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때

본문: 고린도전서 3장 10 – 15절

설교자: 조정의

교회가 함께 자라는 과정을 농업에 비유한 바울은, 이제 건축업의 비유로 교회가 함께 지어져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9절). 농업의 비유는 다음의 질문에 답을 준다: ‘누가 자라나게 하시는가?’ 정답은 “오직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밭에서 동역자들로 일하는 종들은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 상을 받도록 충성해야 한다. 건축업의 비유는 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교회를 세워야 상을 받는가?’ 

건축업의 비유에서 우리 모두는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고귀한 사역에 동역자들로 고용된 일꾼이다. 각각 어떻게 세울까를 조심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본문이 말하는 원칙대로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준공검사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 교회의 설계자이신 하나님의 방식대로 함께 교회를 세워가고, 우리가 세운 공적에 대하여 약속된 상을 받도록 하자.

1. 명령: 어떻게 세울까 조심하라(10절)

앞서 농업의 비유에서 바울과 아볼로가 실제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각각 주께서 주신 대로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로 등장했던 것처럼, 건축업의 비유에서 바울 및 동역자들이 다시 ‘건축자’로 등장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10절).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터를 닦는 자와 그 위에 세우는 자로 바뀌었다.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말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대로 터를 닦기 때문에 지혜롭다(제대로 된 터를 놓을 줄 아는 지혜). 또한 ‘지혜롭다’는 단어는 ‘능숙한’의 의미를 갖는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곳마다 가서 교회의 터를 닦는 일에 충성했고, 능숙하게 그 일을 잘 해냈다. 

하지만 바울은 오늘날 많은 교회 개척자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한다: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10절). 수고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많이 수고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니라 주가 하셨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오직 하나님 은혜로 바울은 지혜롭게 교회의 터를 닦는 수고를 했다. 이제는 그 위에 어떻게 세우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10절). 먼저, 이 명령은 모든 성도에게 주어졌다(각각). 일차적으로는 사도들이 놓은 복음의 기초 위에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일꾼들(전도자, 목사, 교사 등)에게 해당하지만, 사실 모든 성도가 각각 주가 맡기신 은사로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함께한다(“누구든지”, “각 사람”, 5번, 12~15절). 또한 이 명령은 현재형으로(어떻게 세울까) 교회를 세우는 일은 주님 오시는 날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힘써야 할 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지금도 사도들이 닦아 놓은 터 위에 교회를 함께 세워가고 있다.

2. 기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1절)

명령은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이다. 아무 곳에 막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기초 위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건물의 터, 교회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1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참된 터가 되신다.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복음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교회의 터를 닦아 두었고, 이 터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주님이 말씀하신 반석은 같은 뜻의 이름을 주신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의 터를 놓으신 것은 사실이지만(엡 2:20), 그들이 교회의 기초가 아니라 그들이 선포한 메시지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가 교회의 기초다(마 16:16).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엡 2:20). 건축업의 비유에서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건물의 기반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모퉁잇돌은 건물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석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건축자는 그 위에 무엇을 세우든지 그 기반과 단단히 연결되게 하려고 애쓸 것이다. 주님도 건축업의 비유를 사용하신 적이 있다. 집을 세울 때,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에 관하여 말씀하셨다(마 7:24-27). 주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 행하지 않는 자를 빗대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무엇을 하든지 세상의 지혜대로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각각 행한다면, 그리스도의 터에 기반하지 않은, 다른 말로 모래와 같은 다른 터를 닦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했다. 바울이 복음으로 닦아 놓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터가 되어야 했지만, 그들은 세상의 지혜, 세상에 속한 자랑거리를 그 터 위에 세우려 했고, 그것은 결국 교회의 기반 자체를 뒤집어엎는 위험을 초래했다. 고린도 교회만 ‘어떻게 세울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어야 하는 게 아니다. 성경학자 고든 피가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말한 것처럼 “이 경고는 안타깝게도 세상 지혜에 기댄 채 모든 인간 시스템으로 교회를 세워가려는 사람들에게 해당한다”(NICNT, 208p).

