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경고한 말세의 “고통”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서 기인하였습니다(딤후 3:2). 참 신기합니다. 오늘날 처럼 “자기 사랑”을 대놓고 강조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많은 연예인들이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라 정작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하며 눈물흘리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강연을 많이 듣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말세에 고통받는 이유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정작 세상은 우리가 ‘자기를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로 인해 오늘날 이렇게 외롭고 힘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구원받기 전 우리의 영적 상태가 ‘자기애’(self-love)가 가득한 상태였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선하신 하나님”의 저자, 마이클 리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성적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임을 가정하고 소름끼치도록 그것을 만끽한다”(147p)

인간의 문제는 자기를 덜 사랑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너무 많이 사랑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자존감이 아주 낮은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쉽게 생각하면 그가 가진 문제는 자기를 덜 사랑해서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자꾸 자신이 없다고 말하고, 나 같은 사람은 그런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자책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자들에 대해 분노합니다.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으로 괴로워합니다. 시장에서 과일을 고를 때 가장 잘 익고 상태가 좋은 것을 고릅니다. 유통기한이 가장 긴 우유를 선택합니다. 자신을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도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만큼 대우받지 못하고, 내가 인정 받고 싶은 만큼 인정받지 못하기에 생기는 불만과 분노가 공격적으로 외부로 표출되든 수동적으로 내부로 쌓이든 우리는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성품과 환경에 온전히 만족한다면 우리가 “낮은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덜 사랑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의 모습에 불만을 갖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나 자신의 모습과 현실에서 오는 괴리감에서 생기는 ‘자기애’의 또다른 반응에 불과합니다. 나는 나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나의 유익을 최고의 우선 순위에 올려 두고 삽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죄의 본질이었고, 그것이 구원 받기 전 죄인의 문제였으며, 구원 받은 후 성도가 싸우고 있는 말세의 풍조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신을 덜 사랑해서 생긴 문제로 보이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날마다 모여 서로의 필요를 채워준다면 외로움이 발붙일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교회에 명령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예수님께서도 다른 이를 사랑하는 일에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말세의 마지막이 가까이 올수록, 우리는 더 극심한 ‘자기애’의 문제를 겪게 될 것이며, 교회는 그 풍조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맺어진 사랑공동체로서, 사랑이 그 안에서 사라지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하나될 것”을 위해 간구하시고, 그렇게 하게 하기 위해 성부가 성자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해달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요 17). 그래서 요한은 아주 담대하게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요일 2:9-10).

베드로는 “무엇보다도”라는 최상급의 표현으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사랑, 그것은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본질입니다. 바울이 많은 은사가 넘쳤던 고린도교회에게 편지하면서 13절이나 되는 긴 구절을 통해 설명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 안에 예언과 방언과 구제와 강력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강력한 설교와 헌신적인 구제, 신실한 믿음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을 이루기 위한 목적과 관계 없이 되어질 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뜨겁게”라는 표현은 아주 ‘가지고 있는 온 힘을 다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클라우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말은 어떤 것을 잡아 늘이거나 확장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의 사랑은 깊이 면에서나 지속적인 면에서나 계속 잡아 늘여진다”(BST, 234). 마치 운동선수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능력과 기술을 동원하여 목표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교회는 서로를 있는 힘껏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주신 이 명령을 잘 들어보십시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사랑! 이 위대한 가치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표출되어야 할까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모든 신자의 거듭난 증거는 바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벧전 1:22). 새롭게 변화된 피조물인 교회의 지체들이 어떻게 하면 사랑공동체로서 힘있게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그것을 차례대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9-11절에는 “사랑”의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 실천 영역을 다룹니다. 그 전에 우리는 8절에서 말하고 있는 또 다른 영역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9-11절의 내용이 적극적으로 성도를 사랑하기 위해 교회의 각 지체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면, 8절은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보다 수동적, 부정적 영역의 실천과제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교회 안에서 드러나는 것들은 “죄”입니다. 죄가 양산되고 죄의 결과를 고스란히 교회가 맛보게 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모두가 복음을 위해 힘쓰던 여인들이었지만 둘 사이에 일어난 문제로 빌립보 교회의 큰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빌 4:2-3). 고린도교회 역시 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나뉘었습니다(고전 1).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의 문제로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고전 8). 바울은 답답하게 여기며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사랑 부족의 문제였습니다.

물론 모든 성도가 똑같은 깊이로 사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취향과 성향을 무시하고 모두와 똑같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 없음”으로 골이 깊어지거나 멀리하는 성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큰 외로움을 겪는 이유는 나와 깊은 친밀감을 갖는 친구의 부재만이 아니라 깊은 갈등을 겪고 있는 지체간의 문제 때문이기도 합니다.

왜 어떤 사람과는 같이 앉지 않습니까? 왜 어떤 성도와는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습니까? 왜 누가 하는 말에는 쉽게 싫증이 납니까? 어떤 사람이 잘되는 것에 화가 납니까? 왜 어떤 성도만 생각하면 비방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까? 왜 그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습니까? 견해의 차이, 성향의 차이, 취향의 차이가 아닙니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의 지체가 겪는 갈등의 문제가 우리의 사랑 부족때문이 아닌지 사랑이 요구하는 것들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서로를 오래 참는다면, 서로에게 온유하게 대한다면, 서로를 시기하지 않고, 서로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그 성도가 나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입니다’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네, 사랑 부족입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사랑은 서로 예의있게 대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분의 사랑의 풍성함으로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면 우리가 겪는 외로움은 사라지고도 남을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끼리 가지고 있는 분쟁, 갈등, 불쾌감, 불편함, 미움 등은 사랑으로 충분히 덮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만한 사랑이 없을 때가 많은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떠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지체 속에 강력하게 역사하시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크기와 너비와 깊이를 깨닫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각 지체들이 그 사랑으로 풍성하게 채워져 서로를 향한 사랑의 지경이 넓혀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여 모든 죄들을 덮어주기를 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어나는 모든 죄의 문제들을 사랑으로 능히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크고 작은 죄가 교회를 절대로 흔들 수 없고
오히려 더욱 더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되는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외로운 교회는 사랑이 식어버린 교회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교회는 죄의 문제를 겪고 그 죄로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외로움은 가중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럴때에야만 우리는 허다한 죄를 서로 덮고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줄 수 있습니다.
식어버린 사랑을 뜨겁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그 사랑으로 서로를 섬길 차례입니다.
다음 번 칼럼에서 베드로전서 4장 9절 말씀으로 그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각자의 삶을 한 번 돌아보기 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당신과 갈등을 빚고 있는 지체는 없습니까? 불편한 사람들은 없습니까? 오랜 앙숙으로 지내는 지체는 없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성도는 없습니까? 당신에게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성도에게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합시다. 자기를 최고로 사랑하는 세상 풍조에서 나와 자기를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 형제, 자매를 사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