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편에 이어서 <2024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동성애자를 위하여 축복 기도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목사 9인의 공동 고백”에 관한 성경적 비판이다. 그들은 총 8개의 주장과 함께 각각의 주장에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데, 필자는 그들이 인용한 성경 본문이 “문맥을 벗어난 본문” 즉 “기만”이라고 계속해서 검증하려고 한다.
4. “축복기도는 목사의 거룩한 사명입니다” = 누가복음 6장 28절?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눅 6:28)
이 말씀은 목사의 거룩한 사명 중 하나가 축복기도라는 것을 지지하는 말씀인가? 공동 고백을 작성한 목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모든 기도에서 누군가의 복을 비는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은, 이와 같은 가르침에 기초한 것입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목사의 축복기도에서 제외되어야 할 사람도, 장소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죄가 없는 곳은 없고, 목사가 축복기도를 드리는 모든 곳은 부정한 곳”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죄가 없는 곳은 세상에 없기 때문”에, 성소수자를 위한 목사의 축복 기도 역시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죄인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다짐할 때 거룩한 존재로 거듭나고, 죄가 있는 장소도 거룩한 예배가 행해질 때 거룩한 장소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먼저, 예배 행위가 죄인을 거룩하게 하거나 부정한 곳을 거룩하게 한다는 가르침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죄인을 거룩하게 하시고 부정한 곳을 거룩한 곳으로 구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그것을 거룩한 속죄 제물을 통하여 하신다(그래서 피를 뿌리고 바르는 것이다). 예배 행위는 거룩하게 하시는 분, 하나님께 그분이 마련하신 수단인 화목 제물을 통하여 은혜를 달라고 구하는 겸손한 태도를 동반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을 가겠다는 결단이 담긴 행위이다. 이런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인용된 누가복음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정말 단순하고도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자: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드려야 하는 축복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과 화에 관한 말씀 중 하나인 본문은 이어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 할 것을 요구하는데, 그 본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제시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것처럼, 그렇게 원수에게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눅 6:35-36). 하나님의 자비로움과 인자하심이 그 은혜를 모르고 악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들의 죄를 즉시 처벌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은혜로, 그들에게 회개하여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하시는 은혜로 나타난다. 그러면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원수이자 하나님의 원수(저주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 내용은 무엇이어야겠는가?
죄에 합당한 저주와 심판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으로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인생을 살게 해달라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9인의 목사가 성소수자를 축복한 기도 내용이 이와 같다면, 그들의 축복 기도나 성경 본문 활용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못된 열매 맺는 못된 나무를 축복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며 살아도 결코 무너져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라면, 이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마 22:29).
5. “성적지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 고린도전서 12장 13절?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 12:13)
이 말씀은 성적 지향을 존중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말씀은 성적 지향이 아니라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된 신자 모두가 각각 다른 은사와 직분을 받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의 능력으로 서로 돕고 세워주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2장 1절부터 바울이 “신령한 것에 대하여”라고 주제를 분명히 밝히는 것을 보라. 그래서 소제목도 “성령의 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런데도 성소수자를 축복한 9인의 목사는 이 본문 말씀으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전개한다: 1)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라는 것이 정신의학계의 합의입니다”, 2) “회복 치료나 전환 치료는 성소수자에 대한 학대입니다”, 3) “성적 지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1)번과 2)번은 본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학적으로도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다. 동성애에 관한 정신의학적 진단은 순수한 의학적 과학적 검사와 분석의 결과이기보다 기존의 자기 신념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조작하고 과장 및 축소한 결과물일 때가 많다. 그리고 성적 지향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이들이 인용한 고린도전서를 통해 오히려 반박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전혀 성적 지향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지만, 6장에선 언급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9-11)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는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자로 모두 이성이나 동성을 향하여 잘못된 성욕을 품는 죄를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이들의 성적 지향을 존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꾸짖는다. 이런 성적 지향성은 그들을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끌어 갈 것을 알고 경고하는 것이다. 과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 전에 그들중 이런 성적 지향을 가진 자가 있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세례를 주시고 은사를 주신 성령님은 그들의 성적 지향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욕구를 제거하고 하나님께 받은 은사로 서로 섬길 수 있도록 올바른 소욕을 그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일으켜 마시게 하신다.
