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우리는 율법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은 절대로 그 역할에 있어서 죄를 짓게 만들지 않습니다(“그럴 수 없느니라,” 7절). 죄를 짓게 만드는 주체는 바로 “죄의 정욕”(5, 8절)이었습니다. “죄가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고 바울은 설명하였습니다(8절). 율법은 죄가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죄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직접적으로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8절). 율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죄인으로 하여금 죄의 심각한 문제로 인해 행위로는 절대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은 조금 속도를 내서 9절에서 13절까지를 관찰, 해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성경해석 시리즈 예제로서 로마서 7-8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성경해석의 원리와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본문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9전에(Once)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but when the commandment came)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기본적인 관찰을 해봅시다.
1. 두 가지 시점이 분명하게 구분이 됩니다. “전에”의 시점과 “계명이 이르매”의 시점입니다. 둘 사이에 확실한 전환을 보여주는 접속사 “그러나”(but)로 이 두 시점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2. 반복되는 단어가 보이십니까? “살았다”와 “죽었다”가 반복됩니다. “죽었다” 대신 유사한 표현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등장합니다. “계명”도 반복되지요. “율법”과 유사한 표현입니다.
3. 모두 과거형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Once I was alive apart from law); “계명이 이르매”(when the commandment came);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sin sprang to life and I died). 10절 역시 “I found that the very commandment that was intended to bring life actually brought death”으로 전부 과거형입니다.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음으로 놓임을 받고 그리스도에게로 가기 전 상황입니다.
4.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와 “계명이 이르매”의 시점의 순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계명이 이르매”의 시점이 논리적 순서상 뒤에 놓입니다.
5. 계명을 가리켜 “생명에 이르게 할”이라고 꾸며줍니다. 영어로는 The very commandment that promised life라고 나와있는데요 본래 생명을 약속한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계명이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생명”과 “사망”이 대조됩니다.
6. ‘계명이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니 나는 여호와니라.” 바울도 로마서 10장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7. 이로 보건대 앞서 이야기된 것처럼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 사실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라는 것이죠. 문제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입니다(참고: 로마서 8장 7절).
반복되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죽다”와 “살다”입니다. 더글라스 무는 로마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대조하여 설명합니다(Romans: NICNT, 437p).
“Apart from the Law” “When the Commandment came”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계명이 이르매
“sin is dead”(v. 8c) “sin sprang to life again”(v. 9b)
“죄가 죽은 것임이라” “죄는 살아나고”
“I was alive”(v. 9a) “I died”(v. 10a)
“내가 살았더니” “나는 죽었도다”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나는 살고 죄는 죽었습니다.
계명이 이르니, 나는 죽고 죄는 살아났습니다.
2. 지난 번에 살펴본 율법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9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며 죄의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했었죠. 그렇다면 그 율법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네, 그렇습니다. 죄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죄로 인해 죽는다는 사실도 모른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죄는 죽고 나는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3. 반대로 계명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 그 문제의 심각성은 무엇인지(“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음”) 알게 된다면 내 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그 죄로 인해 나는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정밀검사를 하기 전에 나는 병이 없어 건강한 줄 알고 살았지만 검사를 하고 나서 나에게 심각한 병이 있으며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4. “나”라는 사람은 일단 “바울”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개인 경험에 비추어본다면 그의 회심 전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명의 진실한 의미를 바울에게 깨닫게 하셨을 때 바울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심각한 처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문제가 드러나고 자신은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5.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전 한가지 질문을 해봅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어떻게 나를 사망에 이르게 했을까요? 율법 자체에 문제가 없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11-12절을 보겠습니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killed me)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관찰해볼까요?
1. 계명이 나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된 이유에 대하여 11절에 “죄가…”로 시작하여 설명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어성경에는 “for”로 시작합니다. 헬라어로 γὰρ입니다. BDAG이라는 사전에는 이 헬라어의 해석 중 하나로 “marker of cause or reason”이라고 나옵니다. ‘이유’나 ‘원인’라는 말이죠. 결국 계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10절에 등장하는 “죄”입니다.
2. 죄가 어떤 일을 합니까?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입니다. 역시 계속 과거형이 쓰였습니다. 11절에 “나를 속이고”(deceived me), “나를 죽였는지라”(killed me). 죄가 나를 속이고 나를 죽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의 기록이 생각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you were dead) 너희를 살리셨도다.”
3. “계명으로 말미암아”는 지난 번에 살펴본 것처럼 율법의 어떤 역할로 인해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을 이용하여 나를 속이고 나로 죄를 범하게 만들고 그 결과인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칼럼에서 우리는 뱀이 어떻게 하와를 유혹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기준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속이고 그 기준을 어기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 기준에 따라 반드시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창 3장).
