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

본문: 누가복음 17장 11-19

설교자: 최종혁

 

다른 사람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 것은 사회적 관습(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감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돈을 갚지 않았을 때처럼 법적인 재제를 가할 수는 없다. 감사하지 않는 것 자체가 어떤 실체적인 상해나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사회적 관계에서 문제를 가져온다. 차가 길게 늘어서 있는데 끼어드려는 차에게 양보를 했는데 그 차가 양쪽 깜빡이(비상등)로 감사(+미안함)를 표하지 않으면 좀 기분이 그렇다. 언제부터 생긴 문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샌가 사회적 관습이 된 것이다. 물론 거기서 더 나아가서 비상등만 켜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아직 사회적인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여튼, 사회적 관습이라는 것은 법적인 강제성은 없지만 지키지 않았을 때 그 사회 안에서는 관계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고, 그런 면에서의 강제성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감사도 그렇다. 감사하지 않아서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는 분명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를 생각해 보면 단순히 감사는 그 관계에 있어 좀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느냐 감사하지 않느냐가 그 관계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요소다. 모든 사람의 죄악된 상태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보라.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자신을 꽁꽁 숨겨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고 그렇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를 보면 지금처럼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때가 없다. 물론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며 실제적은 무신론자로서 살아왔지만, 이론적으로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더 타락해 가는지를 이런 현상을 보면서도 알 수 있다.

여튼,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죄의 특징이고 죄인의 특징이다.

반면에 감사는 하나님의 백성, 구원 받은 자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전쟁에서의 승리 같은 큰 일 뿐 아니라 매일의 음식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기 때문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호의(은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시편이 이런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고 감사할 것을 명령한다. 바로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시편 118편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이었고 주된 명령도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것이었다. 구약의 제사는 계속해서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이는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서신서의 내용을 보면 항상 그 안에 감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단순히 감사의 태도를 가질 뿐 아니라 항상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7:11-19에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10명 중 1명은 감사했고 나머지 9명은 감사하지 않았다.

상황

먼저 상황은 이러했다.

17: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은 뭔가 평범한 일상인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누가복음 9:51에서 시작되어 19:27절까지 길게 기록되어 누가복음의 중심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여정이다. 그 시작인 9:5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이 여정은 다른 여정과는 달랐다. 유대인 남자로서 예수님은 지금까지 수없이 예루살렘으로 가셨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셔야 했다. 이것이 십자가를 향한 마지막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예수님은 일부러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가 그를 살리셨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마침내 공회를 통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가셨다가 더 북쪽으로 가셨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길에 합류하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이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수배령을 내린 상태였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예수님은 이제 굳은 결심을 하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던 것이다. 본문의 사건은 이 마지막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장소는 우리가 특정할 수 없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한 마을이다.

17: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정확히 말하면 마을 안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을로 들어가려고 하실 때 벌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마을에서 격리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10명의 나병환자 이야기

예수님께서 마을로 들어가려고 하실 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16절에서 한 사람을 가리켜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나머지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 지역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격리된 나병환자들이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나병”은 구약에서는 다양한 피부 질환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신약에 와서는 오늘날 한센병으로 불리는 질병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순우리말로는 ‘문둥병’이라고 불렸는데 ‘문드러지다’라는 동사에서 온 병명이다. 이 병이 악화되었을 때 살이 썩어 문드러지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흉측하고 치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문화권에서 이 병을 하늘이 내리는 형벌로서 이해했었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병을 죄에 대한 직접적인 형벌로서 내리신 경우가 있다. 나병이 항상 그렇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민수기에서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을 때(민 12장)와 웃시야 왕이 교만해져서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려고 했을 때(대하 26장)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나병을 고침 받고 돌아갈 때, 엘리사의 사환이었던 게하시가 나아만을 쫓아가서 거짓말을 하고 나아만에게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온 일도 있었다. 그 때도 게하시에게 나병이 생겼었다(왕하 5장).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큰 질병이나 선천적 장애를 개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했었는데, 나병도 당연히 그런 질병이었고 앞서 언급한 그런 이유들로 더욱 심각한 죄의 결과로 여겨졌었다. 또한 이들은 율법에 따라 그들이 살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살아가야 했다. 즉, 나병 환자들은 육체적 질병으로 고생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의 단절을 겪어야 했고, 또한 영적으로도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에서 삶의 동기나 희망을 찾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 10명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율법으로 인해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들은 거리를 두고 멀리서 예수님께 소리 높여 말했다.