6. “성소수자 혐오세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 디도서 3장 9절?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관한 싸움을 피하십시오. 이것은 유익이 없고, 헛될 뿐입니다(디도서 3장 9절)
바울이 디도에게 이 편지(디도서)를 쓴 이유는 그레데에 남겨 둔 디모데가 그곳에서 “남은 일을 정리하고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었다(딛 1:5). 그가 정리해야 할 “남은 일” 중 하나는 그레데에 세워진 교회 성도들에게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는 것이었다(딛 3:8). 그러나 디모데가 그들을 가르치고 권면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공동 고백에서 인용한 말씀인 “어리석은 논쟁”과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족보나 율법에 관한 싸움으로 끝나면 결국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 고백을 작성한 9인의 목사는 왜 이 본문을 가지고 “성소수자 혐오 세력을 경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을까? 어쩌면 그들은 동성애를 둘러싼 논쟁이 헛된 싸움이고 그로 인해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인용한 말씀을 근거로 동성애를 반대하면 사람을 차별하게 되고 약자를 격리하게 되며, 선교를 어렵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감리회는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촉구한다. 동성애가 죄라고 성경을 근거로 말하는 것 자체를 차별과 혐오로 몰아세우면, 결국 9인의 목사처럼 동성애자를 축복하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검은 구름”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인용한 디도서 말씀은 오히려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을 힘쓸 때, 죄인에 관하여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갖출 것인지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대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 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3-8)
그리스도인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자기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오직 긍휼하심으로 구원 얻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동성애자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들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입게 되기를 구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은 혐오 세력이 아니다(실제로 혐오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성령으로 풍성히 부어 주시는 은혜를 힘 입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힘쓰며 살라고 굳세게 말하는 것이다.
7. “2024 서울퀴어문화축제 축복식 진실은 이렇습니다” = 누가복음 4:24?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눅 4:24)
공동 고백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인용한 성경 구절과 고백문을 작성한 자들의 주장 사이의 관계가 더욱 희미해진다.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면서 하신 이 말씀을 도대체 왜 사용한 것일까? 아마도 이들이 이 항목에서 마지막으로 얘기한 “이동환 목사 출교는 무효이며, 불법은 저지되어야 합니다”라는 내용 때문인 것 같다. 감리회 소속 목사가 자기 교단 내에서 받은 “불법”(?)적인 징계를 이 말씀을 통하여 지적하는 것이다.
이들은 “혐오와 차별은 감리회가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의 가르침 자체를 혐오와 차별로 몰아세우고, “성소수자도 동등한 인간으로 축복받을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말로, 만일 동성애가 죄라고 인정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죄 앞에 평등하기 때문에, 모두가 축복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4번 주장을 반박할 때 물었던 것처럼, 그들이 동성애자를 무슨 말로 축복하고 어떻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지가 정말 중요하다. 동성애자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구세주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죄인이나 티가 있는 죄인이나 매한가지니, 그 죄를 눈 속에 그냥 집어넣은 채로 살아도 된다고, 그래도 하나님이 모든 죄인을 차별 없이 천국으로 이끄실 것이라고 말하는 축복이라면, 그 모든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의로운 삶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멸시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만일 9인의 목사가 십자가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어떤 식으로든 흠집 낸다면,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며 같은 말을 할 것이다(빌 3:18).
8. “감리회에 제안합니다” = 마가복음 8:34?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공동 고백을 작성한 9인의 감리회 목사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감리회가 “환대와” “돌봄”, “축복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동성애자를 자기들이 하는 방식대로 환대하고 돌보며 축복하는 것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인용한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몇 구절만 위로 올라가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크게 꾸짖음 받는 장면이 나온다(막 8:31-33). 예수님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는데, 베드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항변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는 말씀으로 혼이 난 것이다(막 8:33).
베드로는 하나님이 죄인을 환대하고 돌보고 축복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자기 방식대로 생각한 것이다. 동성애자를 환대하고 돌보고 축복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자기 하나뿐인 아들을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죄인의 죗값이 모두 치러졌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고(칭의), 거룩함을 입으며(성화),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환대, 돌봄, 축복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이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자는 베드로와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께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시험했었다.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사탄의 길을 좇아 세상을 구원하라고 속삭인 것이다(눅 4:5-8).
만일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행하신 유일한 그 일을 가지고 죄인을 환대하고 돌보고 축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 외에 또 다른 방법(우리 생각에 더 좋은 길)이 있다고 감히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죄인이 그들의 삶을 그대로 간직하고 즐기고 살아가도 하나님은 그들을 환대하시고 돌보시고 축복하신다고 말하는 셈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뿐인 아들을 수치와 모욕과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로 내몬 하나님 아버지는 도대체 왜, 그것이 그분이 선택한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면, 또 다른 길이 존재한다면, 왜 그런 무자비하고 잔인한 일을 하신 것인가?
마지막으로 인용된 말씀은 야고보서 2장 1절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신 일 곧 십자가 복음이 필요하다. 교회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죄인에게 ‘회개하고 십자가 복음을 믿으라’고 권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동성애를 행하는 죄인에게 ‘회개하고 십자가 복음을 믿으라’고 사랑으로 간청한다. 우리가 모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의 우리 주”로 믿고 따르는 “형제자매”라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것이 자기 생각과 방법 등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유일한 길을 좇는 삶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