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한겨레 사설, 칼럼란에 시인이자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나희덕 교수는
기독교인이지만 스스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면서

“낙태는 반대하면서 사형제도는 찬성한다는 것…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사형이라는 합법적이고 제도화된 살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고 여겨진다”

고 말하였다.

나교수는 이렇게 칼럼을 마무리 짓는다.

기독교가 세상에 알려야 할 ‘복음’이란 모든 생명은 존귀하며
교화와 구원의 가능성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교수의 마지막 발언은 기독교가 제시하는 “복음”의 일부인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낙태나 자살, 안락사에 대해서
기독교는 성경의 원리를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창 1:27),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요 3:1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이렇게 생명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나 교화와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하려는 기독교의 원리가
왜 사형제도에는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특히 오판 등을 통해 억울하게 사형당하는 사람들이나,
사형제도가 범죄율과 큰 관계가 없다고 결론 짓는 통계들은
사형제도의 당위성에 대해 큰 의문을 제기한다.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로마법으로는 아니었지만)
돌에 맞아 사형당해야 했던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예수님이 사형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수님께서 완전히 굴복하고 복종하셨던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약시대에 사형제도를 직접 도입하신 분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만나게 된다.

사실 이 법에 담긴 법 정신은 율법이 도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한 나라로 부르시고,
그 나라의 법을 제정하시면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그 원리를 적용하여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 그리고 여러 가지 규율과 법을 주셨는데,
21장~22장에서 사형판결에 이르는 죄목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로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출 21:12)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출 21:14)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5)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2:19)

구약시대 율법 안에 주어진 사형제도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경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 사형제도를 도입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러한 자들에게
속죄제, 속건제로 죄를 씻어낼 기회를 주지 않으셨는가?

살인자들, 행음자들의 인권은 누가 보호해주는가?

그들의 교화와 구원의 가능성을 왜 빼앗아가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쉽게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어간 피해자를 간과하는 경향을 만든다.

살인자는 피해자의 인권을 무시했다.
피해자가 구원받을 기회를 약탈했고,
피해자가 교화될 가능성을 빼앗았다.

구약에서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며, 그들의 교화와 구원의 가능성을 빼앗아버린 자들에게
사형이라는 형벌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시대로 넘어와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다르게 하나님은 로마라는 배경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세우셨다.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미래에 이루어질 사실이지만,
당시 1세기에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터를 세우시고 그 위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를 이렇게 부른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이러한 “나라”로서 부르심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동일한 부르심이다(출 19:6).
그러나 신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적인 나라를 의미하며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임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교회가 속해있는 국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동일하게 국가에 순종할 것을 명하고 있다.

우리가 거룩한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현재 우리가 속한 정치체계와 주권자를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와 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벧전 2:1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4)

당시 바울과 베드로가 이 말씀을 기록하였을 때,
당시 로마의 재판장과 사법체계가 오늘날보다 훨씬 공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황제가 노예들 몸에 불을 붙여서 정원에 등불로 사용했던 때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워진 국가 안에서
정치 지도자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원래 목적이
선을 베풀기 위해서, 그리고 악행하는 자를 보응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국가의 순기능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부패하고 부조리한 국가의 역기능을
많이 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오판, 억울한 처형 등).

하나님이 세우신 정부의 순기능은
구약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원리를 반영한다.

다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고,
그 사람의 교화와 구원의 가능성을 짓밟은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것이 베드로와 바울이  말한 국가의 순기능 중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응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다.

우리는 사형제도와 관련되어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맞물려 생각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또 다른 속성은 그분의 공의다.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점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도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오판이나 국가의 역기능 때문에 생기는 잘못된 처벌은 논외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악된 국가의 오용으로 생기는 문제이지,
사형제도가 순기능에 충실한 국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다.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성인 남자가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린 여자 아이를 겁탈하고 죽을 때까지 불구자로 살게 만들었을 때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한 사람의 미치광이가 수십 명의 젊은이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고
호텔처럼 좋은 감옥에 들어가 일하지 않고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면
그곳에 하나님의 공의는 존재하는가?

오판으로 억울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당치 않은 행위라면,
그 가당치 않은 행위를 자신의 야욕을 위해 무자비하게 행하는 자들에게
편안한 노후를 제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얼마나 거리가 먼가?

살인자의 인권, 그들이 구원받고 교화받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다는 말은
사랑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 죽어간 피해자들의 인권과
구원받고 교화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린 그들의 억울함에 대한
공의를 주장하는 것이 왜 비인격적이고 사랑 없는 행위란 말인가?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예로
이 글을 마무리 하기 원한다.

예수님은 사형당해야 했던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사랑하셨고 은혜를 베푸신 것은 사실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가
여인의 범죄가 죽을 죄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여인의 죄 값이 치러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 여인의 죽을 죄는 그 죄 값을 치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형이라는 판결을 받으셨고
그것으로 그 여인의 죄 값을 치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녀의 죄 값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치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사형제도를 좋아하신다” 혹은 “하나님은 사형을 반대하신다”라는
직접적인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일관성 있게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셨고, 사람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빼앗는 죄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생명을 빼앗길때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내가 내 이웃의 생명을 고의적을 빼앗는 것이
그에게 동일한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다.

내가 나의 인권과 내가 가진 교화와 구원받을 기회를 존중한다면
다른 이의 인권과 그가 가진 교화와 구원의 가능성을 존중하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기에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에게 완전한 공의가 없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완전한 복음이다.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완전한 공의가
그 아들 예수의 죽으심으로 선포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확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