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거룩하신 너희 하나님을 보라

본문: 이사야 6장 1 – 5절

설교자: 최종혁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세나 천국에 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영생은 참된 삶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의도하셨던 그런 풍성한 삶을 의미한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행복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런 삶이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참된 삶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시험을 봐서 몇 점 이상이면 영생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알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영생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면) 영생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도 참된 영생을 누릴 수 없다. 로마서 1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롬 1:21). 어떤 면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 하나님이 유일한 경배와 섬김의 대상이 되신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어 사람들은 참된 삶을 살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사람들은 어떨까? 영생을 얻은 자들은 영생을 누리며 살고 있을까?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와 좀 다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영생을 누리며 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도 다른데 있지 않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무지와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주목해서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흘려 듣고 언듯 본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정말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대충 하나님은 이렇겠거니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로 하나님을 알았다고 생각하고 그런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책망하셨다. 그들의 예배를 책망하셨고 그들의 삶을 책망하셨다.

50:7–13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왔는데,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가져왔다. 마치 그들이 아니면 하나님이 굶어 죽기라도 할 것처럼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도대체 너희는 나를 어떤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물어보면 하나님을 그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그런 존재라고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배는 그러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편한대로만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마치 그들이 가져오는 제물로 먹고 사는 우상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무관심한 태도는 그들의 삶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50:16–20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17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18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19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20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고 그 언약을 그 입에 두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했다는 것이다. 대중을 앞에 두고 말씀을 가르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네가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하고 그 말씀에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으로 하나님을 바라 보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죄로 가득했다. 그들에 입에는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는 증거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운 말씀을 하셨다.

50:21–22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22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지만, 이제는 그들의 죄를 모두 드러내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시며 이들을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라고 부르셨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잊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고 함부로 대했다. 마음대로 행동했다. 하나님을 잊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자신들과 같은 사람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싸늘하게 최후의 경고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기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느껴야 하지만 그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친밀함은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다.

A. W. 토저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그의 책에서 기독교가 하나님에 대한 고상한 신관을 잃어 버려서 경박해졌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진리의 중요성을 잃어 버려서 교회가 교회답지 않아졌다는 말이다. 외적으로는 교회 숫자도 많아지고 성경도 많이 보급되고 신학교도 늘어나고 기독교 매체, 선교 기관 등 많은 성장을 이루고 있지만, 내적인 것들은 모두 잃었다는 것이다. 위엄을 잃었고 예배를 잃었고 하나님의 임재와 경외심 그리고 영적 기쁨도 잃었다는 것이다. 사실 상 교회는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본질적인 것은 다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교회는 경박해졌고 저급해졌고 세상과 같아졌다고 토저는 주장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정확한 진단이다. 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진단이다. 토저의 책이 세상에 나온지 20년이 훌쩍 넘었고, 그 이후로도 같은 목소리를 낸 이 시대의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많은 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교회는 더 세속화가 되었다. 성도들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의 기쁨을 누리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의 기쁨조차 누리지 못해서 우울해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것 같다. 정말 겨우 겨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오히려 세상의 친구에게 위로를 얻고 세상의 철학을 의지하고 있다. 세상 것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다. 교회 오면 따분하고 피곤한데 교회 밖으로 가면 재밌고 즐거운 것이다.

영화, 만화, 책, 음악, 스포츠 등 우리가 즐기는 모든 것들이 세상 것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영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즐거움은 세상에게 참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아니 그전에 이미 우리 스스로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도 믿음을 붙잡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어쩌면 그래도 혹시나 죽어서 지옥은 가지 말아야지 하는 막연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조차도 없이 그저 관성처럼 교회에 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작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낮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얕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나와 같은 분처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내 삶에서 하나님은 없는 분처럼 되어 버린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다.

그래서 이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기 원한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기 원한다. 설교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성경을 통해 보여 주는 것 뿐이다. 그 보여주는 것을 주목해서 보는 것은 듣는 사람이 해야할 일이다. 더 많은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도한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시리즈 제목은 이사야 40:9에서 가져왔다. 하나님은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시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에게 유다 성읍들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소리 높여 외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하나님을 보는 것,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그들에게 참된 위로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할 원리다. 우리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을 바로 볼 때 우리는 그에 합당하게 살 수 있고 그것이 곧 영생의 삶이다. 오늘은 이사야 6장의 말씀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기 원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거룩하신 너희 하나님을 보라”이고 본문은 이사야 6:1-5다.

