고 따라서 단순히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그 순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원인을 찾아 책임을 묻는다. 어떤 경우는 끊임없는 자책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환경, 다른 사람을 그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다. 때로는 그 대상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하다.
바다를 뒤로 하고 애굽의 군대를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애굽의 군대를 마주하자 심히 두려워했다. 8절 끝에 보면 그들이 나올 때는 담대하게 나왔다. 그때는 그들이 승리를 경험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부르짖은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믿음의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찾듯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아마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섞여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게 했던 말을 보면, 그들은 모세에게 지금 고난의 모든 책임을 물으며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13장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단지 두려워하고 원망할 뿐이었다. 이 사건 전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그 놀라운 일들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믿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있었던 모세는 달랐다.
III. 모세의 믿음의 확신
자신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답한다.
출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모세는 정말 연약해 보였다. 뭐 저렇게까지 못하겠다고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세는 전혀 다르다.
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어쩔줄 몰라하는 자들에게 가만히 서라고 한다. 애굽의 강력한 군대를 보고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도전한다. 다시 보지 않을 줄 알았지만 다시 너희 눈 앞에 나타난 이 애굽 사람들을 이제는 정말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너희가 경험할 것은 너희의 죽음이 아니라 너희를 두렵게 하는 이 군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고 너희가 해야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그저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힘을 내서 싸울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모세는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신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그가 경험한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후로 하나님은 그 뜻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모세는 그 모든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확신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말씀이다.
출 1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어떤 일이 어떤 목적으로 벌어질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길을 돌이켜 바닷가에 진을 치면 바로는 그들이 광야에 갇혔다고 생각하고 쫓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그의 군대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실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목적은 출애굽 과정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이고 이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래서 온 무리는 “그대로” 행하여 바닷가에 진을 쳤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바로는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하게 했고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그 군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처음에 우리가 살펴봤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바로의 군대가 보이는 순간 이들이 보였어야 할 반응은 두려움과 원망이 아닌 확신과 기쁨이어야 했다. 오히려 반대로 바로의 군대가 보이지 않았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지 의심했어야 했다. 바로의 군대가 보였기 때문에 이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좀 전에 했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었는가? 괜한 고난이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고통만 가져오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하는 일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같이 반응하는 것이 맞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속해서 행하실지를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옳다는 것을 다시 확신시켜 주신다.
출 14:15-18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1-4절에서 하셨던 말씀과 같지만 더욱 구체화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어떻게 바로의 군대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실 것인지도 밝히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할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들어가 그곳에서 멸망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이 증명될 것이다.
특히 성경이 반복해서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1번, 4, 6, 7, 9, 17, 18, 23, 24, 25, 26, 28절).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더욱 큰 영광을 얻으시게, 사람들이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이다. 그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더욱 강하신 능력의 하나님으로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보았을 때, 그 강력함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하고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에 사로잡혀 어쩔줄 몰라하고 원망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이 자신의 안위와 평안, 만족, 기쁨을 최우선에 두지 않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시련 가운데 안심하며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IV. 결론
성경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 결론은 참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으로 바다를 건넜고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 들어 갔다가 멸망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완악한 마음이다. 그동안 그렇게 당했었고 지금도 바다가 그렇게 갈라지는 것을 보면 정말 안되겠구나하고 도망할 법도 한데 그들은 바다 가운데까지 뛰어들었다. 결국 그들은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망하려 했지만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병거로 무장한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워했지만 결국 그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그들의 죽음이었다(30절).
이 사건의 결론으로 모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큰 능력을 보고 경험하자 그분을 믿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으로 15장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노래의 주제는 11절부터 기록되어 있다.
출 15:11-15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 15: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결론이다. 사람들은 많은 신을 섬기지만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 모든 신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참 신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신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애굽의 왕이든, 그의 군대든, 바다든 마찬가지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믿음이 없는 사람이든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도전
이것이 길었던 출애굽 사건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다. 그리고 성령은 이 메시지를 통해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는 이 이야기 속에 누구냐고.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애굽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모세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험해도 애굽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능력을 보여주셨고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다. 그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받았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환경을 통해 계속해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편에 서라고 하시는데 거절한다. 만약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면, 성령께서 출애굽기 14장을 통하여 하는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바란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지만 언젠가 끝난다. 그 때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한다. 늦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한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사람과 모세다. 같은 것을 듣고 같은 것을 경험한 이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는 것만 믿었다. 경험한 것만 믿은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믿음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경험했다.
이것이 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게 만들었다. 바로의 최정예 군대가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보는 것만 믿었던 사람들은 두려워했고 절망하며 원망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능력을 나타내셨을 때 그들은 보고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직후에, 15장이 끝나기도 전에 물이 없다고 그들은 원망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보는 것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지금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과 나에게 주시는 은혜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어려움은 그저 나를 괴롭게 하는 나쁜 일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세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눈에 보였던 바로의 최정예 군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성취였다. 그 순간은 두려운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슴 뛰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경험할 수 있는, 그리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기대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눈 앞의 군대는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약속하신 하나님은 더욱 강하시기에 두려워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고난이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괴로움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냥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 괴로움을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믿습니다라고만 부르짖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을 바로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안에 거하며 지금 그분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할 때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더 알 수 있기 때문이다(시 119:71). 그냥 경험이 참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믿음의 경험이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게 자라게 하고 주님의 모습을 닮게 한다.
고난은 여러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생각지 못한 때에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우리리 앞에 나타난다. 그때 나는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는가. 홍해와 바로의 군대 사이에 있던 사람들 중에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는가. 우리 모두가 고난 중에 믿음을 경험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고난 중에 있다면, 지금이 그 기회다.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을 더 알릴 수 있는 기회다. 내 믿음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더욱 자랄 수 있는 기회다. 이 고난 중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라. 그런 면에서 고난은 또 다른 은혜의 방편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 중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