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이동환 목사는 퀴어축제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축복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했다(2023년 12월 8일). 성경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요구한다(롬 12:18). 그러니 혐오하지 않고 화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축복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동환 목사가 이후로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는 단순히 한 시민으로서 화평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축복기도를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는 분명히 성소수자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9월 4일에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그는 “한국에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유달리 많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외국 교단을 보면 성소수자가 죄인이라는 인식은 이미 많이 사라졌다”라는 말을 했다. “하나님의 창조에 실수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성소수자를 잘못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라고 했다(기사 원문: 보기).

또한 비디오머그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성소수자를 지지하는가? 아니면 지지하진 않지만 존중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성소수자를 포함해 어떤 사람이든 지지받아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출처: 보기).

갈수록 이런 생각을 더 많은 기독교인이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유일한 특별 계시,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건전한 논의를 하면서 진전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은 희망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실린 이 목사의 성경에 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수천 년 전에 쓰인 고대 문서고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온다’고 하지만, 이런 인용 역시 선택적이다. 자기들 신념을 강화하는 부분만 문자 그대로 가져오고, 그 외 다른 구절은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적 흐름과 상황을 보지 않고 선택적으로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너무 악의적이다.” 비디오머그와의 인터뷰에서도 ‘성경은 방대하고 동성애를 다룬 구절은 고작 7구절에 불과하며 그조차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는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폭력적인 성행위, 성폭력으로 봐야 할 여지가 있다’라고 말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그 성경을 바라보는 뚜렷한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목사와 같은 생각을 가진 기독교인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려 한다. 시대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성경은 너무 오래된 책이니 지금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같은 성경을 보지만 다른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먼저 원문이 쓰인 시대와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발견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찾아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금하신 동성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녀의 순리를 거스르는 모든 종류의 역리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고, 이 목사와 같은 기독교인은 그것은 단순히 동성 간의 성폭력 또는 성폭행만 해당한다고 제한하면서,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동성애는 지난 수천 년간 기독교(나아가 유대교) 역사상 알지도 못했던 일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고 증거를 가지고 말하려고 해도, 증거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니 이 방법으로는 논의가 불가능할 것이 뻔하다. 느헤미야 기독연구원 김근주 교수는 독실한 대화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나는 차마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만일 성경이 동성끼리 성행위 하는 것을 죄라고 규정한다는 사실이 완전히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이성애자인 자신도 성욕을 참지 못하고 아내와 성행위를 하는 것처럼, 그들도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으며 성행위를 할 수 있도록 권하는 것이 좋다’라고까지 말했다(출처: 보기). 그러니까 사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도 아닌 셈이다.

하지만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기독교인과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이 목사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성경의 사건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확증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공유하는 십자가 사건을 토대로 이렇게 질문해 보면 어떨까?

  •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고 할 때, 거기엔 동성애도 포함되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두 번째 질문에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돌아가셨다. 오늘날 바울에게 없었던 새 관점을 애써 찾으려는 이들이 학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대속의 개념을 억지로 빼내려고 애쓰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 이름 뜻부터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가 아니신가(마 1:21).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똑똑히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밝히셨다: “인자가 온 것은…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여 자기 몸을 주셨”다고 말했고(갈 1:4), 베드로 역시 신자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고 했다(벧전 1:18-19).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죗값을 대신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성경의 증언은 기독교인으로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에 하나 십자가에서 대속의 목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면, 세상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뚜렷한 목적도 없이 하나뿐인 자녀를 무참히 죽음으로 내몬 끔찍한 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이 남는다. 예수께서 담당하신 우리의 모든 죄 가운데 동성애도 포함되는가? 동성애만 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죄악이 존재하는데 그 속에 동성애도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굵직한 죄들 그러니까 살인, 간음, 강간, 사기, 폭행을 위해서만 그 값을 치르시고, 나머지 소소한 죄들, 가령 교만, 불신, 탐심, 술 취함 등은 보혈을 흘릴 만큼의 죄는 아니라고 여기셨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보이는 죄와 보이지 않는 죄, 마음으로만 짓는 죄와 행동으로 옮긴 죄, 심지어 하나님을 거역하는 성향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방식을 거스르는 기질까지도 모두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돌아가셨다. 성경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한다(갈 5:24).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들 곧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에 빠진 이들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갈 5:19-21).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이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는 또 다른 죄의 목록을 고린도전서에서 발견하는데 곧 ‘음행, 우상 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욕, 술 취함, 모욕, 속여 빼앗음’ 등 모든 불의한 일이다(고전 6:9-11). 여기서 우리는 탐색과 남색 곧 모든 종류의 성역할을 뒤바꾼 행위를 발견한다(많은 학자들은 이를 능동적으로 동성애에 임하는 자와 수동적으로 임하는 자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그것은 예수께서 이런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이 대속하신 죄로 되돌아가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은 자들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 목사와 같은 기독교인은 ‘저기요. 성경에 나오는 남색-탐색 역시 오늘날 동성애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다니까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창세기 3장 이후의 역사는 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의 역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우리는 죄를 정의할 때, 죄가 없이 창조된, 정말로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창세기 1-2장의 역사).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를 창조하지 않으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순리의 질서를 정해주신 그때로. 그 질서를 바꾸어 역리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 죄다. 생각해 보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라는 단순한 질서를 무너뜨린 것도 죄가 아닌가. 이 목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성소수자’라고 말했다. 아니다. 하나님은 성소수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셨고, 성정체성을 자기 지향적으로 바꾸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하나님 질서를 무너뜨린 성향, 기질, 생각, 정서, 행동이 모두 다 죄다. 예수님은 바로 그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것을 묻고 싶다.

  • 예수님은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나?

아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대신하여 죽으심’ 곧 대속이 두 번 반복된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하시려는 분명한 목적을 갖는다. 베드로는 그분의 대속의 목적을 더 생생한 장면을 묘사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십자가에 못 박힌 죄는 이제 우리 삶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대신 옷입혀주신 의, 그분을 위한 의로운 삶이 그를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마땅한 삶이다. 그러면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라는 말은 절대 축복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그냥 보고만 계실 수 없기 때문에, 그 넘치는 긍휼과 자비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뛰어드신 것이 아닌가? 우리가 더 이상 그 모습 그대로 살지 않도록, 그분의 거룩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은혜로 주시기 위하여 채찍에 맞고 나무에 달리신 것이 아닌가? 십자가가 약속한 축복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축복이 아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끔찍한 죄다.

<뉴스앤조이>와 유유히유영은 이 목사의 정직을 두고 여러 기독교 관련 인물이(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만의 의견으로) ‘어떻게 축복이 죄가 될 수 있냐’라고 따지는 취지의 짧은 다큐멘터리 “축복, 죄가 되다”를 제작했다. 그들은 영상을 배포하면서 이 목사의 재판비용을 모금하기도 했다. 필자는 반대로 묻고 싶다. ‘어떻게 죄가 축복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시고 이제는 새롭게 살도록 이끄시는 데, 어떻게 계속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죄를 축복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기독교가 확증하고 선포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