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여러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하고 묵상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아시는지, 어떻게 아시는지를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서 묵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기도 하고 찬양하기도 하고 또 기도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하나님의 나에 대한 지식의 기이함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그 지식에 빈 곳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해준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단지 나를 아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계획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그 사실을 찬양한다. 그리고 끝으로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함께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다윗처럼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13-18절)
시 139:13–18 13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로 그 생각이 옮겨간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아시는지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 나를 아신다는 것이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13절):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딸깍” 만드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스위치 하나 딸깍 켜듯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려고 큰 “노력”을 하셨거나 “고생”을 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어떤 일을 하신다고 해도 우리처럼 힘들여서 하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그것이 무성의나 무관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우리의 경우는 힘을 들이는 것이 곧 성의이자 관심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알아서 돌아가도록 그냥 두었다고 믿는다(이신론).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시간이 남아서 세상을 만들어 두고 관찰만 하고 계시지 않다. 하나님은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을 “내 것”이라고 하신다.
시 50:10–11 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이는 주권에 대한 선포이며 관계에 대한 선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하여 내가 창조하기는 했지만 나하고 별로 상관은 없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봤지만, 하나님은 그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도 이름으로 부르실 정도로 각각을 특별하게 생각하신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신다(마 10:29).
그런 피조물 중에서도 인간은 더욱 특별하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다(창 1:27).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친히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창 2:7). 다른 피조물처럼 사람은 말씀으로 창조할 수 없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별함을 그렇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건 아담 아닌가? 우리는 그냥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 태어나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욥은 이렇게 말했다.
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딸깍하고 인류를 만드셨는데, 나도 그 중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 하나를 손으로 빚어서 만드셨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귀하게 만드셨는데, 왜 지금은 나를 멸하려고 하시느냐고 묻는 것이다.
엘리후는 욥에게 이렇게 말했다.
욥 33: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아담만 특별히 창조된 것이 아니라, 욥도 엘리후도 그렇게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욥이나 엘리후의 착각이 아니다.
시 119: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사람들의 착각일까? 하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다.
사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렘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아담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각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고, 그후에 누가 태어나든 상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면서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생각하셨다. 각각의 사람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것이다.
13절에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사실도 바로 그것이다. 다윗은 그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각 개인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매우 개인적인 창조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 “내장”을 지으셨고,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다”고 표현한다. “내장”은 성경에서 주로 사람의 깊은 곳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감정이나 영혼을 의미할 때가 많다. 다윗은 여기서 겉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의 모든 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모든 부분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깊이 그리고 유일하게 나라는 존재의 시작에 관여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드셨다”는 표현은 특별히 실을 엮어서 천을 만드는 ‘직조’의 의미다. 다윗은 마치 하나님께서 실을 짜서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드는 것처럼 자신을 만드셨다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도 장인 정신이 깃든 명품에 대해서 ‘한 땀 한 땀’ 만들었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확히 그런 의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다고 표현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처럼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고, 자신에게 매우 귀중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처럼 만드셨다. 장인이 실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모두 세심하게 만드셨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4절): 이 사실만 생각해도 다윗은 찬양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던 것이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우리는 다윗의 이 놀라움에 동참할 수 있다.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끼는 이 모든 감각들을 사람의 기술로 재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오늘날 카메라가 정말 많이 발달했고, 어떤 면에서는 사람의 눈보다 뛰어난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사람 눈처럼 환경에 맞춰서 자동으로 모든 것이 동작하는 카메라는 없다. 사람의 귀는 약 0.00001초(10 마이크로초)의 시간 차이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소리가 어느 쪽에서 들렸는지를 구별한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정면에서 1-2도 벗어난 소리도 알아챌 수 있다는 의미다. 의도를 가지고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냥 듣고 안다.
