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반응(?)
최근에 Grace to Korea에 기고한 글 중에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글이 아마도 지난주에 쓴 “코로나 19, 그리스도인이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었던 것 같다. 더 오랜 공방이 오갔던 글은 무신론에 대한 글이었는데(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비판한 글이었다), 그땐 무신론자나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으로부터 노골적인 비방을 받았고(비판이라기보다는 비방과 욕설에 가까웠다), 이번엔 대부분 기독교인 나아가 목사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지난 칼럼을 요약하면,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빠르게 확산되는 코로나 19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떨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 질병이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함부로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2) 질병이 모두 정부 탓이라고 몰아세우는 정치싸움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3)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공포심을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
1)번과 3)번을 문제 삼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1)번 의견에 대한 근거는 오직 하나님만이 지금 일어나는 일의 목적을 확실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질병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시는지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지금의 상황을 분별해 볼 수도 있다. 필자가 하지 말자고 주장한 것은 “규정”이었다. 마치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일의 목적을 틀림없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3)번 의견에 대한 근거는 허위 뉴스나 거짓 정보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엔 SNS나 유튜브 채널이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어, 개인이 원하는 정보를 선택하여 수용하고 그것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아 이 부분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를 배려하며 조심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좋지만, 잘 분별하여 오직 참된 것을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문제가 된 두 번째 항목
대부분의 공격을 받은 건 2)번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진영 논리에 익숙한 혹은 지금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정부의 모습에 실망한 독자의 관점에서 다음의 주장은 마치 ‘정부가 잘못한 것이 있어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무조건 지지해 줘야 한다’로 들렸던 것 같다.
지금의 위기에 정부가 책임이 있어서 그것을 비판할 필요가 있을지라도, 그 말을 할 때와 하는 방식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잘못하면 이때를 이용하여 정치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그리스도인의 진심이 심히 왜곡될 수 있고, 건전한 비판으로 정부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바라는 마음과(롬 13:4)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롬 13:1)에 복종하는 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심판을 자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롬 13:2) <지난번 칼럼 두 번째 항목 마지막 문단>
존 맥아더 목사는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설교에 앞서 한 적이 있다. 그때 김세윤 박사와 서로 다른 결론을 낸 것을 비교하며 맥아더 목사를 지지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대략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상은 침몰하는 배와 같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향해 가라앉는 중이고, 그때까지 교회의 사명은 주님의 주권(“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으로 주신 명령(“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에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교회가 그 명령에 순종하는 내내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다(“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렇다고 땅에 세워진 국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부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로 선을 베풀고 악을 보응 하는 역할을 한다(4절). 과거엔 참정권이 극히 제한적이었지만(로마 시대만 해도), 현재 우리는 국민으로서 더 악한 정책보다는 덜 악한 정책을 가진 정당을 선택할 수 있는 법으로 보장된 권리가 있다.
확실한 것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국가를 이끌어갈 사람은 없다(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기다린다). 둘 중 누가 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준에 가깝게(혹은 더 멀지 않게) 선을 베풀고 악을 보응할 것인지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국가가 보장한 참정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시대와 정치를 초월한 그리스도인의 사명: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위임령
앞에 말한 기본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필자는 현재 코로나 19로 온 국민이 공포를 느끼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외쳐야 하는 메시지는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롬 12:15). 모든 사람이 울고 있는 지금 우리는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벧전 3:15-16). 그리스도인이 말(“우리 속에 있는 소망”) 그리고 삶(“선한 양심”, “선행”)으로 드러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복음이 지금 질병으로 울고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평안과 구원의 메시지이다.
초대 교회는 역병이 돌던 로마 제국 안에서 평안과 기쁨으로 정부가 내버린 시신을 장사지내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등 울고 있는 시민과 함께 울고 그 황량한 가슴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채워준 그리스도의 대 사명에 철저히 충성했던 공동체였다. 로마 시민뿐 아니라 정치인들도 복음에 충성했던 기독교 공동체를 보고 감동했다.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은 다른 나라처럼 국가의 체제가 바뀌거나 과거처럼 참정권이 사라지더라도 변함없는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되는 사명이다. 지금 국민에게 보장된 참정권을 통해 투표할 수 있고, 정치적인 발언이나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첫째, 마땅히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처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복종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 우선순위는 항상 복음에 있다.
지난 칼럼 두 번째 항목에서 지적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 정치 참여나 위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방법을 겸손히 비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필자는 그것이 지금 현 정부를 내리고 새 정부를 세우려는 정치싸움의 거대한 흐름에 동화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마치 지금의 정부가 무너지지 않으면 기독교가 함께 무너지는 것처럼, 지금의 정부는 반기독교, 반민주주의, 친동성애, 친이슬람 세력이므로 반대하고 거스르는 것이 기독교인의 마땅한 사명인 것처럼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난 탄핵 집회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는데, 반대 진영이었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부패와 비리에 대항하는 것이 하나님 쪽에 서는 것이라 믿고 거리에 함께 나가 정권을 무너뜨리자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우선순위의 문제
두 가지 문제가 여기서 발생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첫째, 로마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바”(1절)이며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라는 말씀(2절)에 비추어 볼 때, 법으로 보장된 참정권을 통해 투표하고 건전한 비판을 하는 수준을 넘어 현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원하는 권세를 세우려는 거대한 정치싸움에 함께 휘말리는 것의 문제이다.
