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개독교”라 불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각종 비리와 부패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니다.
다른 종교에도 비리와 부패의 문제는 항상 있어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한 증오와 미움을 끝까지 끌어올리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기독교의 배타성이다.
단순히 비리가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만 옳다라고 말하면서 비리를 저지르기 때문에,
더 많은 비난이 따르게 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 안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기준이 참이 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모든 종교가 변화를 꾀하고 있는 시국에
기독교만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여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길러낸 세대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고집은
지독하고 예의 없으며 지혜롭지 못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너도 참이고 나도 참일 수 있다”를 인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수와 잘못은 서로 눈감아 줄 수 있지만,
”나만 참이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의 잘못은
절대로 넘어갈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증오와 분노는 독선적인 사람에게 집중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얼마나 이 시대에 있어 예의 없고 불쾌한 아집과 독선인가…
이 천년 전,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다.
그것도 천 년 전에 기록된 구약 성경을 가지고 확증하며 부르짖었다(벧전 2:6~8).
베드로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이며, 거듭남의 근거였다.
또한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영혼의 출생과 성장에 필수적인 능력의 말씀이었다(2:2).
베드로가 사용한 세 구절의 구약성경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가리켰고,
베드로는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계시받고 부지런히 연구했다고 말했다(1:11).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베드로는 자신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확실한 증거라고 말했다(벧후 1:19).
감정, 경험, 느낌 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우리가 전해야하는 하나님 말씀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말씀의 기근 가운데 살고 있다.
설교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원래 의미에는 큰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신바람 나게 살 수 있는지 가르친다.
‘인내의 세 가지 비결’, ‘겸손하면 인생이 잘 풀린다’, ‘행복의 삼 단계’
설교자들은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미국 남침례교단의 총장 알 몰러는 한 컨퍼런스에서 설교만큼 쉬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는 간단히 말해서, “읽고 설명하고, 읽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말씀 그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설교의 핵심이며,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일이다.
오늘날 말씀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는 설교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거부하기 시작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에 떠밀려 기독교의 절대진리를 타협하는 현실은
예수만이 길이라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변함없이 가르치는 성경을 무시한 결과이다.
베드로는 이샤아 28장 16절과 시편 118편 22절(70인역에서는 117편 22절),
그리고 이사야 8장 14절을 통해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맞이할 결과를
말해준다.
베드로가 사용한 구약성경의 본문들은 유사한 배경을 가진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제국의 군사력에 파괴되어 갔다.
이 무서운 제국의 침략의 원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불신앙이었고,
구약성경은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파멸시키시지 않는다.
인자하신 그분은 피할 길을 주시는데,
그 길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그렇게 간구하고 권면하기를 쉬지 않았던,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성실하게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윌킨슨과 보아가 말했듯, “죄는 언제나 고통으로 이끌지만 회개는 언제나 구원으로 이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해야 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수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다윗과 언약하시고 솔로몬에게 다시 확언하셨듯이
다윗의 왕좌를 영원히 지키실 것임을 믿어야 했다.
당장 눈앞에 거대한 제국의 침략과 공격 앞에 그들은 두려웠을 것이고
흔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회개의 길, 믿음의 길은 오직 하나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애굽의 약속을 더 신뢰했다.
애굽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었다.
더 비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선포하여 백성들을 진리로 이끌어야 할 자들이
술 취하고 더러운 것을 쏟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그것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구원의 길만이 진정한 길이라는 것을 말한다(이사야 28:1-3, 15; 30장, 31장).
베드로는 이사야의 표현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라 하였다.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구원의 길이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그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길 외에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 그분의 주권을 무시하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아무 사람이나 뽑아서 구원자로 삼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구원자들이 있어왔다.
모세, 가장 온유했던 강력한 리더.
여호수아, 가장 강력했던 용사.
다윗,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님과 견줄 수 없다.
그들은 다 연약했고 넘어졌으며, 흠이 있고 죄 많은 인간이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계획하셨고, 계시해오셨으며, 마침내 드러내신
구원자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셨다.
아무런 흠도, 죄도 없으신 완벽하신 분.
그 자체로 최고의 가치를 지니신,
생명 그 자체, 빛 그 자체,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셨다.
그 누가 이 구원자보다 더 보배로울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이 예수를 모퉁잇돌로 삼으셨다.
모든 건물의 균형과 무게중심과 각을 좌지우지하는 기초석.
예수님은 반석이신 자신위에 세워진 자들만이
비가 오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다(마 7).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는
그것이 자기 자신이든, 다른 종교이든, 철학, 사상, 재물, 사람이든
모래 위에 세워진 집처럼 결국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것이다.
참된 구원자 예수를 모퉁잇돌로 삼은 자들,
”그를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사실 단순히 부끄러움을 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베드로는 4-5절에 산 돌이신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 스스로 산 돌들이 되어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전이 된다고 하였다.
영적으로 우리는 한 몸 된 교회가 되어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며,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모퉁잇돌 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든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받고 함께 누리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그를 믿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이다.
이토록 보배로운 영혼의 기초석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재앙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베드로가 두 번째로 사용했던
시편 말씀을 사용하셨다(마 21:42; 막 12:10; 눅 20:17).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시편 118:22)
이 시편은 왕이 그들의 대적들을 파하고
성전에 돌아와, 승리를 감사하는 시다.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무시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조를 멸시했고 하찮게 여겼다.