심장은 하루에 10만번을 평생 쉬지 않고 뛴다. 요즘 AI 때문에 전기와 냉각이 이슈인데, 우리 뇌는 전구 하나 정도를 돌리는 전기(20와트)로 우리 몸의 모든 신호를 처리하고 기억을 저장하고 불러올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약간의 열은 땀으로 식힐 수 있는 정도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 와닿지 않는다면, 갓난 아이를 자세히 관찰해 보라. 어떻게 그 조그만 몸에 있을 것들은 다 붙어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엄마 젖을 찾고, 자기 몸에 있는 배설물을 내보낼 줄 안다. 알아서 성장도 한다. 어느 순간 몸을 뒤집고, 기어다니고, 걸어다닌다. 뛰어 다닌다. 사람을 보고 웃는다. 말을 한다. 조그만 강아지 같았던 애가 어느새 나와 대화를 한다. 사람이 만든 무엇도 이와같지 않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우리 각자가 다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있지만, 사람은 각자가 더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다. 더 잘 보는 사람이 있고, 더 잘 듣는 사람이 있다. 똑같이 입이 있고 성대가 있지만,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다르다.
사람이 만든 제품이 이렇게 다르다면, 우리는 어떤 것은 불량품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로 찍어내신 것이 아니라 지으셨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고유할 뿐, 불량품은 없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심히 기묘하게”, 즉 놀랍게, 경이롭게, 지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각자의 고유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유일한 찬양을 드리게 하신 것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다윗의 묵상은 여기서 더 깊어진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15절):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나라는 존재를 누구도 몰랐던 그 순간조차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밀한 데”, “땅의 깊은 곳”에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실제로 사람이 어디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대부분 어머니의 뱃속(자궁)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단순히 다윗은 직접적인 표현이 좀 그래서 이런 표현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이미 13절에서는 “모태”라는 표현을 사용). 다윗이 강조하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사람의 존재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마치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에서 사람이 만들어져서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은 생겨난다. 오늘날에는 기술이 발달해서 초음파를 통해서 뱃속의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다윗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임신 사실을 아는 것도 오늘날보다는 늦었을 것이다. 즉, 아이는 이미 존재하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임신이 되면 바로 임신이 되었구나하고 아는 것이 아니다. 보통 한 달 이상 지나야 안다. 다윗은 그런 때라도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형체”는 문자적으로는 ‘뼈의 구조’이니 골격을 의미한다. 뼈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임신 5-6주 경이라고 한다. 다윗 시대라면 엄마도 임신 사실을 확신하기 전이라 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그런 상태였을 때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겨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그 누구도 모르는 다윗의 시작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다는 의미다. 바로 하나님이 다윗의 창조주로서 다윗을 시작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16절): 문자적으로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모태 안에서 아기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었던 그 때에도 하나님의 눈은 보셨다고 다윗은 말하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절): 하나님은 단순히 이 모든 과정을 보고만 계셨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신 분이시다. 그냥 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계획을 가지고 하셨다. 나의 날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나의 모든 날을 다 그 책에 기록해 두셨다. 전부 “다”다. 낱낱이 “다”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날을 정하셨고, 그 날 중에 하루도 더해지거나 빠지지 않는다. 대충 날만 정해두신 것이 아니라(출생과 죽음), 그 내용도 모두 채워두셨다. 나에게 묻고 그렇게 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나에 대한 주권적인 계획이 있음을 의미함을 다윗은 묵상했던 것이다.
이 모습은 마치 태어날 아기를 위해 준비하는 부모의 모습과도 같다. 임신 사실을 알면, 태어날 아기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부모는 바빠진다. 팔뚝만한 아기 하나가 태어나는건데, 온 집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것이 있으면 치운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창고로 들어간다. 대신 아기를 위한 물건들이 집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부모는 아기를 위한 모든 계획을 세운다. 아기가 그 집에 오고나서 하는게 아니라, 그 전에 모든 일을 한다. 사랑으로 한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부모는 완전하지 않아서 아무리 잘 계획을 세워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서툴기도 하고 잘 모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다. 그래도 나한테 물어보기라도 하셨으면 더 좋았을까?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신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정하신 모든 날,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최선이고 최고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창조를 묵상하며 인정했던 사실이고, 우리가 인정해야할 사실이기도 하다.
