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위기 상황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줄여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눈 뜨고 일어나면 100명씩 늘어나 거의 1,000명에 육박했으며, 계속해서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고, 사망자도 11명에 이르렀다.

특히 기독교 사칭 이단인 신천지 성도중 확진자가 대구 집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대구, 경북 지역은 거의 초토화 되었고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정부는 신천지 외에도 여러 집회, 특히 종교활동을 자제해 달라는 권고를 내렸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이기 힘쓰는 교회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여 온라인 예배를 하는 등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도뿐만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코로나19 공포증으로 두려워하는 지금, 많은 기독교 인사, 목사, 매체들이 관련 기사나 글을 통해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여러 방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 관점에서 지금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필요한 교훈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주로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주님을 신뢰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질병을 허락하신 이유를 설명하려는 노력도 보인다. 꼭 필요한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다.

하지만 그 많은 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또한 어떤 말은 옳지만 사랑 안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라”(엡 4:15, 우리말 성경)고 명령하셨다.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는 제자들의 모임이며, 그렇기에 교회는 반드시 진리를 은혜롭게(사랑 가운데) 전달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은 그가 곧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광고판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마디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고전 10:31).

그렇다면 지금 이 위기 상황에 그리스도인이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무엇일까? 또 할 말은 무엇인가?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 봤다.

하지 말아야 할 말 1: 질병의 원인은 바로 죄 때문이다

이 말은 기본적인 차원에서 맞는 말이다. 모든 질병과 죽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세상에 유입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의 결과로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 그래서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 산다. 하나님은 때로 질병을 통해 죄인을 심판하기도 하셨다(출 15:26; 삼상 5).

하지만 우리는 질병과 그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죄를 연결 지어 설명하려는 것을 멈춰야 한다. 가령 중국 우한시가 기독교를 탄압한 곳이라 하나님이 치신 것이라는 말이나 신천지 안에 퍼지고 있는 질병이 하나님의 대대적인 심판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합리적인 추정이든지 주관적인 생각이든지 상관없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앞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다. 우리는 마땅히 겸비하여 그분 앞에 겸손히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머릿속에 들어간 것처럼 이래서 저래서 질병이 퍼진 것이라고 말하는 교만의 죄를 과감히 물리쳐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질병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주권 아래 일어나는 일이다. ‘혹시 그러실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은 속으로 주님께만 아뢰고, 세상을 향해서 마치 하나님처럼 그 이유를 다 아는 듯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확신을 가지고 질병이 생긴 원인을 아는 듯이 말하면, 세상엔 어그러진 하나님의 모습이 투영된다. 교회 다니면 병도 안 생기게 하고, 교회 안 다니거나 교회에 반대하면 질병으로 쳐서 심판하는 그런 하나님이다. 신실한 신자가 확진자가 되는 경우는 뭐라고 해야 하는가? 상대적인 우월감의 문제도 생긴다. 나는 그들보다 의로워서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인가?

결국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참된 말도 아니고 사랑 안에서 하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가지고 있는 신학적 견해로 하나님을 제한하여 현실, 특별히 누군가 고통 중에 있는 현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매우 유의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말 2: 지금의 위기는 모두 정부 탓이다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가 지금의 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고 그것에 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정부가 대응을 잘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답답함을 호소할 것이고, 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과민반응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각자의 견해를 지지해주는 신문이나 뉴스, 유튜브 영상 등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딱딱하게 굳어진 생각을 하고 있어 제대로 된 토론을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정치권에서 지금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리스도인도 그 거대한 정치싸움에 쉽게 휘둘릴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노골적인 정치싸움의 희생양이 되지 않아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질병의 공포로 두려워하고 생과 사를 앞에 두고 자기 인생에 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이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십자가 옆에서 숨이 넘어가는 강도에게 예수님은 빌라도가 얼마나 잘못된 재판을 했는지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로마 정부의 부패를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꼭 필요했던 복음을 전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정치놀음에 빠져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을 말해줄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적 위치나 그 영향력 때문에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서 정말로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만큼 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자기를 왕으로 세워 섬기려는 수많은 군중의 정치적 움직임을 포착하시고 나서 그 자리를 피하셨다. 다시 그 군중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메시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는 메시지를 주셨다.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다(요 6).