놀랍게도 이사야 6장은 직접 하나님을 본 사람의 기록이다(1절, “내가 본즉”). 물론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사야가 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다. 실제로 나타나셨다기 보다는 환상 가운데 실제처럼 나타나셨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즉, 이사야는 참되신 하나님을 보았지만, 축소된 모습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사야를 압도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장면을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했다.

6:1–5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의 환상 : “내가 본즉”(1-3절)

이사야가 본 것은 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이시다. 그리고 그 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거룩”이었다. 왕에 대해서 1-2절이 말하고, 그 왕의 거룩에 대해서 3절이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1-2절)

이사야는 자신이 이 환상을 본 때를 분명히 말해주는데, 그 방식이 특이하다(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웃시야 왕 몇 년(이 경우 52년)이라고 하면 될 것은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는 특이한 표현을 사용했다. 52라는 숫자보다 웃시야 왕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웃시야 왕에 대해서는 역대하 26장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웃시야는 남왕국 유다의 왕이었다. 그는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52년을 다스렸다. 그 긴 통치기간 동안 웃시야는 군사적으로 유다를 강대하게 만들었고, 당시 부상하고 있던 앗수르로부터 자기 나라 유다를 잘 보호했다. 그래서 그의 통치 기간동안 유다는 경제적으로도 번성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가장 성공적으로 통치했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성공이 그에게는 독이 되었다.

대하 26: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왕은 제사장처럼 분향할 수 없었다. 왕이 이를 어기려고 하자 제사장들은 당연히 왕을 만류했다. 하지만 웃시야는 오히려 화를 내며 분향하려고 했고,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다.

대하 26: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그리고 웃시야는 남은 평생을 나병환자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이사야가 말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와 관련된 사건이다. 웃시야는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서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자신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이 더 높은 왕이셨고, 하나님은 웃시야가 하나님을 무시하게 그냥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도 나라를 일으켜 세웠던 왕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특히나 앗수르가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왕이 없다는 국가의 위기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사야는 복잡한 마음으로 성전으로 갔을 것이다. 인간적인 불안함이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셨다. 바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셨던 것이다(1절).

여기 사용된 표현 모두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표현은 하나의 사실을 강조한다. 먼저 이사야가 본 것은 “주”다. 3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표현했고, 5절에는 거기에 “왕”이라는 표현을 추가했다. 이 모든 표현이 강조하는 것은 ‘주권’이다. 이사야는 ‘주’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높이 들린 보좌”였다. 보좌는 왕의 의자다. 앉아서 쉬는 의자가 아니라 다스리기 위해 앉는 의자다. 오직 왕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로서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높이 들린 보좌는 그만큼 왕의 권위가 높음을 상징한다. 열왕기상 10:18-20을 보면 솔로몬의 보좌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거기서도 보좌까지 여섯 층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왕권이 높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본 주는 이렇게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다.

“앉으셨는데”라는 표현도 중요하다. 높이 들린 보좌는 있는데, 거기에 왕은 없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유다는 웃시야 왕의 죽음으로 마치 그렇게 왕이 없는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하늘 보좌는 그렇게 비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다. 이 땅에서 일어난 일과는 아무 관계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가장 높은 보좌에서 통치하고 계셨다. 사실 이 땅에 일어났던 그 일, 즉 웃시야 왕의 죽음도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하신 일이었다. 사람들에게는 놀랄 일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서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다(1절). 옷자락이 길다는 것은 단순이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왕의 옷은 화려하고 길다. 그리고 그것이 왕의 위엄을 보여준다. 따라서 보좌에 앉으신 주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이 왕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며 통치하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2절에는 수종드는 존재들이 언급되어 있다.

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스랍(‘불타다’)은 여기를 제외하고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에스겔에 나오는 ‘그룹’과 유사하지만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가장 유사한 것은 계시록 4:8에 나오는 네 생물이다. 여섯 날개를 가진 것이나 찬양하는 내용이 유사하다.

