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동성결혼이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 결과 미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은 합법화 되었고, 이 결정은 대법관 9명중 5명의 찬성으로 이루어졌다. Huffington Post 기사에 의하면 케네디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결혼은 한 국가의 사회적 질서의 이정표”라고 말하며 “동성 커플이건 이성 커플이건 이러한 원칙을 존중하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원칙과 가치……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평등과 사랑이라는 불변의 가치를 지켜낸 하나의 승리로 보는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다수가 동의한다고 해서 그 동의된 결정이 위대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진실로 가치 있는 결정은 동의를 얼마나 얻어냈는가 보다는 결정의 기준이 진실로 가치 있는 것에 근거했는가에 있다. 과거 독일 지도층의 다수가 동의했다고 해서 홀로코스트(유태인 대학살)가 위대한 업적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가 보다는 어떤 가치 기준에 근거하여 결정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현재 위대한 결정으로 평가된 것들이 후에 대단히 잘못된 것으로 평가 받는 경우가 인류의 역사 가운데 허다하게 많다. 이번에 미국에서 이루어낸 역사적인 결정 그리고 곧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이 결정이 참으로 변하지 않는 가치에 근거한 결정인지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평등, 자유, 사랑…… 두 말 할 필요 없이 변하지 않는 가치가 아닌가? 기독교인들 가운데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성경에 기록된 평등과 자유, 사랑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 다수가 인정하는 평등과 자유, 사랑은 인류가 절대로 고수해야 하는 보배로운 가치인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무엇이 진정한 평등이며, 무엇이 진정한 자유이고,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그 기준의 문제이다. 다수가 인정하면 그것이 곧 평등과 사랑과 자유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과거 인류는 왕정시대를 살았다. 왕과 귀족, 평민의 계급으로 사회 구성원을 구분 짓고 차등을 두었던 구조였다. 이러한 구조로부터 보다 진보된 평등의 가치를 획득했다고 여겨진 민주주의 사회가 들어서면서 인류는 대단한 평등의 본질적 가치를 회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빈부의 격차와 사회적인 불평등이 과거 왕정시대보다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사회체제로 인위적인 평등을 일궈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이상적인 이론을 따라가기엔 현실의 격차가 너무 심했다. 더 극심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체제로 결실을 맺었다. 과거 권력이 인류의 평등을 위협했다면, 현재는 자본이 평등을 위협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체제가 불평들을 빚어내는 것이 아니다. 체제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죄성이 그 어떤 체제 안에서도 십분 발휘되어 불평등을 자아낸다. 체제나 시스템이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현하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던 불평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문제는 언제나 일관성 없고 늘 변하며 이기심과 죄성에 따라 타락하기 쉬운 인간에게 있었다.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치에 대한 인류의 견해는 어떠한가? 오늘날 사랑을 정의하는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는 감정이다. 끌리면, 느낌이 오면 그것이 곧 사랑이 된다. 어떤 관계에 존재하는 감정이냐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로 취급 당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미 간통죄는 폐지되었다. 개인이 선택한 사랑은 이전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그 관계들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뒤로 한 채 가장 높은 가치로 우뚝 세워졌다. 책임, 신실함, 인내, 온유, 용서와 화해라는 사랑의 중대한 요소들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는 양념이 되었다. 내가 사랑한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한가? 내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다는데 무얼 어쩌란 말인가? 현재 우리가 정의하는 사랑은 이 같은 개인의 단호한 결심에 대해 아무런 조언도 할 수 없다. 그것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진짜 사랑의 본질적 가치가 되 버렸다.
자유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은 Let it go가 되었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유가 방임이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수가 동의하는 자유는 방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졌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그 어떤 하등의 권위도 없기 때문이다. 개인이 다른 이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 동성애에 대한 반대에 대항하여 사람들은 우리가 누구에게 피해를 끼친 적이 있냐고 묻는다. 그리고 일반인에 비해 더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피해를 끼치고 있지 않으니 주어진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부여된 이 자유권의 가치는 참 숭고하고 위대한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진정한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라는 것이다. 우리는 수평적 관계에서 눈으로 드러난 직접적인 피해와 손해를 계산하며 그것에 심각한 결과를 미치지 않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사실은 수직적 관계에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심각한 결과에 있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어긋남, 다른 말로 죄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부정적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말로 죄의 삯은 곧 사망이다. 그리고 그것이 수평적인 관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동성애는 개인의 선택이요 자유라고 말하며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한 가족의 모습과 멀어진 것이라면 그 죄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설계된 사회와 조직에 문제를 가져온 다는 것이다. 미국 대법관이 말한 “국가 사회적 질서의 이정표”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왜 갑자기 하나님 이야기가 나오는가?
