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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고난을 즐거워했던 사람들
본 문: 골 1:24, 히 11:24-26
설교자: 조 성 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믿 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세 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안한 삶, 쉬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만일 충분한 이유가 있고 큰 대가가 지불된다면 고난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입니다. 뺨을 한 대 맞을 때마다 누군가가 십 억 씩을 준다면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즐거움으로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즐거워했던 사람들
모 세나 사도 바울,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편안한 삶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역시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버리고 천한 곳에 오셔서 가장 낮은 자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신앙생활과 고난은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베드로는 그 부름에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원하여 주님을 따랐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과 주님을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 것도 그가 자원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참을 수는 있지만 사도 바울처럼 고난을 즐거워하기는 어렵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부귀영화를 버린 것도 자원한 것이고, 마태가 세관에 앉아 일하고 있을 때 주님의 부름을 받아 따른 것도 자원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밭을 갈다가 지극히 값진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밭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밭에서 그만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이 없으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더 나은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강요가 아닌 스스로 이 길을 택한 사람들이고 스스로 그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고난의 종류
모든 고난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행동이나 선택의 결과로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습니다(시 119:71). 주님은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 15:20)”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했습니다. 이 고난은 성도와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받는 고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받는 고난 등 신앙을 지킬 때 받는 고난들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은 더 쉬운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고난을 선택했고 심지어 고난 받기를 즐거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난의 결과 때문입니다.
고난의 결과
고 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주어졌습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십자가 너머의 즐거움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고난을 잘 견딘다면 그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되도록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이 지나가게 해달라는, 편안한 삶을 살게 해달라는, 문제를 해결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을 떠 고난의 가치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이 가려져 고난의 가치와 엄청난 결과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우 리는 이 땅에서 고난 받기를 각오한 사람들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서약을 할 때 서로 기쁠 때만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병들거나 시련이 찾아와도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나의 주로 영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영접한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길을 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빌 1:29).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해서도 안 되고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그것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모든 영광과 함께 고난도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하는 것은 그의 재물을 함께 나누는 것 뿐만 아니라 고난과 고통도 함께 나누기를 결심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내가 남편의 병수발을 하면서 그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함께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고난의 길을 자원하여 기쁨으로 간 것은 그 길이 결코 손해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는 공주의 아들로서의 삶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오랜 광야에서의 삶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선택이 가치 있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어떤 것을 선택했을까요. 사도 바울도 자신의 특권을 버리고 성도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택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늘나라의 집을 바라보고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눈이 이 땅에 머물러 있다면 고난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하늘에 미치지 않는다면 고난을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편안한 삶을 원합니까, 고난이 많은 삶을 원합니까.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다보면 사회나 가정에서, 또는 교회에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있고 진정한 보상이 따라오게 됩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보시고 그 결과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대가가 지불될 때 우리는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마 5:11-12, 롬 8:18, 고후 1:5).
히 브리서 11, 12장 말씀을 보면 그렇게 고난 받은 이들은 이 땅에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즉각적인 보상을 원하지만 성경 속의 많은 이들은 이 땅에서 결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사도 바울과 모세 등 고난을 택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더 남을 곳에 투자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고 더 영원한 곳에서 풍성함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결론
고 난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은 고난 자체를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합당한 고난, 가치 있고 그 결과가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알고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 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값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삶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내 몸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채워지게 할 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기뻐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보시고 헛된 고난이 아닌 열매 있는 고난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