이사야는 특히 스랍들이 가진 여섯 날개에 주목했다. 날개는 당연히 날기위해 있는 것이니, 아마도 이들은 여섯 날개로 빠르게 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스랍들은 둘로만 날고 있었고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룩한 곳에 있었기에 발을 가리고 있었고, 감히 하나님을 쳐다볼 수 없었기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 스랍들은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사실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놀라운 존재인 스랍들도 하나님 앞에서 매우 낮아진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높으신 왕으로 보좌에 앉아 계셨다.

이사야는 그가 본 “주”의 얼굴이 어떻고하는 묘사를 전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 상세하게 다 보이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그만큼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사야가 가까이할 수 없는 높은 보좌에 앉아계셨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주의 얼굴이 어떻고 하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로 이사야는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불안했던 마음을 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사야가 하나님을 어떤 왕으로 보고 있었는지가 실제적인 그의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하나님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신으로서만 생각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든 여전히 불안했을 것이다. 앗수르의 신은 더 높은 보좌에 앉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왕이신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알고 있었다면 전적으로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93:1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10: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33:10–11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말할 때 의도하는 바다. 하나님께 놀라운 일은 없다. 하나님께 우연은 없다. 더 깊이 들어가면 정말 그렇게까지 말해야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까지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R. C. 스프로울은 이 세상의 분자 하나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갑갑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왕이신 하나님을 보기는 한 것이다. 거기서 ‘나’만 내려 놓으면 된다. 내가 왕이고 싶은데 하나님이 왕이라니 갑갑한 것이다. 나를 내려 놓으면 하나님이 이런 왕이심에 안심하고 평안할 수 있다. 이사야는 이 왕을 보았고 안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를 정말로 압도했던 것은 보좌에 앉으신 왕의 권위보다는 그 왕의 어떠하심이었다. 바로 거룩이다.

왕의 거룩(3절)

1-2절에서 이사야는 본 것을 기록했다면 3절에는 그가 들은 것을 기록했다.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서로 불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냥 대화를 주고 받은 것이 아니라 찬양을 주고 받았다.

먼저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주를 “만군의 여호와”로 부른다. 바로 이 분이 자신들의 왕이심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많은 성품 중 하나 “거룩”을 선포한다. 왕과 어울리는 성품은 ‘공의’나 ‘은혜’일텐데, 스랍들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거룩을 세 번 반복하여 선포했다. 하나님은 진짜, 가장, 온전히 거룩하시다는 의미다.

‘거룩’에 대해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개념은 ‘죄 없음’이지만, 하나님과 관련되어 이 단어가 사용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분리’ 혹은 ‘구별’이다. 즉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구별되시는 속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죄와 분리되신 도덕적인 거룩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스랍들이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서 칭송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거룩이 하나님의 핵심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본질적으로 피조물과 다르시다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함이다. 그 특별함, 다름, 위대함을 설명하는 것이 거룩이다.

우리도 지식이 있지만 하나님의 지식은 거룩한 지식이다. 죄가 없는 지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온전히 구별된 지식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는 ‘거룩한’을 추가하여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죄가 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보다, 그 어떤 사랑과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랑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공의는 거룩한 공의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룩한 능력이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다르시다. 그 위대하심을 스랍들은 계속해서 찬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인 거룩은 피조물 가운데 드러난다. 그것이 영광이다. 우리는 ‘영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라고 하면 바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지는 모두 알 것이다. 사전적 정의는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라고 되어 있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 무엇이 빛날 때 우리는 영광스럽다고 말한다. 그 아름다움이 드러날 때 영광스럽다고 한다. 대부분 어떤 사람 자체가 영광스럽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기면 그것이 그 사람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운동 선수들은 국가 대표로 선발되면 그것에 대해서 “영광스럽다”고 말한다. 어떤 뛰어난 사람이 나를 언급해주면 그것에 대해서 “영광스럽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영광은 어떤 업적을 통해 혹은 어떤 순간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항상 영광스러운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거룩한 존재 자체로서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분이시기 때문에 항상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빛’으로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빛을 입고 계시다고 말하기도 한다.

104:1–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2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하나님은 언제나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실 필요가 없다.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업적을 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빛나고 아름다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도 그런 의미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그대로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다.