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병은 종종 후두에도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목소리가 거칠고 쉬게 된다. 이들도 아마 그런 목소리로 힘껏 예수님을 불렀을 것이다. 목이 어떻게 되든 이것이 그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쯤 예수님의 이름을 많이 알려져 있었고 특히나 이렇게 손쓸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었다. 예수님은 이미 다른 나병 환자도 고치신 적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이 사용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요청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의 의미도 분명하다. 사실 표현 자체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표현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구걸을 위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에게 사람이 일반적으로 베풀 수 있는 긍휼은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어쩌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분명 소문을 듣고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했던 때도 아니다. 이들은 혹시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소리쳤을 것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우리를 고쳐달라고 반복해서 외쳤을 것이다.

그들의 이런 간절함이 통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셨다(14절, “보시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복음서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뒤에 “그리고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몸에 손을 대시며”와 같은 말씀이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시고 말씀하셨다(“보시고 이르시되”). 여전히 먼 거리였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소리치셔야 했을 것이다.

그럼 멀리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부정한 자들아 물러가라”는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런 식으로말씀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은 상당히 이례적인 말씀을 하셨다.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들을의 병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셔서 멀리서 말만 하셨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서 누가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병을 고쳐주셨다(눅 5:13). 다른 복음서의 기록을 봐도 예수님은 나병이든 어떤 다른 병이든 그것을 개의치는 않으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특별한 의도 혹은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하셨을 수 있다. 그 목적은 뒤에서 볼 수 있지만 이들의 믿음이 어떤 민음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열 사람은 동일한 상황에 있었다. 모두가 절망적이었고 모두가 비참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이례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바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였다.

이 말은 레위기 14장의 규례와 관련되어 있는 말씀이다. 레위기 14장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자신이 나았다고 생각되면 제사장을 찾아가서 진단을 받고 확인을 받아야 했다. 일단 제사장이 병이 나았다고 판단하면 진영 밖에서 정결한 새 두 마리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치뤘다.

그렇게 하면 진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장막, 즉 자기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나병 환자는 7일을 더 보내고 8일째 날에 어린 숫양 두 마리와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 등으로 (혹은 가난해서 그렇게 할 수 없으면 더 적은 짐승으로) 정결하게 하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 자기 장막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그 건강 뿐 아니라 삶도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10명의 나병 환자에게 동일하게 이것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아직 이들은 병이 낫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마자 이들의 병이 나았다는 말씀은 없다. 이들의 살은 여전히 문드러져 있었고 목소리도 회복되지 않았다. 어떤 회복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입장에서 예수님께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그냥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든지, 아니면 예수님께 먼저 병을 고쳐주시면 제사장에게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들 10명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자리를 떠났고 가는 길에 깨끗함을 받았다.

17:14 …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여기서는 순종이 곧 믿음이다. 믿음과 순종은 항상 함께 하지만 때로는 그 거리가 좀 멀어서 확연히 구별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순종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구약의 나아만도 비슷한 경우였다. 그는 요단 강 물에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나을 것이라는 엘리사의 말을 전해 듣고 처음에는 화를 냈었다. 그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엘리사가 나와서 치유 의식 같은 것을 행해서 병을 고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엘리사는 직접 나오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서 요단 강에서 몸을 씻으면 낫는다는 말만 전했던 것이다. 나아만은 차라리 자기 나라에 더 좋은 강물이 있다며 거기서 씻는게 더 낫겠다고도 말했지만, 결국 그 엘리사의 말을 따랐을 때 나병이 나았다. 믿음의 순종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여기 10명의 나병 환자도 마찬가지다. 사실 병이 낫는데 믿음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모습을 보면 때로는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기도 하셨지만 때로는 그것과 아무 상관없이 그냥 병을 고치기도 하셨다. 다만 이 경우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셨고 그들은 순종으로 믿음을 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깨끗함을 받았다.

이제 여기서 주목할 것은 10명이 모두 다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다 동일하게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 모두가 병 고침을 받았다. 그들은 정말로 간절히 원했던 것을 얻었다.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던 질병이 사라졌다. 이들에게 회복의 기쁨이 찾아왔다.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10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중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1명의 감사한 자 이야기

17: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

10명이 다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깨끗함을 받았다. 그렇다면 10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중 한 사람에게만 집중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만 나머지 9 사람과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던 길을 갔다. 기쁘게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돌아왔다. 기쁘게 돌아왔다. 이 한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만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보았기 때문이다.