계명: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임:(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참고.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딤전 2:14,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죄의 정욕: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3:6a)
죄의 열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3:6b)
계명으로 나를 죽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4. 이렇게 죄의 정욕은 계명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거짓으로 나를 속이고 그 계명을 어기게 함으로 결국 계명에 따라 심판을 받게 합니다. “죄”가 문제입니다. “죄”는 온전한 율법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대항하게 합니다. 거절하게 합니다.
5. 율법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12절에는 “율법”과 “계명”이 구분된 것처럼 보이지만 F. F. 브루스의 로마서 주석(틴데일 시리즈)에 따르면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법 전체를, “계명”은 그 법을 구성하는 각 조항들(총 613개 라고 합니다)을 말한다고 합니다.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의 특징은 거룩, 의로움, 선함 입니다.
6.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의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율법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의롭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계명을 내가 온전히 지켜낸다면 나는 곧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주신 것이 이 계명이었습니다(레 11:45).
7. 교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영생”이 단지 죽지 않고 지속되는 생명이라고 본다면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자도 영생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은 삶의 지속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요 17:3). 영생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 그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어둠에 행할 수 없습니다(요일 1:5-6). 만일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면 우리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의로우심은 성경에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그것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겠지요(예: 시편 25:8; 34:8; 100:5; 106:1; 이사야 5:16; 시편 7:11; 11:7; 116:5; 119:137; 145:17; 시편 22:3; 77:13; 99:3).
8. 결론적으로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며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문제는 “죄”입니다. 그것이 14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마지막으로 13절을 보겠습니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사실 7장 7절에 나온 질문과 유사한 질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7절의 질문은 율법 자체가 악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번엔 율법이 선하다는 결론을 12절에 하고 나서 한 질문입니다. 영어로는 “Did that which is good, then, bring death to me?”로서 흠정역은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을 이루었느냐?”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래는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나를 죽인것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면 칼은 원래 사람을 살리고 고칠 때 예리하게 치료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이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율법 자체가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이지만 그것이 나를 죽인 것이냐?라는 질문입니다.
2. 대답이 나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강경한 표현입니다.
3. “오직 죄가”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을 부연설명합니다. 영어로는 “It was sin”으로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쉽게 말하면 “나를 죽게 한 것은 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범인은 죄입니다.
4. 그 이후 설명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새번역 성경을 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려고, 죄가 그 선한 것을 방편으로 하여 나에게 죽음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계명을 방편으로 하여 죄를 극도고 죄답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5. “그 선한 것”과 “계명”은 같은 것이죠. “방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명을 통하여 어떤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는”이라는 말을 통해 “계명의 방편”이 성취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1)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함
2) 죄를 극도로 죄답게 함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계명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 질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바로 죄의 정욕입니다. 그 질병의 증상들로 우리가 쏟아내는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이 계명의 방편을 통해 죄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또한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죄가 가져오는 심각한 결과 곧 영적 죽음에 대해 알게 됩니다.
6. 존맥아더 목사님의 성경주석을 보면(10월에 출간되었답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의 참된 성격과 그 치명적인 특성을 인식시켜 죄인에게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율법에 두신 진정한 목적이다(갈 3:19-22).
7. 율법은 MRI 기계와 같이 우리 영혼의 심각한 문제점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줍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8. 만일 인간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성 혹은 지속할 수 있다면, 율법이 그 것에 필수적이라면 하나님은 제사제도를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동시에 제사를 주셨습니다. 율법을 통해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양의 피로 죄의 삯을 대신 지불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양들이 죽음으로 가리킨 참된 구원의 대속제물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로마서 8장의 내용이 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주 토요일(31일)은 “종교개혁의 날”입니다. 498년전인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면죄부를 통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로마 카톨릭 교황과 사제들의 만행에 분노하여 95개조 반박문을 만들어 비텐베르크 대학교 성당 문에 내걸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당시 각종 규율과 행위, 순례와 헌신(구제와 봉사), 그리고 예식을 통해 죄를 보속할 수 있고 그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데 효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했던 카톨릭의 가르침에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성경적 가르침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우리가 몇 주간 살펴본 로마서 7장 1~13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계명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율법의 각 조항들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속물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 역시 그것을 지켜내는 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정밀하게 살펴볼때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멀어진 죄인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갈 수 없고 그분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죄의 심각한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향해 두 손을 펼칩니다.
마지막으로 싱클레어 퍼거슨이 쓴 <성도의 삶>에서 한 구절 인용하는 것으로 오늘의 성경해석 예제를 마치겠습니다.
성경의 거울 한 면 한 면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의 형상을 점점 더 인식해 갈때
비로소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보잘것 없는 공로를 구원에 슬쩍 끼어 넣으려는
본성적 사고의 마지막 한조각까지 하나님께 내어 드리게 될 것입니다(20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