스랍들은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도 찬송했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특성이 온 땅에 가득 드러난다는 의미다. 다윗도 이렇게 찬양했다.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여기서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거룩을 하나님의 영광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을 보면서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정말로 나와는 다른 위대하신 분이심을 다윗은 깨달았고 그래서 온 땅에 주의 이름이 아름답고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이 세상은 그냥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봐도 놀라운 일 투성이다. 매일 매일 해가 뜬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언제는 추웠다가 언제는 더웠다가 하는 계절의 변화가 놀랍지 않는가. 조그만 아기를 보고 있으면 저 조그만 것들이 어떻게 저 조그만 몸에 다 달려서 제 기능을 하는지 놀랍다. 아무 것도 못하고 있던 아이가 몸만 뒤집어도 부모들은 놀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기려고 하고 걸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 내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를 먹여줬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서 나도 못하는 일을 한다. 놀랍지 않은가. 이걸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놀라울 뿐이다.

우주를 봐도 그렇다. 우주의 광대함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쉽게 압도된다. 그 앞에서 내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감정이 싫지 않다.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온 땅을,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은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힘있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본다면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더욱 아름다우심을 알아야 한다. 무언가 강한 것을 본다면 하나님이 더욱 강하심을 알아야 한다.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그와는 비할 수 없이 높고 깊음을 알아야 한다. 선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선하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런 거룩 중에 도덕적인 거룩은 따로 언급을 해야할만큼 중요한 속성이다. 특히 이사야에서는 26번 정도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칭한다. 이 때는 도덕적인 거룩함이 강조되어서, 그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스라엘의 죄의 심각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24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이사야는 이런 백성들을 보아왔고, 지금은 그와 전혀 다른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있다. 이 장엄한 광경에 이사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이사야의 입을 열게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

이사야의 반응 : “내가 말하되”(4-5절)

6: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스랍들의 소리 때문에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사야는 멍하니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고 스랍들이 날아다니면서 찬양 모습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스랍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이 지진과 연기에 정신이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이 성전에 충만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화로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선포의 표현으로서 5장에서만 6번 사용되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백성들에게 화를 선포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하나님을 보자 자신에게 그 화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볼 때 그는 자신의 죄악됨도 함께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할 때는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볼 때는 그 즉시 자신이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했다.

흥미롭게도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의 죄를 언급한다. 사람의 죄 중 말로 범하는 죄가 가장 많기는 하지만, 이 순간에 “입술이 부정하다”고 특정해서 말하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들리지는 않는다. 보다 일반적인 표현인 “나는 죄악된 사람이다”가 자연스럽다. 아마도 이 순간 이사야는 선지자로서의 자신의 위선성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자기 입술로 백성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지만, 결국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사야는 아주 철저하게 낮아져 있다. 그는 죄 용서를 구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뿐이다. 선지자로서 어쩌면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되었다. 스랍들은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임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하며 무능력한지를 보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사야가 거룩하신 그의 하나님을 보았을 때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이사야를 깨끗하게 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그리고 자신을 자신의 자리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들어 사용하셨던 것이다.

 

자, 우리도 이제 이사야와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보였던 그 반응이 우리의 반응도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 깨져야 한다. 나의 무능력함과 무가치함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해야되는 것이 아니다. 나보다 뭘 잘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난 무능력해, 무가치해가 아닌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즉 나와는 전혀 다르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본 것에 대한 반응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낮아지고 깨진 마음은 곧 다시 교만한 마음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다. 먼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봐야 한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제대로 봐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제대로 본다면 이사야와 같은 반응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멀쩡한 경우들이 많다. 예전에 한 목사님이 트럭을 예로 들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사람이 몇 톤이 되는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혀서 몇 미터를 날아갔다고 말하는데, 그 사람이 상처 하나 없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는가?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 가능성은 둘 밖에 없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는데, 아무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혹은 그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사야가 하나님을 자기 종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조력자 정도로 여길 수 있었을까? 자기 삶의 일부에 어떤 영향을 주는 존재 정도로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본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내 종처럼 생각한다면 내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내가 하나님을 내 삶의 조력자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내가 하나님을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와서 예배드리면 되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있든 하나님이 없든 내 삶에 별로 달라질게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이사야가 보았던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만났다면 내가 종이 될 수 밖에 없다. 내 삶을 드릴 수 밖에 없다. 그 앞에서 낮아질 수 밖에 없다. 깨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다. 그분이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거룩하신 왕이시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라. 그리고 그 하나님께 합당하게 반응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