17:15–16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거칠고 쇳소리가 나는 목으로 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던 이 사람은 이제 깨끗한 목으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지금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9명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만 보고 있을 때, 이 사람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통로로만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다. 발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겸손의 의미를 넘어선다. 이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었다. 또한 “감사했다”는 표현도 여기를 제외하면 신약 성경에서 항상 그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즉, 이 돌아온 사람의 행위를 성경은 단순히 은혜를 베푼 사람에 대한 감사의 행위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행위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배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통로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그 기적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누가는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짧게 덧붙인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이방인보다도 못했던 혼혈 민족인 사마리아 사람이 가장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일을 한 것이다.

18절을 보면 예수님도 이 사람의 행위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의 기준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는 성전에서 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구약의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성전을 떠났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요 4:21).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머지 9명은 어쩌면 후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림자를 붙잡고 실체를 놓쳤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물에 정신이 팔려서 선물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었고 그렇게 인생의 가장 크고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바로 구원의 기회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 전체가 그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에 대해서 물으신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혹시 힘을 잘못써서 한 사람만 깨끗함을 받고 나머지 아홉은 깨끗함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닌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 뿐이다. 열 사람이 다 똑같이 깨끗함을 받았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정말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여기로 오는 중인지 어떤지 궁금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기 없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계신 것 뿐이다.

그리고 이는 책망이다. 다 깨끗함을 받았다면 다 돌아왔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18절의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차별적 발언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을 차별하는 유대인에 대한 강한 책망이다. 절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너희가 생각하고, 성전에서도 이방인의 뜰 이상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이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와서 감사하는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는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책망이다.

이것은 단지 감사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드러내는 시험이었다.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이 사마리아 사람이 구원 받는 믿음을 가졌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정말로 가서 그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것을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깨끗해진 육신 뿐 아니라 깨끗해진 영혼으로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럼 이 말씀이 나머지 아홉 사람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인간적인 예의가 부족했던 사람들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하고도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은 사람들이다. 몸은 깨끗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깨끗하게 되지 못했다. 감사 한 번 했다고 혹은 안했다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감사하지 않는 마음이 그들의 믿음의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10명의 나병 환자 모두 예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라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병을 고치실 수 있으시다는 믿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10 사람이 모두 동일하게 깨끗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 9명은 거기서 멈췄다. 예수님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자 더 이상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군중들과 같았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바랐다. 예수님의 치유를 원했고 예수님께서 배부르게 해주시기를 원했다. 딱 거기까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고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면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이유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예수님에 대한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믿음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매우 적나라한 표현으로 경고했다.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사람마다 경험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얻을 것을 다 얻으면 혹은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믿음을 버리고 떠난다. 애초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에 진심으로 감사하지도 않는 것이다. 애초에 원했던 것을 얻은 것 뿐이기 때문이다.

고침을 받은 나병 환자 9명이 그러했다. 그들의 최종적인 결과까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 일이 벌어졌던 때는 그랬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자 예수님을 떠났다.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의 기적을 통해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을 예배하고 감사드렸다. 처음 그가 원했던 것은 육체의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원하게 되었다. 바로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구원 받은 한 사람은 감사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 한 사람 만이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감사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던 뿐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도전

14: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하신다.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마 5:45).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일들을 우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로 치부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도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여러 면에서 특별한 은혜를 누렸었던 것처럼 지금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자녀들 혹은 어떤 이유로든 교회 안에 있거나 가정에 믿음을 가진 구성원이 있는 경우가 그럴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 뿐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인자하심)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앞서 언급한 무신론자와 전혀 다를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많이 주신 자에게서 더 많이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더 무거운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9명의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도 감사한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들이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증거였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내가 이렇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한다. 감사한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야 하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감사를 표현한다. 예배한다는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나에게 주어진 선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기는 하지만 ‘항상’ ‘모든 일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여전히 예전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특징이다. 죄인의 특징이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라면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습관처럼, 하지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이 항상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복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삶에 가져다주시는 복들을 세어 봐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정신을 팔리면 안된다.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고 하나님께 나와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모든 것을 당연히 여기는 죄악된 마음을 버리고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기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자들이 되자.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