어쩌면 당신은 교회를 세우는 사람은 교회를 인도하는 소수 일꾼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이 사용한 또 다른 건축업의 비유를 들어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당신도 연결된 건물의 일부다. 당신도 모퉁잇돌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그러므로 어떻게 세울까 조심하라. 각 사람이 세운 공적을 주가 시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3. 평가: 각 사람의 공적을 시험할 것(12-15절)

12-15절은 건축업의 비유에서 완료된 건축물의 준공검사에 해당한다. 바울은 그 날에 관하여 확신을 가지고 공포한다.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단언한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13절). 공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그론은 ‘행위’, ‘업적’(새번역)을 뜻한다. 각 사람의 행위, 업적을 드러내기 위하여 정하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롬 14:12).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운 업적은 12절에서 두 종류로 분류되어 있다. 첫 번째는 , , 보석(값비싼 돌), 두 번째는 나무, , . 어떤 사람은 건축 자재의 가치(가격 차), 목적(성전, 일반 주택) 등으로 분류 기준을 설명하려 하지만, 13절 후반절에 나오는 것처럼 두 부류의 건축 자재의 차이는 하나는 불에 타지 않고 다른 하나는 불에 탄다는 것이다: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금, 은, 보석은 불에 타지 않는다. 그러므로 14절이 말하는 것처럼 불로 시험한 결과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 풀, 짚은 불에 타서 없어지는 물질이다. 그러므로 15절에 나온 것처럼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을 것이다. 성경에서 불의 심판은 너무 강력하여 대개 영원한 심판을 받는 대상에게 사용된다. 하지만 본문은 예외다. 바울은 지금 성도들을 대상으로 편지하고 있고, 자신이 닦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성도들이 각각 무엇을 세울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심판을 받을 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지혜롭게 일하는 자와 자기를 위하여 어리석게 일하는 자, 하나님의 지혜를 좇아 행하는 자와 세상의 지혜를 좇아 행하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공적이 다 타서 없어지는 자는 영벌을 받을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15절 하반절에서 이를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15절).

‘휴~ 안심이다. 어쨌든 구원은 받은 거잖아…’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안도감을 주는 말씀이 아니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말씀이고, 극적인 구원의 짜릿함을 맛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풍성한 은혜에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맛보게 한다. 불 가운데서 받은 구원은 다 타버린 집에서 겨우 몸만 빠져나온 불쌍하고 궁핍한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께서 닦아 놓으신 터 위에 아무 것도 세우지 못한 자,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은 많은 것을 쌓아올렸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도 가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불쌍한 자를 가리킨다. 누가 주님께 이런 평가를 받고 싶겠는가?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그분이 가치 있다고 평가하시는 것들을 세우고 싶어 한다. 금, 은, 보석 같은 공적(업적)이다. 중요한 질문이 따라온다. 그게 무엇인가? 몇 가지 오답이 있다. 먼저, 교회 안에서 행하는 것만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와 섬김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역할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충성하는 것을 평가절하할 소지가 있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 종들과 상전, 부모와 자녀, 권세자와 시민에게 각각 주신 명령이 있다.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상을 약속하셨다.

또 다른 오답은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일의 가치를 세상의 기준으로 등급 매기는 것이다. 가르치는 것이 구제하는 것보다 가치 있다고 보거나(드러나는 일, 더 많이 주목받고 인정받는 일), 똑같은 가르침이라도 더 화려한 언변과 탁월한 지혜를 자랑하는 가르침이 더 가치 있다고 보는 것이다(고린도 교회의 문제).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냉수 한 그릇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면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다. 반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마 6:16).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인가? 우리의 업적 중에 금, 은, 보석으로 평가받을 업적은 무엇일까?

터와 그 위에 세워진 공적의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각각 무엇을 세우든지 그 기초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힘입어 행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일이 바로 가치 있는 업적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은사의 가치를 억지로 구분하지 않는다. 각각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서로 봉사한다.

말하는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뚜렷이 나타낸다. 손으로 봉사하는 은사는 자기의 부요함이나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급하신 힘으로 겸손하고 자비롭게 섬긴다. 무슨 일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품어야 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준공검사를 통과하는 공적이다.

우리는 참 바쁜 삶을 산다. 할 일은 또 왜 이렇게 많은가? 고단한 직장생활에 지치고, 틈틈이 가정을 돌보는 일도 쉽지 않다(가사, 양육 모두). 주말을 기대하며 버티면 교회 일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 ‘힘들다’, ‘죽겠다’, ‘쉬고 싶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말이 습관처럼 튀어나온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쳇바퀴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힘들고 바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와 그들이 삶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이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직장, 가정, 교회 어디서든 부르신 소명을 따라 상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일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우리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해 보라. 허드슨 테일러와 중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찰스 스터드가 한 이 말이 매일 당신의 귓가에 맴돌고 종일 입으로 읊조리는 말이 되기를 바란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것만 영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