두 번째 문제는 더욱 심각한데, 그리스도인이 첫 번째 사명을 잊어버리고 정부를 끌어내리려는 정치싸움에 동참하는 것을 자기 사명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가진 자로서 그 이유를 물을 때 대답할 복음을 항상 준비하고, 기회가 있을 때 전달하는 삶이 아니라, 계속해서 정부를 비난하고 끌어내리는 소식을 전하는 삶을 산다(단지 지금의 정부를 말하는 게 아니다. 과거 반대의 상황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성경이 아주 분명히 말하고 있는 동성애나 낙태, 불륜의 죄를 사회 가운데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담대히 선포할 때도, 그 목적이 그리스도의 대사명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얻기 위해 세상의 죄를 책망하는 것이지, 영혼을 돌로 쳐 죽이기 위해 죄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고발은 그 죄를 참으로 회개하는 은혜 받은 영혼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예수님은 종종 당시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을 꾸짖고,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기도 하셨지만(눅 13:32), 그분의 삶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하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며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위임령에 충성하는 삶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도들을 필두로 종교지도자들의 협박을 거스르면서까지 복음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사도 바울은 가이사에게 항소하면서 법을 이용하여 로마까지 이동했지만, 그 목적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사명, 주를 증거하는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행 23:11).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 사명은 달라졌는가?
그러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와 달리 우리에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참정권도 보장되어 있다. 잘못한 것을 비판할 수 있고, 맘에 들지 않는 정권을 투표로 심판할 수도 있다.
가령 정부에 동성애는 옳지 않은 것이며 낙태는 살인이니 법을 고치라고 요구할 수있다. 성소수자를 차별할 때 법적 처벌을 받게 하는 차별금지법이 역차별을 낳을 수 있으니 그 법을 세우지 말라는 집회에 참여하여 함께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이것은 현재 그리스도인에게 허용된,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정부가 하나님이 규정하신 선악의 기준을 벗어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사명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사도에게 명하신 사명은 오늘날 많은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은 삶의 일부를 사명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정치 참여를 해도 되는 수준의 명령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둔 세상에 나타내는 일과 관련되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죄를 고발하는 일도 그래서 대사명에 순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행해져야 한다.
코로나 19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대사명에 충성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국가 위기 상황에 많은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죽음을 무서워한다. 죽음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자기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뭔가 희망과 평안을 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실질적인 도움(마스크나 의료봉사의 손길)이 절실하여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 불안한 세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이유를 듣고 싶어 하게 만드는 강력한 자극이 된다. 그래서 더더욱 대답할 것을 기도로 준비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결론
결론적으로 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대사명을 더욱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지금 정부의 대처에 답답해서 한 마디 할수도 있다. 쓴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법으로 보장된 참정권을 사용하여 투표로 지금 정부를 심판할 수도 있고, 보장된 표현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지 않는 정부의 정책을 겸손히 정직하게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선을 넘어 지금의 정부를 이 기회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는 거대한 정치 세력에 동참하지 말라.
정권이 바뀌어도 그리스도인의 대사명은 바뀌지 않는다. 공화당이 집권할 때나 민주당이 집권할 때나 교회가 해야 할 말과 행동은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땅의 정치는 계속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대사명을 위해 선을 외치고 그에 대한 핍박을 감수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목숨을 건다. 흥미롭게도 자유와 평등이 가장 많이 보장된 국가에서 기독교가 연약하고, 가난하고 통제와 압박이 강한 국가에서 기독교가 강세를 띤다. 하지만 어떤 국가에서든 참된 그리스도인이 충성해야 할 일은 단 하나이다. 그리스도를 이 땅에 충성스럽게 증언하는 일이다.
특별히 필자가 사랑하는 사람 중 거대한 정치 세력에 휘말려 거의 온종일 유튜브를 듣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 ‘복음’을 전하며, 어떻게든 지금 정권이 무너지기를 바라고, 평생 거의 하지 않았던 욕설을 쉽게 정치 지도자에게 하는 현상을 보는 것은 정말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니 잘 모르는 목사, 그리스도인이 필자 같은 무명의 목사가 쓴 글에 “개XX”라고 댓글을 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진심으로 매일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본연의 임무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를 기쁘시게 한 것만 남는 평가를 받을 때, 모두 불에 타서 사라져버릴 짚, 나무, 풀 같은 것을 삶에 가득 채워 넣지 않기를 바란다. 주가 명하신 것, 오직 그 사명에 충성하여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듣기를 원한다(마 25:23).
사스, 메르스, 코로나 19와 같은 질병이 오고 가고, 정권이 계속 교체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것뿐이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 갈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