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장 7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예의” 혹은 “예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꼭 교회에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예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는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받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어른을 보면 인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 아니 엄마 포대기 속에 있는 갓난 아기에게도 종용됩니다.

아마도 유교의 강력한 영향이 있다고 보여지는 이 예절교육은
참 긍정적인 면이 많고 성경의 원리와 부합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성경의 본래 의도와 많이 벗어난 오늘날의 현상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요즘 어린 아이들은 인사성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감히…’라는 말도 듣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엄격한 훈계와 가르침에 아무 대꾸 없이 따라왔었지만
오늘날의 학생, 청년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오래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이러한 신세대들의 방식은 예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가르치지 못한 부모나 교사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을 보면 인사하도록 때려서라도 가르쳐야지…

다 부모의 훈육 문제야…

저 아이는 참 예의가 없어… 부모는 뭐 하는 거지?

과거의 교육이 아이의 행동의 변화에만 집중하는 한계점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는 증거는
오늘날 과거의 철저한 “예절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겉으로 밝게 인사하고 예의 있는 척을 해도,
마음 속에서는 그런 순수한 존경의 마음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

내 윗사람에게 깍듯이 대하는 아름다운 예의에서 그치지 않고
내 아랫사람에게 당연하듯 예의를 요구하는 권위주의적 태도

사회와 국가에 세워진 권위에 대한 찾아보기 힘든 예의와 존경심

본인들은 그런 교육을 받고 예의를 배웠으나
사실 되돌아보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그래서 내 아이에게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지 잘 모르는 문제.

이것이 어쩌면 과거의 ‘무조건 하라면 해’식의 ‘예절교육’이 가진 맹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명령은 아무런 이유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하라면 해’라고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합니다.
로마서 13장 7절의 이 명령이 주어지기 앞서
바울은 11장이나 되는 긴 내용으로 명령이 주어진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죄 아래 있다는 것(1장)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린 다는 것(2장)

그 심판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3장)

그리고 그 심판에서 어떻게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계속해서 가르칩니다: 칭의(3~5장)와 성화(6~8장), 그리고 하나님의 의(9~11장).

죄인인 우리를 그 아들의 희생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삶이 곧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명령이 주어지기 바로 전에 바울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요즘 아이들도 자신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봅니다.
사탕을 주거나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예뻐하는 어른들은 알아서 찾아가서 인사하고 안깁니다.

부모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인사 안 해?”라고 하지 않아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에게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 바울과 같이 긴 동기에 대한 교육이 시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과 욕심, 교만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것.

그 죄를 부모도 가지고 있으며 그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이 아이들의 죄를 위해 그 아들을 죽이시기 까지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

그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 방법 중 하나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앞에 예의를 다하는 것이라는 것.

 

아이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어느 정도 감을 잡는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은 좋은 “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감”이라고 할까요?(^_^)

아이에게 아이 눈 높이에 맞는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니까요.

 

오늘날에도 예의 있는 아이들이 사회적인 인정을 받습니다.
예의 있게 남을 대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다른 사람에게 예의 있게 대우를 받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것을
가르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권위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가 가졌던 권위는 엄청났습니다.
자녀의 목숨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더 권위주의적이고 “하라면 해!”식의 교육이 가능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징계나 매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아무런 동기부여나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내가 원하는 행동을 만들어내라는 식의 교육은 분노를 사기 쉽습니다.
아이들은 마땅히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예절 교육에 있어서도 아이들은 주의 말씀을 통해 양육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성인들에게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듯
아이들도 아이들 눈높이에 맞도록 동기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이 강권하셔서 그분을 위해 살고자 하는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알아가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내 아이가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것을 바라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내 아이가 예의 없는 아이로 자라 사회에서 교회에서 손가락 받기를 원하는 부모도 없습니다.

진정한 성경적 자녀양육은 이 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마땅히 존경할 자를 존경하도록 교육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내 아이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죄가 가지고 있는 악독함과 그 무서운 결과를 말해주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을 마땅히 두려워하도록 가르쳐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셨는지 시시때때로 속삭여주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권면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