여기서 오늘날 ‘낙태’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은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던 그 시절에 대해서도 모두 “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도 그는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포 하나에서 시작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의 어떤 형체도 없던 때가 있다. 사람이 볼 수 있다면 그냥 ‘세포’, 혹은 어떤 ‘조직’이라고 말할만한 상태다. 그거 하나 떼어내고 죽이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그런 상태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도 나를 하나의 사람으로 보신다. 인격체로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날에 대한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언제부터 태아를 사람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하나님께서 모태 안에 존재하게 하신 그 순간부터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이미 그의 인생을 계획하셨다. 그저 세포처럼 보이고, 그저 어떤 조직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아닌 ‘그’인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어렵거나 모호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를 가장 잘 알고 계시며, 우리에 대한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이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이러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17절): 다윗은 하나님께 너무 숨막힌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어떻게 내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고 하나님 마음대로 다 계획을 세울 수 있느냐며 따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그 생각이 보배롭다고 감탄하며 찬양한다. 보배롭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보석과 같다는 것이다. 귀하고 가치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생각은 알면 알수록 더욱 보배롭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깨달아 알수록,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보라.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셔서 의로운 자로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속한 기업의 상속자가 된다. 각 사람의 간증을 들어보면, 이 과정이 모두 다르다. 누군가의 간증은 정말 흥미진진하지만, 누군가의 간증은 별 것 없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각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그렇게 부르셨다. 너무나 보배롭지 않은가.
다윗은 특별히 이런 하나님의 생각이 많음에도 감사한다.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17-18절):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에 대해서도 모래보다 많은 수의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 내가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수많은 생각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고, 때에 맞게 하나도 빠짐 없이 이루신다. 정말로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18절): 여기서 “내가 깰 때에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특정하기가 어렵다. 잘 때나 깰 때나를 의미한 것일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깨어날 것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다윗은 지금 자신이 이렇게 묵상하고 있을 때 뿐 아니라 깨어서 실제 삶을 살아가는 순간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나의 묵상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게획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이렇게 말했든,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한다. 여기서 조금 시각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동안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특별히 그는 “여전히”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 모든 묵상의 결론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음에 다윗은 안도하고 감사한다. 나를 아시고, 나에 대한 보배로운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과 함께 하는 것은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특권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다. 그런데, 이것에 한 가지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19-24절)
시 139:19–24 19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20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21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23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지금까지 다윗은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과 온전한 임재, 그리고 주권적 계획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위로를 얻고 평안을 찾았다. 따라서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죄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19절): 여기서 말하는 악인이 어떤 자들인지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이들은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다(19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 즉 살인하는 것을 절대 금하셨지만 이들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이들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고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한다(20절).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면 이용할 수 있고, 원하면 비방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어쩌면 이들은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들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의 무리 가운데 있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다(20절). 21절은 이들을 “주를 미워하는 자들”,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들은 종교인일 수 있다. 세상에서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악인”이라고 하시고,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셔서 그분께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요일 1:5). 하나님께는 용납 가능한 죄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시 5:4–6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계 20:11–15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알았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이런 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악인들에게 “나를 떠날지어다”라고 말한다(19절). 하나님을 미워하는 그들을 “미워”한다(21절). 그들을 심히 미워하여 원수로 대한다(22절). 사람 자체에 대한 미움이 아니다. 그들이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기 때문이다.
죄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다윗의 진심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 자신의 힘으로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악한 자들에게서 떠나려고 하지만, 자신 안에도 악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시 139:23–24 23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구하는 것은 그의 진실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진실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알고 싶다. 자신에게 있는 악한 행위를 알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께 살피고 아셔서 드러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자신을 시험하여 단련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담대한 기도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욥과 같이 큰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혹은 사람들 앞에서 큰 수치를 당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은 우리 생각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길로 걸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의 삶의 끝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 기다리고 잇는 것이 더 중요했다. 지금 그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삶에서 죄를 제거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기도이고,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것을 기대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기도 하셨다.
요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은 다르게 하면 가지치기를 하신다는 말이다.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방해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제거하시는 것이다. 다윗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그렇게 해달라고 구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안다면 그렇게 해야한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도우신다는 사실만 기억하며 안도하는 것에서 나아가서,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며 영원한 길로 걸어가기를 소원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의 기도다.
도전
하나님이 나를 완벽하게 아신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자. 그리고 그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그에 합당하게 행하자. 그러면 우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며 기뻐할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