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같은 마음과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설교자: 조정의
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현상을 보거나 직접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한편,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한 분쟁을 겪고 있지 않다고 안심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분쟁의 기본적인 의미인 ‘갈라진 틈’, ‘균열’은 언제든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우리 가운데 생길 수 있으며, 가만히 놔두면 반드시 큰 파벌과 분열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은 교회 소식을 듣고 그에 관한 답변을 1-6장까지 적었고, 그 중에서 4장까지 교회 일치를 위한 권면을 다뤘다. 고린도 교회 가운데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로 심각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고린도 교회 나타난 분쟁을 신중하게 해부하여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성경적인 처방을 내릴 것이다. 그렇게 할때 성령께서 우리 교회의 틈과 벽을 발견하게 하시고, 더 큰 문제로 번지기 전에 예방하여,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 이 말씀을 적용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원한다.
1. 분쟁의 현상(11-12절)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은 바울이 들은 뜬소문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성도가 전해준 사실이었다. 바울은 어느 정도 소식통의 정보를 알리는데, 글로에의 집 편(11절), 노골적으로 대상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들은 소식이 신빙성 있는 증거에 근거한다는 걸 분명히 밝힌다.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분쟁이 나타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분쟁이 있다는 것의 의미는)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12절).
먼저, 여기 언급된 이름은 모두 고린도 성도에게 잘 알려진 일꾼들이다.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인도했던 목회자였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한 목사(고전 4:15), 아볼로는 그 뒤를 이어 교회를 양육한 목사, 게바(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으로서 당시 모든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중요한 건, 분쟁은 일꾼 사이에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끼리 경쟁이나 갈등은 없었다. 바울은 같은 편지에서 아볼로를 교회에 물을 준 일꾼으로 인정하고(3:6), 고린도 교회에 돌아갈 것을 많이 권했다(16:12). 불편한 관계에선 그렇게 하기 어렵다. 베드로는 편지에서 바울을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했다. 그래서 바울과 베드로 또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벧후 3:15). 결국, 문제의 현상은 인도자가 아니라 성도들 간에 나타났다. 성도가 자신이 추종하는 인도자에 따라 편을 나눠 갈라선 것이다: “나는 OOO에게 속한 자라!”
일반적으로 교회의 분쟁은 일꾼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먼저 일꾼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과 시기심으로 균열이 생기면, 각각 추종하는 무리가 들러붙어 더 큰 분쟁으로 번진다. 반대로 성도의 심각한 분열이 아무 문제 없던 일꾼 사이를 갈라놓기도 한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경우 목회자 사이엔 아무런 분쟁이 없었다. 그러면 성도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편이 나눠진 걸까? 분쟁의 원인에 관하여 많은 추측과 시나리오가 있고, 그중엔 합리적인 추정도 있다. 가령, 아볼로는 방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뛰어난 수사학, 웅변술 등을 익히는 대학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답게,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했다(행 18:24). 그는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겼다(행 18:28). 성도 중에서는 그의 탁월한 언변과 지식에 감탄하며 매료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점점 그를 추종하면서 한 분파가 되고, 자연스럽게 다른 인도자를 무시하거나 멀리하게 되었을 것이다(고후 10:10). 어쩌면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세상적 지혜를 책망하고(1:19), 말의 설득력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을지도 모른다(2:1-4).
일부는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아버지 같은 바울을 무례히 대하는 무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9장). 그래서 정이나 의리 때문에 또 다른 분파를 형성한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똑같은 책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게바파는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고린도 교회 안에 비교적 소수로 존재한 유대인 성도로 같은 배경, 전통, 율법, 역사를 가진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를 추종하느라 생긴 분파(8, 12장), 그리스도파는 이도 저도 속하고 싶어 하지 않은, 그러나 어떤 면에서 모든 인도자의 권위를 무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돌봄을 받고 있다고 교만하게 생각했던 무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이 합리적인 추정이 될 수 있지만, 정확한 분쟁의 원인을 다 알 순 없다. 표면적 원인은 찾기 어렵지만, 우리는 바울이 내린 진단을 통해 분쟁의 본질적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2. 분쟁의 진단(13-17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3절). 이 질문들이 기대하는 정답은 모두 ‘아니오’이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으셨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뉘신 것처럼 그 몸인 교회를 나누었고, 바울, 아볼로, 게바가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례를 그 일꾼들 이름으로 받은 것처럼 행했다. 14-17절까지는 생각보다 길게 세례에 관하여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데, 이는 고린도 성도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가지고 그 인도자와의 특별한 관계를 입증하려고 애썼던 정황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보(회당장, 행 18:8), 가이오(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롬 16:23)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14절). 왜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이 감사한 일이 되는가? 그 사실이 아무도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15절). 흥미롭게도 바울은 세례를 베푼 또 다른 성도들이 떠올랐다: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16절). 어쩌면 대필자 소스데네가 이 사실을 떠오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두 사람 외엔 세례를 베푼 자가 없다고 확언했다가 스데바나 집(16:15) 사람들이 떠올랐을 때, 그 외에도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솔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가 바울에겐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더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나? 바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얼마나 세례를 베풀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했는지가 중요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보내신 목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17절a). 얼마나 해박한 지식과 대단한 설득력을 가진 언변을 가졌는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달되는 것이 중요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절b). 바울의 삶 그리고 사역은 온통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고린도 교회 성도가 왜 서로에게 벽을 세웠는지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을 다 파악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났다. 해박한 지식에 매료될 수도 있고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강력한 웅변력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그래서 어떤 설교자에게 애정이 생길 수도 있다. 자기 문화, 역사, 법, 전통, 민족성을 잘 이해해 주는 지도자에게 더 큰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고, 처음부터 해산의 고통으로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수고하며 길러준 아버지 같은 인도자에게 더 큰 정과 사랑을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다. 사실상 우상숭배의 문제와 같다.