물론 그 결과 예수님의 인기는 거품처럼 사라졌고, 사람들은 다시는 그분을 좇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선포하신 방법이었다. 우리도 마땅히 주님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특별히 지금과 같은 급박한 순간에 정부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정부를 세우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데 많은 애를 쓸 것이 분명하다. 비판할 건 비판하더라도 먼저는 영혼을 살리는 말, 사람을 구하는 말을 하는 것이 옳다.

지금의 위기에 정부가 책임이 있어서 그것을 비판할 필요가 있을지라도, 그 말을 할 때와 하는 방식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잘못하면 이때를 이용하여 정치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혀 그리스도인의 진심이 심히 왜곡될 수 있고, 건전한 비판으로 정부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바라는 마음과(롬 13:4)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롬 13:1)에 복종하는 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심판을 자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롬 13:2).

하지 말아야 할 말 3: 아무도 믿지 마라

천하 태평한 누군가에겐 이런 깨우침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전염성이 심한 질병일수록 각자가 조심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 위험한 지역에 다녀온 사람은 스스로 격리 조치를 하고 손발을 깨끗이 씻고 스스로 점검을 해보는 등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다(마 19:19).

문제는 위에서 말한 것과 연결되는 부분인데, 지금의 정부 발표나 공식적인 뉴스 미디어의 설명을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하면서 개인이 구독하여 시청하는 유튜브 채널이 하는 말만 믿고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령 중국 우한시에는 150만 명이 의심 환자이고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 숫자를 생각할 때 우리나라에도 의심 환자가 셀 수 없이 많으며 정부가 뉴스 미디어를 장악해서 모든 숫자나 심각성을 거짓으로 보도하여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었다는 식이다(참고로 지난 정권에서도 이런 식의 음모론을 펼친 이들이 있었고 그리스도인 중에서 그 의견을 수용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 이렇게 말하는 것의 문제는 심각한 공포심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매체들이 전달하는 정보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완벽하게 설명하는 매체가 없을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의도하지 않은 확대와 축소가 들어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충분히 감안하면서도 우리는 제공된 정보를 통해 유익을 얻고 어느 정도 상황에 대처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의 보호하심을 기대하며 지금의 위기 상황을 기쁨과 평안으로 이겨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의 뉴스는 모두 조작되었다.”, “상황은 더욱 심각하며,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첫째 참된 말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공적인 뉴스 채널이 부패하여 조작될 가능성이 있다면, 유튜브는 정보를 검증하는 과정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둘째 결과적으로 위기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사랑으로 와닿지 않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두려움을 내쫓는 참된 사랑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요일 4:18). 누군가에 대한 불신과 비난을 가져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원망과 염려 속에 두려워 떠는 이들에게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계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데 더 힘써야 한다. 진짜일지 가짜일지 알 수 없는 정보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보다 언제나 진짜이신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당신만이 사랑 가운데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진리의 말이다.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줄이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을 하자. 

결론
가끔 장례식에서 예식을 집행하고 말씀을 전해야 할 때가 있다. 돌아가신 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셨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분은 안타깝게도 영원한 지옥에 가셨다는 무거운 현실 앞에서,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가족에게 어떤 말씀을 전할 수 있을지 답답하고 난감한 마음이 교차한다.

슬픔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복음이 말하는 엄중한 인생의 두 가지 운명이 유가족에게 정말 기쁨의 소식이 될까 아니면 상처를 키우는 소식이 될까? 인생에 있어 어쩌면 가장 위기 상황일지도 모르는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면에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지만 담대하게 행동하고 말하게 된다.

첫째, 그들에게 최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들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하고 상한 마음을 위로하며 진심으로 격려한다.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은 특정 죄 때문에 고인이 돌아가셨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진리를 담대히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 없는 영원한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복음을 유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달한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그 기회에 쓸데없는 말을 같이 섞거나 청중의 마음을 더 어지럽게 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더욱 단순하고 선명하게 복음의 빛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에 비춰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오직 그것만을 전달한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 거의 1,000명이 환자로 고통받고, 죽은 사람도 늘고 있는 마치 장례식 현장 같은 대한민국에서 그리스도인은 각각 설교자로서 하나님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가? 위기 때일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한없이 약하고 두렵고 낙심된 때일수록 우리의 메시지는 더욱 명료하고 따뜻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통해 은혜와 진리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나타내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