백 년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은 아무리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결정을 한다 해도 좁은 시각과 시야를 가지고 무언가를 결정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정의하는 평등과 자유, 사랑의 개념은 수백 년 전, 혹은 수백 년 후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변한다. 우리의 견해는 변한다. 우리의 생각도 변하고 세상의 시각도 시시때때로 변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정의하는 도덕적 기준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도덕이 내일의 비도덕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변질되는 가치 기준에 따른 결정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은 동의를 얻었다 하더라도 도덕적 기준이 세월에 따라 변질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근거로 한 결정은 현명한 것이 될 수 없다. 더욱이 인류는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체제 안에서 사회 구조 안에서 그들의 이기심과 죄성이 충만한 모습으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지도 실현하지도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증해왔다.
우리에겐 세월의 흐름과 관계 없이 다시 말해 세세토록 변하지 않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이 말하는 사랑, 자유, 평등을 받아들일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을 근거로 한 결정을 아무리 대세가 반대할 지라도, 다수가 동의하지 않을 지라도 고수할 필요가 있다. 절대적인 도덕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그분이 곧 사랑이요, 그분이 거룩이며, 그분이 제시하는 진리가 우리에게 참 자유와 평안을 주신다 약속하셨다.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영원 전에도 계셨고 영원히 계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사야 40:8)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최초 아담과 하와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맺어주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령하셨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창 1:27~28; 2:21~25)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창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에 대해 일관성 있게 죄라고 말씀하셨다(레 20:13; 롬 1:26~27; 고전 6:9).
어떤 사람들에게 고전 문학과 같은 성경의 케케묵은 가르침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 일관성 있는 원칙은 천지 창조시대부터 사도시대까지 수 천년 동안 변하지 않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킬 의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가치 기준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지금 정의하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의미 있는 자유, 평등, 사랑의 가치 기준이 아닌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가치 기준의 결정자 되신 하나님께서 인류 창조 때 세우신 가치 기준이며 오늘날까지 변치 않는 원칙이다.
6월 26일 동성결혼 합헌 결정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승리이며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들은 확실히 표면적으로 승리했다. 하나님의 이 기준에서 멀어지는데 성공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취득했고, 내가 느끼고 원하는 대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으며 그 어떤 제약, 판단, 비판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합법적 근거를 얻었다. 4명의 대법관이 반대하고 국민의 과반수에 가까운 사람이 반대했지만, 어찌 되었든 과반수 이상의 대법관과 국민이 인정했으니 이제 동성결혼은 자유, 사랑, 평등의 본질에 합당한 관계, 동성애는 그에 합당한 행위로 세상에서 인정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시시때때로 변하는 인간의 기준과 견해를 기초하고 있다. 날마다 이기심과 죄성이 꿈틀대는 인간의 가치 기준의 반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평등, 죄에 매여 사는 자들이 정의하는 자유, 욕정에 따라 무분별하게 자행되고 있는 사랑에 근거한 결정이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멀어지는데 성공한 “승리”는 이제 멸망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오늘 우리가 “승리”라고 선포한 이 결정은 사회와 국가를 변치 않는 기준을 가진 분의 이정표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진정한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 하지 않으며 오만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는 것으로 참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 가능하다. 진정한 평등은 헬라인과 유대인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만큼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할 때 주어진다. 모든 가치 기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모든 세상의 기초를 두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의 절대 기준이며 그것을 근거로 한 결정만이 변하지 않는 가치에 따라 되어진 결정이다. 자유, 평등, 사랑에 의해 결정된 숭고한 승리로 오늘 이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항상 변화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절대기준을 정하는 주체이며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교만을 여실히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