중심이 사람에게 옮겨지면, 설교자가 선포한 메시지가 그리스도를 증언했느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가 설교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자의 말씀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싫어하는 설교자의 말씀은 비판적으로 튕겨낸다. 추종하는 설교자가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면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고, 그 외의 설교자가 그러면 불필요하게 설교를 어렵게 한다고 충고한다. 좋아하는 인도자의 유머는 재치 있고 영리하다고 하고, 좋아하지 않는 인도자의 유머는 쓸데없고 헛되다고 한다. 똑같은 교회 운영이나 사역 활동도 어떤 사람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달라지고 반응도 달라진다.
분쟁의 문제가 더욱 교묘하고 심각한 이유는, 분쟁 가운데 있으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문제야’,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다 이렇게 생각할걸’, ‘나는 지금 교회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 싸우는 거야.’ 이렇게 자기합리화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요구하는 겸손과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에 역행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분열이 있는 곳에는(가정, 교회) 항상 철저한 자기중심성이 있다. ‘내 생각’, ‘내 의견’, ‘내 판단’, ‘내 감정’, ‘내 평판’, ‘내 유익’을 가장 먼저 추구하려는 욕구가 분명히 나타난다. 자기중심성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의 본성이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다(약 4:1). 자기중심성은 또한 마귀적이며 세속적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성도는 자기중심성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끊임없이 바꿔야 한다. 그럴 때 분쟁이 사라진다.
3. 분쟁의 처방(10절)
바울은 분쟁을 처방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 성도를 애정어린 표현으로 형제들아, 내 형제들아라고 부른다(10, 11절). 그리고 ‘곁으로 다가와 돕다’라는 뜻을 가진 “권하노니”라고 표현으로 친절하고도 단호하게 분쟁을 이렇게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분쟁과 반대되는 개념이 세 가지가 나온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이것은 교리, 태도, 가치관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성도는 본질적인 진리에 관하여 하나 되어야 하고, 성경적인 가치 기준을 공유해야 한다. 성경이 요구하는 합당한 태도를 함께 갖춰야 한다.. 이렇게 서로가 온전히 맞춰지기 위해 애쓰는 것이 분쟁을 없애는 길이다. 바울은 이 권면을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가 주라고 부르는 분이시고,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가르치셨는지가 성도가 가져야 하는 마음, 해야 하는 말, 품어야 할 뜻을 결정한다.
빌립보 교회도 분쟁의 문제가 있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신실한 복음의 동역자 자매들 간의 갈등이 교회 전반적인 균열을 가져왔다. 바울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각각 권하면서, 그들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빌 2:5). 우리 모두의 주님,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같은 마음 곧 겸손하고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마음을 품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중심에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두기를 원하신다. 누가복음 23장 26절부터 43절까지, 예수님께서 관정에서 끌려가 십자가에 달려 숨지시기 직전까지 그분 입에서 나온 세 마디의 말을 기록했다. 한 번은 자기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자들에게(“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8), 또 한 번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대항하는 모두를 바라보며(“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4), 마지막으로는 함께 달린 강도 중 회심한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채찍에 심히 맞고 모욕적인 일들을 당했다. 십자가를 자기 스스로 질 수 없어서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에게 대신 들고 가게 해야 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는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 숨질 때까지 치욕과 고통을 참아야 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이웃을 향한 사랑 중심적이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이 그런 분이시고,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모든 분쟁 가운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우리 안에 그 마음을 품어야 한다. 분쟁의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초대 교부 클레멘트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분쟁 문제를 다룬 뒤 약 40년 후에 고린도 교회에 또 편지를 써서 남아있는 분쟁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40년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해결이 안 된 것이다. 당신의 마음 중심에 자신을 두지 말고, 목사도 두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을 두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 안에 분쟁은 사라지고 온전히 합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분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