시편기자는 마치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들처럼
이스라엘 왕조를 멸시하는 적대국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그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모퉁잇돌로 세우실 것이라 확신하며 선포한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쓰신 것을 상기해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종교시스템이 구원의 길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선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길, 예수를 멸시했다.
나사렛이라는 별 볼일 없는 동네에서 온 평범한 외모의 남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교육 받은 적도 없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특별한 위치에 있지도 않은 이 사람이
자신만이 구원의 길이라 말할 때,
그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하찮게 여겨 거절한 그 돌이 모퉁잇돌이 될 것이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멸시하고 거절한 그분 앞에 다시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절했던 분이 진정 누구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밤새 울부짖고 이를 가는 괴로움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베드로는 이어서 이사야 8장 14절을 사용했다.
이사야 8장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다른 나라가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명하는 내용이다(사 8:11~13).
그런데 이사야는 14-15절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성소가 되시는 그분이 왜 이스라엘의 두 집에게 부딪치는 돌이 되시는 걸까?
베드로는 간단하게 답변한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2:8)’
그렇다. 누군가에게 보배롭고 성소가 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이 되신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는 길에 있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들을 말하고,
부딪치는 돌은 함정이나 올무에 장치되어 있어
올무에 넘어졌을 때 그를 덮쳐 몸을 상하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돌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에게 예수는 그런 존재다.
넘어지게 하고 죽게 한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적다.
왜냐하면 예수를 인격자, 도덕적인 사람, 성인, 훌륭한 사람으로만 보기 때문이고,
그의 가르침을 도덕적 규범들, 지혜로운 말들, 좋은 제안들로 여기기 때문이다.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는 가벼운 설교들이 이러한 풍조를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말씀에 담긴 참된 의미를 통해 볼 줄 안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접했던 사람들처럼 그 권위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가진 권리와 예수 외에 존재하는 모든 신념체계를 고수한 채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삼킬 수 없다.
그분은 부딪치는 돌이며 걸려 넘어지는 바위다.
그분을 모퉁잇돌로 삼을 때 그 외의 모든 것이 그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다.
가치 있는 것은 그분이 가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삶의 유일한 목적과 이유는 그분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분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다.
부자 청년은 돈 때문에 예수를 버렸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위치와 사람들 앞의 명성을 예수와 바꿨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욕심과 야망을 포기하지 못해 예수를 포기한다.
즐기는 술과 문화, 친구들을 버릴 수 없어 예수를 버린다.
사회적 성공과 출세를 위해 예수를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여긴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리적 거리는 존재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성경이 증거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 예수를 거절한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택하신 보배로운 구원자를 믿지 않을 때,
예수는 자동으로
그들에게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걸리적 거리던 방해물이었던 예수 앞에 그들이 마침내 섰을 때,
그들은 그들이 거절한 그분이 하나님의 택하신 보배로운 모퉁잇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예수는 그저 걸리적 거리는 존재였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들의 영혼을 넘어뜨리고 멸망케 하는 심판의 돌이 되신다.
당연한 결과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한 죄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구원자 예수를 버린 결과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을 십자가로 여시고
어떤 존재로 높임을 받으셨는지 빌립보서 2장에 기록하고 있다.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될 것이고
모든 입술이 그를 주로 시인할 것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해 창조되었고,
다시금 그분이 만물의 주인으로, 왕 노릇 하실 것이다. 영원토록.
우주의 모든 영역을 점령한 영원한 하나님의 제국에서
제국의 왕이신 분을 거절하고 멸시한 자들이 받을 처사는
영원한 징벌뿐이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고 외치신 첫 복음의 소식이 완벽하게 이해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예수님은 다정한 손길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자고 손을 내밀지 않으셨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항복할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택일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핍박과 조롱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극단주의, 보수주의라는 꼬리표도 각오해야 한다.
때론 같은 기독교 내의 사람들에게
사랑 없는 자, 이해심 부족한 자,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사랑을 못 배운 자,
더 치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로
낙인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라 불릴 수도 있고,
지식인들에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바보 내지
무식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 시대로부터 천년 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증거한다.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것을 증거하셨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도 동일한 목소리로 예수만이 길이라 선포한다.
시대적으로 예수만이 길이라는 절대 진리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며 부딪치는 돌이다.
그러나 전해야 한다.
예수만이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예수만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가장 보배로운 구원자라는 것을.
예수만이 하나님의 왕국의 기초석이시라는 것을.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한 없이 보배로운 그분이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바위가 된다는 것을.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우리의 입술과 삶으로 전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말할 것이다.
믿는 우리에게 사도 베드로의 말씀은 새로운 도전을 준다.
우리는 정말 예수만이 구원의 길인 것처럼 사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정말 그분이 우리 삶의 기초석인 것처럼 사는가?
그분이 너무 보배로워서 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소유하기 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더 얻기 위해 그 외의 모든 것을 날마다 더 포기하는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은 오히려 더 유익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나에게 가장 고상한가?
그 외의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릴 만큼 말이다.
너무 고지식한가? 너무 꽉막혔는가? 율법주의의 냄새가 나는가?
너무 한 쪽에 치우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내 삶의 방해물인가?
예수를 믿는 자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소리를 들었다.
천하에 퍼지는 염병
작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하는 도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예수쟁이
예수를 위해 버리는 삶은 결코 손해 보는 삶이 아니다.
예수를 소유하기 위해 포기할 때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모퉁잇돌,
하나님이 택하신 그 모퉁잇돌의 고유가치가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지
영원토록 질리지 않고 바닥나지 않는 그 보배로움과 영광에
사로잡혀 감탄과 찬양과 영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