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이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사울왕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겠다고 말씀하신 새 왕을 찾아
사무엘이 이새의 집으로 내려갔을 때,
뛰어난 용모와 키를 자랑하는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삼상 16:6)
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부분이나
그 사람을 두루고 있는 배경과 환경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했던 말과 같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그들이 묘사한 예수님의 성품은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잘 드러내주었습니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막 12:14)

하나님이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신약성경에
계속해서 나옵니다(롬 2:11; 갈 2:6; 엡 6:9; 골 3:25; 벧전 1:17).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동성애자들이 이 말씀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목사는 TV토크쇼에 나가서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믿는다면
다른 종교, 이슬람, 몰몬, 힌두교, 불교에는 구원이 없냐고 묻자
자신은 모른다며
하나님은 외적인 종교의 형식보다는
그들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말합니다.

교회 출석하기보다 일을 선택하고,
아이들에게 학생회 모임보다는 학원을 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교회 출석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기도도 잘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중심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 트로트로 찬양하는 목사가 TV에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던 성경 구절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판단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구약시대로 돌아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어떤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라고 하면서
집에서 입던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말라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가진 예배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말 1:8)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관심이 있었다면
자신들의 제물이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싫어한다고
아주 오래 전에 밝히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레 22:22)

만약 오늘날 그들이 우리 앞에 있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판단하지 마세요! 내 마음의 중심에 뭐가 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내 마음은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넘친다구요!”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을 당신은 모를꺼에요!”
”주님은 아세요. 주님은 내 마음의 중심을 보시니까요.”

사실 이러한 말들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이미 그들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마음을 아셨습니다.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 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1:13)

사랑은 그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중심”은 지극히 감정 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을 떠올리면 마음에 차오르는 뜨거운 열정,
흐르는 눈물이나 벅차 오르는 가슴, 전율, 감동, 순수한 마음…

대부분 그것은 감정 중심적이며
더 자세히 말하면
자기 자신의 감정 중심적입니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정이 풍성하고 충만하면
내가 보기에 만족스러울 만큼 적당하면
그것으로 나의 중심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그분을 대하며 높이고 예배하는 것이
그분의 속성에 합당한 것인지 고민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말씀에 어떻게 나와있는지
부지런히 찾고 묵상하기 보다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감정과 열정이 충만하면
중심이 바르게 되어있다라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잠 1:7), 인간의 본분이라고 말합니다(전 12:13).

우리가 가져야 하는 올바른 중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베드로가 고백한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찾는 분이셨습니다.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막 12:14)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바른 중심은 항상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합니다.
즉 올바른 중심은 항상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남편이 아내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너무 좋아하는 열정과 뜨거움으로 가득 차서
평소에 아내가 그토록 질색하는 물건을
선물로 사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혹은 아내의 성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찮은 물건을 준다고 생각 해보십시오.

선물이 어찌 되었든 중심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싫어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판단하지마! 내 중심은 아주 순수하고 옳았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중심은 내 감정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과
상대방이 원하는 것,
상대방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서 바른 중심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알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풍부함을 만족시키기 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이
바른 중심이 갖는 특징입니다.

 

동성연애자들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로
자신들의 죄악을 무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싫어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정말 마음에 바른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만족시키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욕망을 죽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말씀하신
진리의 말씀을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고 높이기 위해
다른 이들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치는 것이
바른 중심입니다.

 

교회 출석보다는 일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보다 취미생활과 오락을 즐기면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로 마음의 바른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형제 자매들과 함께 모이기를 즐거워하는지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기를 원하는지
얼마나 깨어 기도하기를 기뻐하는지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 마음의 중심을 아십니다.

 

한 가지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트로트 목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트로트라는 장르는 음악의 한 장르에 불과합니다.
락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로트라는 장르 자체가 더러운 음악이거나
락음악이 마귀의 음악이라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다양한 장르의 크리스챤 노래를 좋아합니다.

클래식, 재즈, 팝, 발라드, 때로는 소울이나 R&B, 랩도
상황에 따라 즐기는 편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이야기 해온
바른 마음의 중심을 말하기 원합니다.

많은 CCM가수들이나 음악사역자들이
마음의 중심을 이야기 할 때,
저는 그들이 말하는 마음의 중심이
자신이 가진 감정의 중심을 말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말씀의 진리로 알기 원하는
바른 중심을 말하는지 궁금합니다.

락이라는 음악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에,
혹은 재즈라는 장르를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묘사하고 표현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취향을 고집하는 것은
바른 마음의 중심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레이스 교회에 참석하면서 한 가지 놀란 것은
그들이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결정할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볼 때 합당한지 고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흥에 겨워서
감격하고 가슴이 벅차서 무한 반복하듯 후렴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본문으로 만든 찬양의 경우는
실제로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 주위를 돌며 반복적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를 외치기 때문에
반복을 조금 많이 해도 좋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단조와 장조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표현할때 웅장하고 근엄한
연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노래할때
부드럽고 따뜻한 반주와 함께 편안하게 제창할 수 있는 곡을 선정하고

무엇보다도 가사가
하나님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표현하는지 꼼꼼하게 살피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위해 400여 곡들 중에서 6, 7곡을 선정하는 과정 가운데
그들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그들의 음악스타일이나 취향, 반주의 코드나 멜로디의 선호도, 대중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얼마나 잘 담고 표현하는가”였습니다.

그들은 때로 드럼도 사용하고, 일렉기타도 사용했습니다.
때로는 관악기만 사용하거나 현악기만 사용했고,
하프부터 많은 북들이 함께 나오는 풀오케스트라로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부지런히 알기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트로트 목사는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이 트로트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교회 안에 나이 드신 분들이 즐길 수 있는 기독교문화가 없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이 다른 성도를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하나님 앞에 바른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분의 열정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을 무시하거나
트로트라는 수단을 통해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헌신된 마음을 평가절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진정으로 성경,
즉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외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 그분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 전지하심과 편재하심,
하나님의 공의와 정직, 주권과 지혜와 힘과 능력과 권세를 알기 원하며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예배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바른 마음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나이 드신 부친님 모친님께도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표현으로 찬양할 기회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